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안사연여름캠프(진주, 통영) 미리보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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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7-27 19:01 조회1,779회 댓글1건본문
경상남도 남서부에 있는 시. 관광·교육 도시이며, 농산물 집산지이기도 하다. 명승지로 촉석루, 진양 성지(晉陽城址), 의랑암(義娘巖), 서장대(西將臺) 등이 있다. 가야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983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 되었으며1949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어 시장(市長)을 두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712.68㎢.
1. 진주성
진주성은 삼국시대 거열성(居列城), 고려시대 촉석성(矗石城)으로 불렀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주성으로 개칭되었다. 석축 된 성의 둘레가 약 1,700m(4,359척), 높이는 약 5m(15척)이며, 성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3개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선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河崙)(1347-1416)의 성문기(城門記)에 보면 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석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성의 둘레는 800보이고, 성의 높이는 세길을 넘으며 의정문(서쪽), 지제문(북쪽), 예화문(남쪽)이 있고, 성 밖은 서쪽으로 청천(靑川)이 남쪽에는 긴 강(남강)이 흘렀으며, 북쪽에는 못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팠다고 했다. 이처럼 고려 말에 왜구방어의 보루로 고쳐 쌓은 이 성은 1591년(선조24) 7월, 경상감사 김수(1537~1615)가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제1차 진주성싸움을 드는 것은 3800여명의 군사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 성을 지킴으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는 민.관.군 7만여명이 왜군 12만여명을 맞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하였고, 이 때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기도 하다. 성내는 촉석루, 김시민 전성각적비, 의기사, 서장대, 북장대, 창열사,국립진주박물관, 호국사,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2. 역대 진주목사를 역임하신 선조님
김 흔(金 忻) 1274년(원종15) 24세 진주목사(晉州牧使)
김명리(金明理) 1390년~1400년 (추정) 진주판관(晉州判官)
김제갑(金悌甲) 1579년(선조12) 55세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 1591년(선조24) 37세 진주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 1592년(선조25) 38세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제정(金濟鼎) 1624년(인조2) 진주방어사(晉州防禦使)
김 소(金 素) 1648년(인조26) 45세 진주목사(晉州牧使)
◆ 김 흔(金 忻) 1251(고종 38)∼1309(충선왕 1).
고려시대의 무신. 충렬공(휘 方慶)의 차자이다. 음서(蔭敍)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22세) 1272년(원종 13) 방경을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대장군이 된 뒤, 곧 사재경(司宰卿)에 올랐다.
(24세) 1274년 일본원정 때는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가하였고, 진주목사를 지냈다.
(27세) 1277년 북쪽 변방이 소란해지자 출정하였고, 이듬해 방경이 무고를 입어 대청도(大靑島)로 유배될 때 백령도에 유배되었으나, 충렬왕의 변호로 풀려났다.
(29세) 1279년(충렬왕 5) 대방공 징(帶方公○)이 원나라에 갈 때 원부(元傅)의 아들 정(貞) 등 의관(衣官)자제 25인과 함께 뚤루게(禿魯花)로 다녀왔으며,
(32세) 1282년에도 상장군(上將軍)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 있을 때 고려사람 유주(庾○)가 원나라의 황제에게 고려에 이롭지 못한 일을 건의하자, “너는 금필(黔弼)·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그런데 본국을 그와같이 파괴하려 하느냐.”고 비난하였다.
(36세) 1286년 지신사(知申事)로서 삼사사(三司事)가 되었고, 이듬해 동판밀직사사(同判密直司事)가 되었다.
(39세) 1289년 만호(萬戶)로서 조정군(助征軍)을 이끌어 요양행성(遼陽行省)에 갔으며, 동계(東界) 방수군(防戍軍)을 조사하고 합단(合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40세) 1290년 합단이 쳐들어오자 이를 연기(燕岐)부근에서 격파하고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하여,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원나라로부터 궁시(弓矢)·안(鞍)·옥대(玉帶) 등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승려 일영(日英)이 한희유(韓希愈)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므로 인후(印侯)와 함께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으나, 마침 원나라에 갔던 충렬왕이 무고임을 밝혀 한희유가 무사히 귀국하여 중용되자 귀국하지 않았다. 한희유가 죽자 연경에서 7년 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삼중대광(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三重大匡)이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이르기를, “대덕(大德) 3년(1299)에 본국의 무뢰한 무리가 장차 난을 꾀하고자 하거늘, 흔이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먼저 알고 난을 진정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상(賞)하여 특히 서용(敍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에 습봉(襲封)되었다.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인자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文秀鎭〉
◆ 김명리(金明理) 1361(공민왕10)∼1438(세종20)
문온공(휘 九容)의 아들이다. 15세에 진사급제하고, 부친(척약재 휘 구용)께서 명나라에 행례사(行禮使)로 갔다가 귀양길에 돌아가시자 슬픈 상중에서도 생원과에 급제함. 그 후 낭장, 중랑장. 사헌부 감찰, 호조좌랑, 사헌부 지평,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 진양대도호부 판관, 옥주군사. 경창부 소윤. 성천도호부사 등을 거침. 만년에 경기도 광주의 탄곡리에 퇴거하여 사셨다. 지난 1989년 경, 공의 묘를 경기도 광주읍 목리에서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의 선친 묘역으로 이장할 때, 분묘 속에서 분청상감으로된 원통형의 묘지(아래 사진)가 발견되었는데, 음각으로 묘지 내용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제작연대는 1439년(正統四年이라 새겨짐. 세종 21년)이며, 제작기법이나 상감기법, 제작연대, 글씨나 형태, 온전한 보존 상태 등으로 보아 우리나라 도자기사에 중요한 사료로 보인다. 국가 문화재 또는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귀중한 우리 문중의 유물이다.
