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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산의 맺힘과 풀림(4)-보광산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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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28 23:13 조회1,5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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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광산 전설 

 승지공(휘 龜萬)께서는 부친이신 참판공(휘 素)께서 돌아가시자 장례를 마친 후 본댁인 이곳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1668년) 다시 상경하였다. 그리고 생원으로서 성균관 학업을 마치고 8년 뒤인 1677년(숙종3.46세)에 강서현령(江西縣令)의 관직을 받으셨다. 그리고 이듬해인 1678년(숙종4. 47세)에 문과 시험에 병과(丙科) 제 11인으로 영광스럽게 합격함으로써 서울과 임지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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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과 합격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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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사 유서>


 그런데 참판공 장례 후 약 10여 년이 지난 1676년 경 어느날, 승지공의 집(서울 또는 괴산)에 한 승려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보광산의 참판공 묘소를 언급하며,

『현 참판공의 묘자리는 풍수지리상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좋지 않으니 속히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에 큰 불행이 닥칩니다』

 라고 말하였다. 선조님들은 놀라 그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승려는 다름 아닌 참판공 묘소 조성 당시 봉학사에 있던 중이었다. 그는 그동안 강원도에서 풍수지리를 익히고 나서 절을 없앤 참판공댁에 복수하고자 절치부심(切齒腐心)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자였다. 보광산 절터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명당터로서 지세로 보아 발복(發福)을 하면 집안 가문의 번창과 위세가 10대도 넘게 크게 일어날 것 같았다. 이에 그는 이 복을 끊어내고자 계략을 꾸몄던 것이다. 그 중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묘역 서쪽의 터진 곳을 막으시오. 그 이유는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데 옆이 터져 있으면 바람이 들어와 알이 부화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터진 부분을 막아 공기를 차단함으로써 포란 중에 있는 알을 곯게 하려는 의도였으니 곧 후손을 끊게 하려는 숨은 계략이었다. 보광산 정상의 묘역은 원래부터 동북쪽으로 높은 언덕이 자연적으로 둘러 쳐져 있어 묘소를 아늑하게 잘 감싸고 있었으며, 서쪽부분만 약간 낮은 언덕이 숨통처럼 열려 있을 뿐이었다)

 『둘째, 보광산 맞은편 남쪽 산(솔티대) 골짜기의 물줄기를 묘에서 보이지  않도록 땅속으로 묻으시오. 그 이유는 포란 중에 있는 금계가 앞산 물줄기에서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어 편안하게 알을 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포란 중에 있는 금계가 모이와 물을 먹어야 힘을 내어 계속해서 알을 품을 수가 있는데, 골짜기의 물을 막아 먹이를 없앰으로써 배를 곯게 하고 알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니, 곧 후손들이 끊어지게 하거나 가난하게 하려는 속임수였다.)

 라고 하였다. 이에 참판공의 아들(승지공 휘 구만-45세)과 손자들(남정-25세,  남채-14세, 남택-12세, 남식-5세)은 그 승려의 말을 의심 없이 믿고 묘소 주변을 흙으로 높이 쌓고 앞산의 수로를 고치는 대공사를 벌였다. 지금도 묘의 서쪽 터진 곳을 메운 복토지와 뒤쪽의 언덕은 돌이 하나도 없는 고운 흙으로 쌓여 있으며, 보광산 앞 산 골짜기는 요즘도 비가 오면 땅 속으로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등은 이 전설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때 이 묘역 공사를 위해서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비용이 소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중은 이와 같이 묘소지를 고치게 하여 후손들을 극도로 가난하게 하고 후손도 끊어지게 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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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의 전설내용 참고 자료 종합>

 1. <傳說誌>(충청북도청 刊. 1982년. 438-439p)

    *보광사와 김참판묘-제공자 : 사리면 수암리 최한균(오래전 작고)

 2. <충청북도지>(충청북도청 刊. 1992. 12. 2080p).

     *상기 <전설지>와 동일한 자료명만 열거.

 3. <槐山說話集>(괴산 문화원 刊. 1999년. 207-216p)

     *중이 복수한 보광산 명당-제공자 : 사리면 방축리 김용태(당시 46세)

 4. <괴산의 명산 35>(괴산군청 간. 2005. 12. 148-151p)

     *등산 코스 소개와 함께 봉학사 폐사 관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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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이르러서는 위에 소개한 것보다 더욱 악의적(惡意的)이고 가공(架空)한 전설이 만들어졌다. <묘자리를 알아본 석공>이란 전설인데 이는 그 동안의 구전설화에는 없던 것으로 다음과 같다.


