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우리가문 11 (영모당 金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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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5-30 16:51 조회1,859회 댓글0건본문
임진왜란과 우리가문 11 (영모당 金質)
익원공파 : 김사형-김승-김종한-김귀덕-김을만-김복중-★김질
<문중자료>
▣ 영모당 김선생 행장
----- 김만길 종친 (2002.5.5 경순대왕 춘향대제 참석시 배부자료)
◈ 영모당 김선생 연혁
1496 (연산2) 1월15일 --- 502년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출생
1523 (중종18) 1월16일 --- 27세때 부친 찬의공 김복중 별세
1528 (중종23) --- 32세때 진사급제 사마벼슬에 오름
1543 (중종38) --- 47세때 모친 광주김씨 별세
1546 (명종1) --- 명나라 황제 명종이 [효자진사김질지려] 현판사액함
1547 (명종2) --- 영모당 생가옆에 개갑장터(현 석교남동입구)를 조정에서 설림함
1555 (명종10) 12월15일 --- 출생지 영모당에서 60세로 별세
1592 (선조25) --- ● 임진왜란에 왜병이 영모당 효자현판을 보고 감히 범하지 못함
1605 (선조38) --- 안찰사 졸당 민성휘가 명나라에 효자로 천거함
1613 (광해5) --- 도암사를 건립하고 독향함
1640 (인조18) --- 도암사를 선비와 유림들이 중건함
1731 (영조7) --- 포암 윤봉조가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지음
1791 (정조15) --- 언어학자 이재 황윤석이 비문을 지음
1847 (현종13) --- 영모당 독향 234년후 증손자인 은송당(=김경철), 현무재(=김익철)를 동서 양벽에 유림들이 추배함
1868 (고종5) --- 흥선대원군의 서원사당 철폐령으로 훼철됨
1882 (고종19) --- 서원철폐령 폐지, 복원 허용됨
1936년 --- 후손들이 도암사를 복원 배향하고 향사함
현재까지 유림 향사하고 있음
1731년에 편찬한 행장은 1998년 4월23일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김만길 찾음
◈ 영모당 효자 진사 김질 약사
공은 성은 김이요, 본관은 安東(=永嘉)이다. 휘는 質이고, 자는 文素이며, 호는 永慕堂이다. 공은 경순왕(김부)에서 계출하고 중시조는 고려국인이다. 시호는 충렬이고, 휘는 方慶이며, 마전 숭의전에 배향되다.
충렬공의 후예에서 분적한 성씨는 ①수안김씨 ②정산김씨 ③사천김씨 ④청주김씨 ⑤영해김씨 ⑥대구김씨이다.
공의 조부인 찬의공 金乙萬께서 고창 入鄕祖(落南祖)인데 한양에서 이곳까지 낙남한 이유는 各設이 있으나, 확실한 考證은 찾을 수가 없다.
공은 1496년 1월 15일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바르게 다스리고 총명하여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부모에 효도하고 매사에 예의가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공은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어머니가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니 어머니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하고 사마벼슬에 올랐으나,
공은 영모당을 따로 지어 부모에 효를 다하기 위하여 과업을 폐하려고 하자 어진 선비들이 만류도 하고 또한 벼슬에 천거도 하였으나 끝까지 조정에 나아가지를 않았다.
공은 어머니가 등창이 발병하자 밤에는 빌고 환부를 잇몸으로 빨아 신통한 효험을 얻고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는 인부를 쓰지 않고 몸소 묘소를 만들었으며 묽은 죽을 먹고 찬 곳에서 거처하고 매일 조석으로 성묘하며 12년간의 시묘살이를 함과 동시에 제수로 쓸 술과 간장은 종노를 시키지 않고 손수 제조하여 봉제하며 부인을 멀리 했다.
공은 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은 후에는 부안군 변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베어 배에 싣고 와서 선산인 제청산 묘소 주변에 손수 치산을 하고 "자손들은 나의 뜻을 따라 함부로 소나무를 베지 않는 것이 옳다" 고 하였다.
하루는 제수에 쓸 간장을 산쥐가 흐려놓아 공은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미물들을 감동시키지 못함은 나의 죄" 라고 통곡하니, 그날 밤 산쥐떼들이 장독 아래에 와서 다 죽었다고 하며,
공은 아버지(=김복중)가 돌아가심에 생전에 즐기시던 꿩을 폭설로 인하여 저자에 가지 못해 꿩을 구하지 못하여 통곡하니 꿩이 스스로 부엌으로 날아들어 제사에 쓰게 되었으며,
한겨울에는 폭설이 내렸으나 묘소 주변에는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않아 향리 주민과 선비들은 이런 기이한 일들은 공의 효감에 감복하여서 라고 하며, 그의 땅을 일러 제청산이라고 하였다.
●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이 연안을 샅샅이 훑어 사당 서원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는데, 왜병이 영모당 효자현판 [효자진사김질지려]을 보고 감히 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 후 략 ---
▣ 김영환 -
▣ 김항용 -
▣ 김태서 -
▣ 김윤만 - 고창문중(익원공파)도 사촌문중(도평의공파)에 이어 참으로 오랫동안 세거하고 있는 고장인 듯 합니다.
▣ 김재익 -
▣ 김재원 -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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