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산의 맺힘과 풀림(5)-역사와 전설, 그리고 사실과 허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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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29 18:17 조회1,491회 댓글0건본문
5. 역사와 전설, 그리고 사실과 허구
참판공의 묘역 조성 후 놀랍게도 우리 가문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실현(實現)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설이야기처럼 극도로 빈한(貧寒)하고 후손(後孫) 귀(貴)한 집안으로 변해 갔다. 그 실례를 우선 참판공 종가 중심으로 살펴 본 다음 범위를 넓혀 참판공 현손대(玄孫代)까지의 전 후손들을 살펴 보겠다.
그 첫 번째 사건은 부호군(휘 南挺, 참판공의 孫)의 배위이신 정부인 광주이씨할머니의 요절(夭折)이다. 참판공 몰 후 23년 만에, 중의 권유로 행한 묘역 대공사 후 약 13년만에 부호군께서는 배위(정부인 광주이씨)를 38세(1689년, 광주이씨-35세)에 잃고 만년(80세)까지 독신으로 사셔야 하는 불운을 맞으셨다(당시 부호군의 부친인 승지공께선 경기우방어사에 재직 중). 이때 공은 배위를 괴산군 청천면 아래지경 뒷산 마루(아래 지경에서 청안면 운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위)에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10년 뒤(1699년. 48세)에는 부친이신 승지공께서 돌아가셨고, 또 5년 뒤(1704. 53세)에는 독자인 휘 필광(必光)공이 31세에 요절(夭折)하는 비통(悲痛)한 사건들이 연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부호군은 보광산의 두 분 묘소에 문관석과 망주석을 세우셨다. 부호군은 딸도 없이 두 아들인 휘 필광(必光)공과 휘 필면(必免)공을 두고 계셨는데 차자(次子) 휘 필면공은 어려서 졸(卒)하고, 장자 휘 필광공마저도 안타깝게 자신을 앞세우고 만 것이다. 아! 웬일일까?

<승지공 묘소>

<휘 필광 묘소>
승지공은 4남(南挺, 南採, 南澤, 南拭) 4녀(全州人 李震白, 全州人 李玄祚, 安東人 權世泰, 晉州人 柳益章)를 두셨는데 부호군(휘 남정)은 장남이셨다. 아내를 잃고 난 뒤 2년 후에 진사시에 합격(40세. 1691년)하여 성균관에서 학업도 하셨다. 그러나 문과시험은 포기해야 했다. 1694년의 갑술환국 이후 노론(老論)은 정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우리 남인은 재기 불능의 처지가 되었으며, 만약 문과에 합격하여 정계에 진출하기만 하면 모함을 받아 죽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 당시의 험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조선조의 붕당정치와 우리 집안 선조님들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조선의 붕당정치(朋黨政治)는 도학(道學)을 가장 이상적(理想的) 철학으로 내세웠던 일종의 재야 정치집단인 사림파(士林派-조선초부터 권세를 누리던 훈구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파)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졌는데, 1575년(선조8) 김효원(동인)과 심의겸(서인)사이에 벌어진 이조(吏曹) 전랑(銓郞-이조 정랑)직에 대한 쟁탈전으로부터 촉발되었다. 동인측에서는 허엽이, 서인측에서는 박순이 그 영수였는데 이 당시 당파의 세력은 동인이 서인보다 다소 우세한 상태였다. 그리고 동인은 임란(1592년) 직전에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졌다.
이 당시 우리는 사림파 집안으로서 조선조 중종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장하고 개혁을 부르짖다가 젊은 나이에 처형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문하(門下)에 속해 있었다. 더욱이 영상공(휘 錫. 1495(연산1)∼1534(중종29))은 성균관 진사시절 조정암을 따라 도학정치를 내세우며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 14))가 일어나 조정암과 그 추종자들이 사사되거나 유배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영상공은 서울 주자동(현 서울시 중구 퇴계로 2가, 남산골 일대)에서 급히 외가(의성김씨)댁인 충북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현 문법2리 631번지)로 몸을 피해 은둔하게 되었다.