 『보광산에 가면 김감사(金監司) 모이가 있단 말이야. 거기 있던 절을 헐구 모이를 썼다는 얘기는 유명하니 다 알거고. 그 모이 앞에 가면 감사 모이니까 문관석(文官石)이 있고, 상석(床石)이 있다구. 그런데 상석이 조고만 해. 그래 그 때, 김감사 모이를 쓸 때 그 아들이 보니 너무 작아. 그래서 석공(石工) 보고

 “이놈아, 상석이 너무 작다.”

  그런 거야. 그랬더니 석공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상석은 점점 커집니다.”

  그래. 그 아들이 아무 말 안했어. 상석이 커진다는데 할 말이 없지. 그런 줄 알었지. 그런데 그게 다 뜻이 있는 말이었어. 상석이 커진다는 말은 그 돌이 커진다는 말이 아니여. 돌이 커질 리가 있어? 돌이 커지는 걸 봤어? 깨지고 달아서 줄으면 줄었지 늘어나는 법은 없거든. 안 그려? 상석에다 제물을 하나만 놔 봐! 상석이 크지? 상석에다가 제물을 가뜩 놔 봐! 상석이 적지? 그러니까 상석이 점점 커진다는 건 제물이 점점 줄어들어 제물 놀 자리가 남는다, 이 말을 커진다고 한거여. 이제 알겠지? 커진다는 말을? 그 석공이 벌써 안겨. 김감사 집이 앞으로 기울어서 이 상석에 차릴 제물이 점점 줄어든다는 걸. 앞으로 이 상석에 제물을 다 차리지 못할 만큼 집안이 기울텐데 뭔 잔소리냐? 이 말을 뒤집어서 ‘상석이 점점 커집니다’ 한거지. 오래된 석공들은 모이를 많이 봐서 그런지 웬만한 풍수보다 아는 게 많어.』

 *출전 : <槐山說話集>(괴산 문화원. 1999년 간. 207-216p)

   --묘자리를 알아 본 석공(제공자-사리면 이곡리 장기동. 69세)


 밑도 끝도 없이 추상적이고 설득력도 없으며 그저 폄하하려는 의도만 다분하게 들어있는 유희적 전설이다. 참판공 묘소의 상석은 가로 153cm, 세로 90cm, 높이 30cm로 매우 큰 것이다. 그리고 넓적한 사각형의 고석(鼓石, 높이 27cm)이 받치고 있고 혼유석(104×58×14cm), 향로석(지름 50, 높이 44cm)도 갖추고 있어 일반적인 당시의 다른 상석들과 비교해 볼 때 결코 손색이 없다. 결국 이 전설은 허랑한 거짓 의도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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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석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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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석 후면>


 그 외에 이 보광산과 관련한 기타 구전담과 설화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색시묘 구전담이다. 감사공 후손의 한 따님이 돌아가자 산소의 우측 아래에 모셨다고 하는데 그 묘소는 아직 미확인 상태다. 

  (1)손석복(사리면 사담리 하도 거주. 80세.) 談. 1987년 필자 채록.

  (2)손성근(사리면 사담리 하도 거주. 88세) 談. 2007. 4. 24. 필자 채록 : 색시묘는 산에 오르면서 오층석탑 옆에 있다고 함)


 둘째, 보광산은 참판공(휘 素)의 사패지지(賜牌之地:나라에서 내려 준 땅)라는 구전담인데, 손석복씨는 자신이 14세때(1911년 경) 김중서(참판공 후손-미상)라는 사람이『이 보광산은 사패지지이다. 함부로 나무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다. 그 후 이 산은 일제때 국유림이 됐는데 절터에서부터 색시묘 사이는 일제때 불하지에서 제외됐다고 한다.(손석복 談. 전과 동)


 셋째, 보광산의 오층석탑과 관련한 전설이다. 이 탑은 원래 세워져 있던 것인데 1909년 경 괴산군 소수면 소바우 사람들이 탑 속에 혹시 보물이 들어 있지 않을까 하여 탑을 넘어뜨린 다음 탑 밑을 팠다고 한다. 이 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손석복 談. 전과 동)


 넷째, 사초관련 전설이다. 정확한 시기는 미상(1666년. 1699년, 1827년 추정)이나 참판공 또는 승지공을 포함한 양위분 묘소를 사초할 때의 전설로 다음과 같다.

 1) 사담리에서 약 50리 떨어진 증평의 <조풍>이란 곳에서 떼(금잔디)를 떠 왔다. 이를 보광산의 묘소로 올릴 때는 기와받이(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물건을 옮기는 방법)로 옮겼다.

 2) 잔디를 나르는 일꾼들의 상투에는 종이 팔랑개비를 달게 하고, 이 팔랑개비가 돌지 않으면 관원들이 재촉하여 작업을 서두르게 하였다 한다. (이상 부친 김태섭 談. 1980년 필자 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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