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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치수사업(1)-밀양 수산제 유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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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12 10:47 조회1,7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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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치수사업>-밀양 수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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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제의 유적 모습>

 

   가) <新增東國第 26卷  密陽都護府>에서

 수산현에 있다.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김방경(金方慶)이 이 뚝을 쌓아서 밭에 물을 대고 (농사 지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한다.

못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 마름. 연, 마름, 귀리가 끝까지 가득하다. 세종 때에 물길을 트고 수문을 설치하여 나라의 둔전(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의 둔전이 되었다.

  

   나) <야후 코리아, 야후 백과사전>에서

  경상남도 밀양(密陽)에 있었던 관개용 저수지. 제방의 길이는 728보(步)이고 둘레는 20리에 이르렀다. 벽골제·의림지와 함께 3대저수지로 꼽힌다. 위치는 밀양의 속현이었던 수산현으로 현재의 하남읍(下南邑) 수산리(守山里)·귀명리(貴明里) 지역과 초동면(初同面)의 검암리(儉巖里)·금포리(金甫里)에 걸치고 있다. 이 저수지는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수산제 주위 양동리·귀명리·동촌마을의 산등성이에서는 고인돌[支石墓(지석묘)]·돌덧널무덤[石廓古墳(석곽고분)]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조개더미[貝塚(패총)]가 발견되고 있으며, 돌칼[石劍(석검)]과 4∼7세기 무렵의 유물인 붉은토기[赤色軟質土器(적색연질토기)] 등 신라토기도 많이 출토되고 있다.


  다) <해양수산부 홈페이지>에서

 위치 : 경남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 문의 : 055-359-5637

삼한시대 농경문화의 유적으로 벼농사를 위하여 축조된 저수지이며 세조 13년에 경상도 제찰사 조석문이 부근 9개 고을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수축하고 국둔전을 만들었다.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제와 더불어 삼한시대의 대표적 저수지이다.

 

 라) <엠파스 백과사전>에서

경상남도 밀양에 있었던 관개용 저수지. 제방의 길이는 728보(步)이고 둘레는 20리가 되며 벽골제·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저수지로 불린다.

위치는 밀양의 속현이었던 수산현으로 현재의 하남읍 수산리·귀명리 지역과 초동면의 검암리·금포리에 걸치고 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고 하였는데 ‘미동’은 우리말로 물동·물둑(제방)을 뜻한다.


〔축조시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벼농사를 위주로 한 이러한 지명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저수지는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측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고적조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에 김방경(金方慶)이 제방을 쌓고 관개를 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전설이 있다.


〔변 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방의 길이가 728보이고 당시에 이미 제방이 무너졌지만 고쳐 쌓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에는 저수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밀주지 密州誌≫·≪밀주구지 密州舊誌≫·≪교남지 嶠南誌≫ 등에서도 “못의 가운데 죽도(竹島)라는 작은 섬과 오산(鰲山)이 있고 못 안에 갖가지 풀이며 연꽃과 세모마름 등이 자생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이 지역사람들이 ‘대섬’과 ‘자라목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남아 있다.

1463년에 제방을 모으고 국둔전(國屯田)으로 만들었다가 200결(結)이나 되는 경작지의 반은 평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하고 나머지 반은 지금은 없어진 봉선사(奉先寺: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뒷산 중턱에 ‘절티골’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었던 큰 절)에 주었다가 성종 때 다시 환속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 황폐하여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수리시설을 하기 전인 1928년까지 주위에서 쉽게 이용될 수 있었던 황토흙으로 된 제방이 수산리 471-4번지에서 양동리 465-2번지에 걸쳐 약 1,040m 정도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저수지는 논으로 변하였다.

  이곳의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龍津江:지역민들은 ‘안강’이라고 부르고 있음)물이 국둔전으로 범람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그리고 양수와 배수를 위하여 수산리 524-1번지 부근 자연암반 밑으로 수문을 내었는데, 그 수문의 흔적이 흙 속에 묻힌 채 지금도 남아 있다.

 국둔전지 안의 저지대에는 주위의 산으로부터 모여든 물이 고여 자연적으로 저수지가 되었고 이 물을 이용하여 제방 안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논밭에 농사를 하였으며 저수지에서는 물고기도 잡고 연근(蓮根) 등을 채취할 수 있었다.

  수산제 주위 양동리·귀명리·동촌마을의 산등성이에서는 지석묘(支石墓)나 석곽고분(石廓古墳)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조개무덤〔貝塚〕이 발견되고 있으며 돌칼〔石劒〕과 4∼7세기경의 유물인 적색연질토기 등 신라시대 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주목되는 곳이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世宗實錄地理志, 東國文獻備考, 密州誌(이익성 소장본), 密州舊誌(유창목 소장본), 嶠南誌(鄭源鎬, 1940), 韓國水田의 起源(李丙燾, 一潮閣, 1956), 朝鮮全圖(朝鮮總督府,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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