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치수사업(2)-전북 정읍의 눌제 유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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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13 08:20 조회1,453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의 치수사업 자료 종합>
*전북 정읍시 고부면의 눌제(訥堤)
1) <새천년을 여는 전북 2000년 봄호>에서 (2002. 11. 27. 주회(안) 제공)
●水利의 고장 - 전라북도 (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
<전 략>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시대에는 개답이 국가적으로 장려됐고 벼농사가 널리 퍼졌다. 가뭄에 대비한 저수지의 개축과 증축등 수리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여러차례에 걸친 전란, 특히 몽고의 침략에 따른 여파로 경지가 피폐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들이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국가적 노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특히 고려 고종22년 (1235년) 몽고군에 밀려 강화도로 천도한 후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구축한 해안 제방에 대한 기록이 <동국문헌비고>에 전해지는 등 제방축조의 토목기술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방조제를 쌓고 논을 개간하는 최초의 간척사업도 고려시대의 기록에 남아 있다.
간척사업은 고려시대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라는 이에 의해 ♠강화도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고려사절요> 그는 강화도 뿐 아니라 ♠정주, ♠밀양 등 전국 곳곳에서 간척사업과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다녀 제방축조 토목기술 전문가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전북 고부의 ♠눌제도 그가 개축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지>에 전해온다. ---世傳高麗時金方慶因舊修築---
<중 략>
이앙법이 실시된 데에는 제언(堤堰, 방죽)과 같은 수리시설의 확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 태종15년(1415년)에 벽골제를 수축했으며 성종7년(1476년)에는 전국 각지에 제언을 만들었다.
<중 략>
<눌제>
<동국여지지> 고부군 산천조에는 ---눌제호는 군의 8리 서쪽에 위치하며 율호(律湖)라고도 한다. 둑의 길이가 1,200보에 이르며 주변이 40리에 이른다. 김제 벽골제 다음으로 큰 호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읍시 고부면 관청리에서 줄포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가 고부 눌제의 옛 둑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해발고도 25m의 구릉을 가로질러서 오늘날의 고부천 상류를 막은 것이다. 눌제 역시 벽골제와 비슷한 시기인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축조연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벽골제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광대 사학과의 나종우 교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고부의 역사적 변천>이라는 논문에서 눌제는 애초 저수지의 제방이 아니라 방조제로서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즉 눌제가 벽골제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대략 3세기 후반까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눌제는 고려시대 ★김방경이 개축했으며 조선초에는 民田으로 용도가 변경됐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부군 고적조(古跡條)에 있다. 세종 즉위 당시만 해도 눌제는 1만여결의 농경지를 몽리구역 내에 두고 있었다. <세종실록, ---古阜訥堤下可耕萬餘結---)
세종대에는 또 눌제의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는데 11,580명의 인력이 동원돼 1월 상순부터 2월 상순까지 근 1개월간의 공사를 통해 제방 3,480척을 정비했다. <세종실록> 그러나 세종2년 8월 눌제는 홍수로 인해 상당부분 훼손되었고 이런 이유로 제언을 다시 수축하고자 하는 의욕도 점차 줄어 마침내 경지로 전환된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실록>에는 당시 전라관찰사가 고부군 일대에 큰 비가 내려 눌제가 훼손되고 제방아래 밭 600여결이 침수됐다는 보고가 기록돼 있다.
<후 략>
2) 야후 코리아, <오마이 뉴스>에서 (2007. 7. 12. 항용(제) 제공)
<현재 남아 있는 눌제의 유적 모습들>
정확한 축조 시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따르면 눌제는 삼한시대, 마한(馬韓)에 축조되어 김제의 벽골제,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제방을 막는 삼호(三湖)로 불렀으며 호남지방이란 지명을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눌제(訥堤)가 있던 곳에는 현재까지도 과거의 그 흔적을 짐작케 하는 고부천(古阜川)이 흐르고 있으며 이 물은 인근의 영원면과 부안의 백산면을 지나 동진강으로 흐른다.
이곳에 호남의 지명을 낳은 눌제유지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에는 "고부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이곳 눌제의 규모는 제장(堤長)이 일천이백보(1보는 약 1.5m)이고 주위는 40리나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눌제가 1420년 세종 원년에 홍수로 유실되어 농지 600결(현재의 30만평)이 침수하는 등 농경지 침수 문제가 거듭되자 이듬해 당시 감찰사가 근본적인 제방 폐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세종은 "8500명만 인원을 투입하면 될텐데 폐제는 당치않다"고 주장, 전 현감인 곽휴를 시켜 다시 눌제 제방을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에도 빈번한 침수피해가 발생해 이곳 주민들의 원성이 잦아 중종 초기에 폐제, 논으로 변했다. 현재 이곳은 광활한 평야지로 변해 정읍의 특산품인 단풍미인 쌀을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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