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보광산의 맺힘과 풀림(3)-한양에서 괴산으로, 그리고 명당터를 찾아서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7-07-27 22:42 조회1,643회 댓글0건

본문

3. 한양에서 괴산으로, 그리고 명당터를 찾아서

  당시 35세이신 아드님 승지공(휘 龜萬. 1632년(인조10)∼1699년(숙종25))께서는 생원시에 급제하시고 성균관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계셨다. 부친상을 당하자 승지공은 우마차에 상여를 꾸며 공을 본댁인 괴산까지 운구해야 했다. 때는 여름(양력 7월 중순)으로 무더위와 장마가 계속되는 시기였으리라. 약 5일여를 걸어서 본댁(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하도)에 도착하였고, 집 뒤에 임시로 만든 가묘(假墓)에 공을 매장했다. 이로부터 3개월간 조문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묘소지를 찾아 여러 전문 풍수인들을 각지로 보냈으리라. 이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제일 먼저 길지로 선택된 곳은 현 사리면 사거리에서 방축골 방향으로 약 150m 가다가 길 우측 약 40m 아래에 있는 자리였다. 평지로 아주 명당자리라 했다. 묘역 조성 공사를 시작했다. 땅 속 흙도 좋았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듣고 샘을 내며 이곳을 차지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참판공의 따님이었다. 어느 날 밤, 따님(사위-밀양박씨)은 파놓은 광중(壙中)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해 주고 술에 취해 잠자도록 유도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자 따님은 파 놓은 광중에 물을 부었다. 다음날 아침, 광중에서 물이 난다는 소식에 그 묘소지는 즉시 취소되었다. 그런데 후에 그곳에 묘소를 쓴 따님의 후손들이 발복하여 크게 번창했다 한다.


 (*이상 부친(김태섭) 談. 이 묘는 1986년 4월, 농지정리 사업으로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그런데 족보에는 사위중에 밀양박씨는 없고 판관 칠원인(漆原人) 윤우갑(尹遇甲)과 판관 김우(金雨)만 있다.

 손근성(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거주. 88세. 2007. 4. 25. 채록)님의 증언에 의하면 이 묘는 틀림없는 참판공 따님의 시가인 밀양박씨 묘이며, 매년 그 후손들이 시제를 모신 뒤 모두 보광산에 올라가서 참판공의 묘소에 참배하고 돌아가곤 했다 한다. 이로 보아 족보에는 사위 밀양박씨가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새 묘소지 찾기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천하의 명당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자리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곳은 바로 본댁 뒤의 보광산(531m) 정상에 있는 봉학사 절이었기 때문이다. 참판공이 돌아가신지 3개월이 지나고 있었기에 결심과 결행을 재촉하는 집안사람들과 풍수인들의 간절한 요청은 점점 커져 갔고, 이에 반해 봉학사 스님들과 동네 인근의 불교 신도들은 절대 불가를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승지공께서는 진퇴양란에 서서 무척이나 정신적 고통이 컸을 것이다.

 이 봉학사는 1340년(고려 충혜왕1)에 창건된 사찰로 당시 326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

*봉학사 창건 연대에 대한 2가지 기록

 1)<충북의 문화재>(충청북도청 간. 168p)에서는 봉학사 창건 연대를 봉학사지에서 수습된 기와 파편에 ‘至元 庚辰’이란 기록을 근거로 1340년으로 보고 있다.

 2)<단국대학교 박물관 고적 조사 보고 제 1책>(단국대핿ﵐ 출판부. 1967년)?는 봉학사 탑인 오층석탑의 사리공에서 수습된 금동 소상과 묵서지(1967. 6. 2. 오층석탑  2층 옥개석의 원형 사리공 속에서 禹英奎(사리면 거주)씨가 발견한 것. 크기:가로-22.7cm, 세로-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록번호-신1819번)에 "--支那六月 二十二日---大施主 孝宗妻子奇德”이란 기록이 있는데, 이 효종은 중국 송나라때의 임금이기에 탑의 건립연대는 효종의 재위 기간인 1163년(고려 의종 17)--1189년(고려 명종 19)이 된다.

bokwangsan001-1.jpg

bokwangsan00002-1.jpg

 <보광산 지도와 위성사진>(상단의 흰부분은 묘소, 하단의 네모진 부분은 보광사)

 

kimso32.jpg

             <오층석탑>  


bokwang07.jpg

bokwang11.jpg

                              <묵서지와  금동 소상>(金銅小像)

---------------

 수려한 절경을 앞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이 봉학사는 보광산 주변의 주민들이 주된 신도들이었으며, 그들의 유일한 정신적 안식처이기도 했다. 널찍한 공간에 천혜의 오목한 절터는 사방의 바람을 전혀 받지 않는 아늑함이 있었다. 절 앞엔 오층석탑도 있었고 그 옆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샘물도 있었으며, 대웅전에는 석조 여래좌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절이었다.

kimso52.jpg

 

 <석조여래 본존불상>               

bokwangsan002-1.jpg

<봉학사 샘물>(1987년 촬영)


 승지공은 절 폐사(廢寺)를 위한 나름대로의 정당성(正當性)을 가져야 했다. 당시의 국가 통치이념은 숭유배불(崇儒排佛)이었다. 조선초부터 시작하여 성종 이후 더욱 강화된 불교 탄압은 중종때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명종때는 한때 승 보우(甫雨)가 등장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했고, 문정대비(文定大妃. 중종의 비. 명종때 수렴청정) 또한 이에 깊이 빠져 보우에게 큰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그러자 고려말 신돈의 횡포에 놀란 바 있던 조정 중신들은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참판공의 종조부(從祖父)인 구암공(龜巖公-휘 忠甲)은 이 요승(妖僧) 보우를 주살(誅殺)하라는 강력한 상소를 올린 바 있었다. 결국 보우는 처형(1565년. 명종20)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수 천 개의 말사(末寺)들이 계속해서 폐사되어 갔다. 이처럼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집안의 중심 정서(情緖)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 거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봉학사의 강제 폐사는 당시의 국가정책과 시대적 분위기 등으로 볼 때 크게 거리낌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결국 승지공께서는 오랜 고민 끝에 다소의 무리를 감내(堪耐)하면서 집안 노비들에게 폐사를 명(命)했을 것이다.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위세는 궁벽한 시골 괴산 사리에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드디어 절은 무너져 불태워졌고 본존불상(本尊佛像)은 목과 팔이 잘려 절터 근처에 묻혔으며 5층석탑도 쓰러졌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승려와 신도들도 있었을 것이나 이들은 사대부가(士大夫家)의 강권에 힘없이 제압당했고, 묘역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됐을 것이다.


kimso38.jpg

       <참판공(휘 素) 묘소>               

kimso45.jpg

        <묘역 전체>

 그런데 바로 이 일은 후에 전설로 재창조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게 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같은 전설은 우리 후손들에게 대(代)를 이어가며 안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적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제 그 전설을 당시 선조님들의 실제 삶과 결부하여 재구성해 보려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