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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양 자료-계곡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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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10 08:13 조회1,4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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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집에서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28권.  오언 율시(五言律詩) 150수

평안도 관찰사로 떠나는 김자중을 전송하며[送金子中按節關西]

 

국가의 치욕을 그 누가 씻어줄꼬 / 國恥誰當雪

산하(山河)에 흘린 피 아직 마르지 않았어라 / 關河血未乾

묘당(廟堂)에서 최상의 방책 널리 강구하여 / 議堂恢上策

변방의 책임을 유자(儒子)에게 맡겼도다 / 藩節屬儒冠

잘 드는 칼 들고 재단(裁斷)해 나갈지니 / 利器操應割

기울어진 판세 점점 더욱 안정되리 / 危枰轉得安

임금 은혜 보답코자 평소 지닌 소원 / 平生報主願

그대의 일편단심 알고 고요 / 知爾寸心丹


서쪽 변방 하늘 기둥 기우뚱했던 / 西極傾天柱

정묘년(丁卯年) 그때 일을 어찌 말로 다하리요 / 那堪說卯年

지금도 들리는 귀신의 곡성 / 至今猶鬼哭

어디에도 인가 하나 보이질 않네 / 何處有人煙

남비징청(攬轡澄淸) 어진 명성 멀리 전파되고 / 攬轡賢聲遠

높은 품직(品職) 하사한 임금의 은혜 / 橫金主渥偏

위태로운 나라 형세 그대 손에 달렸으니 / 艱危仗才傑

북산의 시편일랑 읊지를 마오 / 莫賦北山篇


[주1]김자중(金子中) : 자중(子中)은 김시양(金時讓)의 자(字)이다.

[주2]남비징청(攬轡澄淸) : 난세를 구할 뜻을 품고 부임지로 출발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범방(范滂)이 기주(冀州)로 떠날 즈음 말고삐를 잡고서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을 품었는데,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탐관오리들이 그 풍도를 듣고는 인끈을 풀어놓고 떠나갔던 고사가 전해 온다. 《後漢書 黨錮 范滂傳》

[주3]북산의 …… 마오 : 일 처리가 불공평하여 자기만 수고롭게 하면서 부모도 봉양하지 못하게 한다는 불만스러운 뜻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북산(北山)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이다.


  *계곡집 : 1994년 국역간행


  *장유(張維)

1587(선조 20)∼1638(인조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아버지는 판서 운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수봉,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되자 불가함을 주장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풍토에 대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고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 “고 하였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 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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