◆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문신. 의사(義士). 字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제학공(휘 익달) 후손으로 영상공 휘 석(錫)의 아들. 이황 (李滉)의 문인으로서 1553년(명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3년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가 되고, 3년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73년(선조6) 정언 (正言),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 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을 만나 왜장(倭將)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주민들을 이끌고 원주의 요새인 영원산성(鴒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전주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68세).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그 후 다시 1670년(현종11). 2. 7일에 원충갑, 김제갑, 원호의 원주 사우에 충렬이란 편액이 사액되었으며, 1711년(숙종37년)에 문숙(文肅)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재추증 되었다. 원주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는데 1866년(고종3)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그 사액인 <충렬사>현판은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구 사우에 보관하고 있다.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구 사우,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괴산 능촌리의 제각에 제향(祭享) 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 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묘소는 1988. 10. 5. 괴산읍 능촌리로 이안하였다.
◆ 김제정(金濟鼎)1578(선조11) ~ 1627(인조5)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첨중(僉中)또는 태중(泰仲)이다. 효자 김익정의 현손인 김사철(金師哲)의 손자로 1578년(선조 12) 전의면 양곡리에서 태어났다.
1605년(선조 38)에 무과에 급제하여 금부(禁府) 직에 있다가, 1624년(인조 2) 진주방어사(晉州防禦使)를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가 싸워보지도 않고 적에게 투항하자 인산방어사(燐山防禦使)로서 의주부윤 이완(李莞)과 힘을 합쳐 적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적의 세력에 눌려 이완이 전사하였고, 김제정 또한 적의 화살이 쉴새 없이 날아오는 적진에서 무수히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비변사의 요청으로 병조참의에 증직하였고, 이와 함께 그의 처자에 대하여도 깊은 애도를 표하고 제사에 쓰일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 후 영조 때 ‘같은 정묘호란 때의 충신인 남이흥(南以興)과 이완이 정려를 받은 것과는 다르게 김제정 만이 누락되어 한탄스럽다’는 김제정의 7세손인 김노찬(金魯粲) 등의 상언과 우승지 조영진(趙英鎭)의 상소에 의하여 1774년(영조 50)에 치제문을 내리고, 제전(祭田)을 내려 영묘(靈廟)와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또한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몸을 바쳐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을 ‘충(忠)’이라 하고, 절의를 세우고 이롭게 죽은 것을 ‘장(壯)’이라 하였다.
현재 정려는 퇴락하여 허물어지고 명정현판만이 후손인 김수회(金壽會)의 집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후손들이 전의면 달전리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연기군지, 연기인물지, 연기지역의 충열공 후예들, 연기군 충효열유적, 전의향토지)
◆ 김 소(金 素) 1602(선조35)∼1666(현종7)
字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 제학공(휘 益達)의 후손.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했다. 양덕공(諱 時說)의 장자. 1630년(인조8.29세) 진사급제. 무사참봉(巫仕參奉-종9품), 의금부 금오랑(金吾郞), 호조좌랑(戶曹左郞-정6품)이 되었다..
1635년(인조13,34세) 알성문과 급제. 이듬해 정랑(정5품)이 됨. 그 해(1636년,35세) 후금(청나라)의 전란이 예상되매 공은 문무의 재주를 겸비한 자로서 선발되어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637(인조15.36세) 병자호란에 패하여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자 공은 세자와 대군을 청나라까지 모시고 가기도 하였다. 군자감정(軍資監正-정3품), 강릉부사(江陵府使),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종2품), 종성부사(鍾城府使), 함경남도병사(부친 노환으로 사양)를 거쳐 1644년(인조22)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성절사(聖節使-중국에 새해 인사로 가던 사신)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길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에게 들려 공금을 아껴 남은 돈으로 세자의 귀국을 위한 말 준비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한다. 경주부윤(慶州府尹-종2품. 부친 노환으로 사양),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 잠깐 있다가 부친 노환으로 사양),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정3품),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1648년(인조 26,47세)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종2품)가 되었다.
그 후 영흥부사(永興府使), 승지(承旨), 형조참의,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광주목사(光州牧使), 장단부사(長湍府使), 판결사(判決使), 양주목사(陽州牧使)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현종 7)에 몰. 수(壽) 65세.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 頂 계좌(癸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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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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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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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여름캠프 자료준비및 해설을 담당하신 태영강사님 감사하고, 수고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