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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안내 팜플렛 교정용(2P)-충렬공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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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 작성일07-07-15 12:37 조회1,64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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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 

1212년(강종1)∼1300년(충렬33)

 자(字)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한림학사 병부상서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이다. 고려 고종때 16세에 음보로 양온사동정(良醞史同正)에 올라 산원(散員)과 식목녹사(式目錄事)를 지내고, 감찰어사(監察御史),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 견룡행수(牽龍行首), 어사중승(御史中丞),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에 이르렀다.

 1263년(원종3)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1273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판추토사(判追討使)가 되어 진도와 제주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평정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1274년과 1281년 2차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 고려군 도원수(都元帥)로서 출정하였고, 1276년엔 원으로부터 호두금패(虎頭金牌)를 수상하기도 했다.

 1283년에 최고관직인 추충정난정원공신 벽상삼한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 壁上三韓 匡靖大夫 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고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으며, 1295년 첨의령(僉議令)에 가자(加資)되었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으며,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 실봉(實封) 삼백호(三百戶)를 받았다.

 1300년 8월 16일, 89세를 일기로 개성 백목동 앵계리에서 몰(歿)하고 9월 3일 유언에 따라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능골에 안장되었다. 1307년(충렬33)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謀靖難定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 충렬(忠烈)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신도비(神道碑) 건립을 명(命) 받았다.

 특히 치수사업을 크게 벌였는데 평북 정주의 위도와 강화도의 간척사업과 전북 정읍시 고부면의 눌제, 경남 밀양시의 수산제, 충북 제천의 의림지 등에 개축사업이 그 유적으로 남아 있다.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공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한다. 시제(時祭)는 음력 10월 9일이다.

 

 

댓글목록

김보영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보영
작성일

  위에서 부터 차례로 의견을 답니다. 1).한림학사와 병부상서, 2).양온서 동정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3).1276년엔 고려국에서는 유일하게 원으로부터 호두금패를 받았다, 4).1283년에 (최고관직인)을 삭제, 5).(상락공에 봉해졌으며)는 삭제, 6).앵계리 자택에서 운명함에, 7).시호 충렬과 신도비 건립이 하사되었다, 8).공이 생전에 남긴업적은 한두가지가 아니나 그중에서도 특히~~, 이상입니다, 참고하십시요..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신도비 건립을 명받았다==왕명으로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어떨까요?
치수사업은 업적중에서 큰 비중이 아니므로 빼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