<영상공 집터> (2005. 7. 27. 필자 조사. 현 지덕규씨 거주)
그 후 붕당정치가 시작되던 선조때의 우리 집안은 주기론(主氣論-唯物論)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는 달리 주리론(主理論-名分論)을 기본으로 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중심의 동인(東人) 계열에 속해 있었다. 당시 영상공의 아드님들인 세칭 오갑조의 다섯분들은 모두 문과, 또는 진사에 급제하고 고위 관직을 지내고 있었는데 다 같이 동인에 속해 있었다. 첫째인 구암공(휘 忠甲, 문과, 안악군수, 좌찬성 추증)은 퇴계와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아우인 만헌공(휘 孝甲)은 문과 급제(1553년) 후 아산 현감을 역임하였고, 참봉공(휘 友甲)은 진사에 합격하고 음보로 올라 공릉참봉(恭陵參奉)을 역임하고 불사(不仕)하였으며, 문숙공(휘 悌甲)은 퇴계의 제자로서 도산서원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임란시에는 원주목사로서 장렬하게 순절하신 분이시다. 계씨(季氏)이신 비안공(휘 仁甲)은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비안현감을 지냈다. 또한 구암공의 장자인 부평공(휘 時晦)은 문과 급제(1567년) 후 부평부사를 지냈으며, 문숙공의 장자인 애헌공(휘 時獻)은 문과(1588년)에 장원급제 후 예조참판과 도승지를 지냈다. 즉 붕당시작(1575년) 이후 임진왜란 종전(終戰) 직후(1599년)까지 우리 집안은 약 24년간 우세당인 동인과 남인에 속해 있으면서 다소 유리한 위치에서 비교적 영화로운 문운(門運)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들(영수-남이공)은 남인들(영수-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和議)를 주장했던 것을 문제 삼아 공격함으로써 남인은 1차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 북인은 곧 선조(宣祖)의 후사(後嗣)문제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광해군의 즉위(1608년)와 함께 이를 지지하던 대북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소북파는 일소(一掃)되었고 영창대군과 외척인 김제남 일족도 처형되어 대북파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명청(明淸)에 대한 실리(實利) 외교라는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영창대군의 살해, 인목대비에 대한 가혹한 횡포, 대북인들에 대한 편애와 서인(西人)들에 대한 질시, 이이첨의 횡포 등에 불만을 품은 서인들은 드디어 인조반정(1623년)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임란 후 인조반정까지:1599-1623) 남인인 우리 집안은 북인들에 의한 열세 속(약 24년간)에서도 문숙공(휘 悌甲)께서 임란때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아들(時伯), 부인과 함께 장렬한 전사를 하였고, 구암공(휘 忠甲)의 차자(次子)인 충무공(휘 時敏)께서 진주대첩을 이루고 전사함에 따라 임란공신 후손 및 근친들에게 베풀었던 조정의 후덕(厚德)한 혜택을 톡톡히 받았다. 즉 이 시기 충무공(휘 時敏)의 자(子)인 남봉공(휘 緻)은 문과에 급제(1597년)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있었고, 부평공(휘 時晦)의 3子인 한림공(휘 絅)은 문과에 급제(1615)하고 한림(翰林)이 되었다.
비안공(휘 仁甲) 후손인 우리 집안에서는 장자 좌랑공(휘 時訓 : 1566-1629)께서 사헌부 감찰과 형조좌랑을 역임하셨고 서울 주자동의 어수정(御水井)이 있으며 세조때 권신 권람이 살던 집에서 살 수 있었으며, 그 아우이신 양덕공(휘 時說)께서는 52세인 1620년에 무과 급제하고 선공감역(繕工監役)을 거쳐 양덕현감을 지내셨다. 이는 광해군때 임란공신의 후손들과 근친들에게 베풀었던 큰 배려였다고 본다. 그리고 계씨(季氏)인 충익공(휘 時讓)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를 거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라도 도사시절 향시(鄕試)문제로 광해군때의 권신이며 대북파의 영수인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12년간 종성과 영해에서 유배살이를 해야 했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풀려남으로써 복권되기도 했다.
