헌인릉 이야기(2)-헌릉과 인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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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05 10:03 조회1,865회 댓글0건본문
조선 제3대 태종(太宗)과 그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능이다. 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은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다섯번째 아들로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私邸)에서 탄생하였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주도적으로 평정하였으며 1400년(정종 2년)에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같은 해 왕위를 이어받아 개경 수창궁 (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이 완공됨에 따라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18년 간의 재위 기간에는 관제의 개혁, 신문고(申聞鼓)의 설치, 호패법 실시, 조세제도의 정비, 국방 강화를 위한 군사제도의 혁신등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1418년에 세종(世宗)에게 양위(讓位)하고 1422년 수강궁(壽康宮)에서 승하하였다. 원경왕후(1365~1420)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1365년(고려 공만왕14년)에 탄생하여 1383년에 가례를 올렸다. 태조 즉위년인 1392년에 정령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고, 태종이 즉위한 후 왕비로 책봉되었다. 1400년에 수강궁(壽康宮)(현 창경궁)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였다.
능제는 태조(太祖)의 능인 건원릉(建元陵) 형식에 따라 조영한 동원쌍봉릉(同原雙封陵)으로 조선 초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는 와형운문(渦形雲紋) 속에 수관인신(獸冠人身)을 조각하였고, 아래 부분에는 영지(靈芝)를 윗부분에는 영저(靈杵)를, 좌측에는 영탁(靈鐸)을 새겼다. 둘째, 조선왕조 왕릉의 신도비(神道碑)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보인다. 셋째, 유교사상에 따라 불교적인 제도를 폐지하고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배치한 쌍분으로 조영하였고, 석물은 망주석을 제외한 모든 석물은 각 2쌍식 배치하였다
인릉(仁陵)
사적 제194호
위치 :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조선 제23대 순조(純祖)와 그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의 능이다.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는 정조(正祖)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昌慶宮)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는데, 생모는 가순궁(嘉順宮) 수비(綏妃) 박씨이다. 정조의 원자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자 1800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정조가 승하함에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니 대왕대비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이때부터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의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하게 되었다. 순조는 재위기간 중 [순재고純齋考]를 친히 저술하였고,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동문휘고同文彙考], [서운관지書雲觀志], [정조어정홍제전서正祖御定弘濟全書] 등 많은 책을 간행하였다. 1834년(순조34년)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자 인조(仁祖)의 능인 장릉(長陵)으로 모셨으나 능지(陵地)가 불길하다고 하여 1856년(철종7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순원왕후(1789~1857)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180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효명세자(孝明世子)(익종翼宗)의 아들인 손자 헌종(憲宗)이 8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고, 철종(哲宗)때 다시 수렴청정하였다. 1857년(철종8년) 창덕궁 양심각(養心閣)에서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능제는 봉분에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합장릉(合葬陵)이지만 단릉(單陵)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다. 즉 상석(床石)(혼유석魂遊石)은 1좌만 놓여있다. 그밖에 곡담(曲담)이 둘려진 봉분 앞과 주위에는 석양(石羊), 석호(石虎),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무인석(文.武人石), 석마(石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원(陵園) 아래는 부속건물인 정자각(丁字閣), 수라청(水喇廳), 제향(祭享) 후 축문(祝文)을 태우는 것을 확인하거나 능 출입시 참배하는 곳인 망료위(望燎位), 신.구표석(新.舊表石), 홍살문(紅살門), 재실(齋室) 등이 있다. 이 능의 석물은 조선 후기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문.무인상에서 머리와 몸체는 1:4의 비율로 어깨가 움츠려 머리와 몸체가 붙은 형태이지만 힘차고 활기찬 기법은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융.건릉(隆.建陵)의 사실주의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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