이외에 이 시기 관직에서 활동했던 영상공(휘 석) 이하 주요 선조님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데 많은 분들이 음보(蔭補)로 출사(出仕)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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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생원공(휘 時覺) : 忠甲 2子. 생원,
2.감정공(휘 時愼) : 忠甲 4子. 임진란 참전, 선무공훈. 증 군자감정
3.교관공(휘 時進) : 忠甲 5子. 선무랑
4.충숙공(휘 時若) : 忠甲 6子. 음보, 의주부윤, 창성부사,
5.판관공(휘 時亮) : 友甲 1子. 음보, 군자감 판관.
6.첨정공(휘 時尙) : 友甲 2子. 호종공신, 훈련첨정
7.참의공(휘 時伯) : 悌甲 2子. 임란전사. 증호조참의
8.훈도공(휘 時俊) : 悌甲 3子. 간성 훈도
9.직장공(휘 時傑) : 悌甲 4子. 군자감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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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1623년)을 일으킨 서인은 대북파인 이이첨, 정인홍 등 수십명을 처형하고 수백명을 유배시킨 뒤 48년간 동인과 남인, 북인들에게 눌려 지내왔던 약세당으로부터 벗어나 드디어 제 1당이 되었다. 이때 남인은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서인(西人)에 이은 제2의 세력당이 되었다. 이런 서인과 남인의 공존 분위기는 갑술환국이 일어나는 숙종 20년(1694년)까지 약 70년간 다소의 세력 변화를 거치며 지속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들은 김자점(안동김씨, 익원공 후손)을 중심으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하는 원당(原黨)으로 나뉘었다. 그러는 사이 효종은 자신의 보위를 온전히 하기 위한 계략의 하나로 산림출신(山林出身-과거에 의하지 않고 정계에 진출한 사림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였는데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서인 중에서도 산당(山黨)이라 불렀다. 이들 송시열 등의 산당은 1651년(효종2) 낙당과 원당을 모두 부패한 당으로 보고 같은 서인파인 낙당의 김자점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원당까지 무너뜨리며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여 현종때까지 오래도록 권세를 누렸다.
또한 현종이 즉위하면서 현종의 조대비(인조의 비)가 죽자(1659년, 현종원년) 기해복제(己亥服制)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때 서인(영수-송시열)은 기년설(1주년설)을, 남인(영수-허목)은 3년설(2주기설)을 주장했는데, 결국 서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자 서인의 권세는 계속되었다.
그 후 1674년(현종15), 다시 현종의 대비인 인선왕후(효종의 비)가 죽자 이번에는 남인(영수-윤휴)의 기년설(1주년설)이 서인(영수-송시열)의 대공설(9개월설)을 누르고 채택되자 반대로 남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실로 1599년 이후 60년 만에 얻은 득세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잡은 남인의 권력은 불과 6년만인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다시 서인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짤막한 집권의 기쁨이었다.
이때 서인은 노론(송시열 중심)과 소론(윤증 중심)으로 나뉘어졌고, 1689년(숙종 15) 장희빈의 등장과 함께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고, 남인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사사(賜死)시켰다. 이때 남인도 청남(淸南-송시열의 극형 주장파)과 탁남(濁南-온건파)으로 나뉘어 졌다. 그러나 5년 후인 1694년(숙종 20년)에 일어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남인은 쫓겨나고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남인은 안타깝게도 이제 완전 재기불능의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이 시기, 즉 인조반정(1623) 이후 갑술환국(1694)까지 우리 집안은 계속 남인에 속해 있었는데, 71년 중 2회에 걸친 약 11년 동안만(*1차 6년:1674년-1680년, 2차 5년:1689년-1694년) 우위에 있었을 뿐 나머지 60년간은 계속 서인과 노론에게 눌려 지내야 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좌랑공(휘 時訓-병조좌랑), 양덕공(휘 時說-무과, 양덕현감), 남봉공(휘 緻-문과, 경상도관찰사), 하담공(휘 時讓-문과, 병조판서, 4도체찰사, 도원수, 판중추부사), 참판공(휘 素-문과, 형조참의, 승지, 충청도관찰사), 사휴제공(휘 徽-문과, 이조정랑, 경상 황해관찰사, 이조판서), 안주공(휘 繁-무과, 안주판관), 백곡공(휘 得臣-문과, 병조좌랑, 동지중추부사, 시인), 승지공(휘 龜萬-문과, 정언, 장단부사, 좌승지) 등이 당시 조정의 중신(重臣)들로서 폭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특히 참판공(휘 素)은 낙서공(휘 自點)이 실권하던 때(1649년)에 충청도관찰사에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복직되어 영흥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되는 서인의 득세와 기해복제 사건(1659년)으로 더욱 강성해진 서인으로 말미암아 18년간이나 3품의 벼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운을 맞이했다.
하담공의 2자인 사휴제공(휘 徽)은 이런 서인 중심의 상황 속에서도 비교적 순탄했다. 정언, 부수찬, 이조정랑, 경상 ․ 황해 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2차 복제문제(1674년)로 남인이 실권을 쥐게 되는 때인 1675년(69세, 숙종1)에는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 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승지공(휘 구만)은 2차 복제문제(1674년) 이후 남인 우세 시기인 1678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정언 등을 역임하고, 경신환국(1680년) 후에는 노론 득세 속에서 어렵게 지내다가 장희빈의 등장과 송시열의 사사(賜死)가 일어나는 기사환국(1689년)을 맞아 장단부사(정3품)가 되었고, 갑술환국(1694년)이 일어나는 해에 좌승지 올랐으나 본격적인 노론 집권 시기 속에서 몰년(1699년)까지 힘겨운 승정원 승지 관직을 수행해야 했다.
상기 이외에 당시에 출사(出仕)한 영상공(휘 錫) 이하 인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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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禾公(휘 緯) : 忠甲-時晦의 1子. 음보, 송화현감
*通津公(휘 級) : 忠甲-時晦의 2子. 진사. 통진현감
*宣傳公(휘 綽) : 忠甲-時愼의 2子. 무과. 선전관
*侍正公(휘 絪) : 忠甲-時進의 1子. 內侍敎官
*判官公(휘 系) : 友甲-時亮의 1子. 무과. 북청판관
*參判公(휘 紀) : 友甲-時亮의 3子. 무과, 첨사, 증병조참판
*生員公(휘 紳) : 友甲-時亮의 5子. 생원,
*縣監公(휘 細) : 友甲-時亮의 6子. 생원, 인제현감
*宣傳官(휘 緖) : 友甲-時亮의 7子. 무과. 선전관
*判官公(휘 大乾) : 友甲-時尙의 1子. 판관
*判官公(휘 大坤) : 友甲-時尙의 2子. 판관
*縣令公(휘 糸+喜) : 悌甲-시백의 1子. 진사. 영유현령
*陜川公(휘 縠) : 仁甲-時讓의 1子. 음보, 합천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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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붕당정치에서 우리 안동김씨의 모든 종친들이 한 당파에 속해 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대체로 당시의 파당은 지역을 중심으로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인은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와 충청북도 지역에, 서인들은 이이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 충남, 전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도 지역 또는 학문 전수 관계 등으로 분당(分黨)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안동김문 15개 파 중 대부분은 동인과 남인에 속했고, 익원공파 중 일부 분들은 서인이셨던 것 같다. 인조때 영의정을 지냈던 낙서공(휘 자점)은 우리 안동김씨인 익원공파 후손이면서도 서인의 영수였던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예이다.
또한 모든 것이 철저한 소속 당의 당론과 틀 속에서 상대당과 대립돼 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즉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당대의 시인으로 유명한 구암공(휘 충갑)의 증손인 백곡공(휘 득신)과 많은 글을 주고받을 만큼 교분이 있기도 했으며, 하담공(휘 시양)의 2자로 이조판서를 역임한 사휴제공(휘 휘)은 남인이면서도 1666년 남인의 탄핵으로 삭직(削職) 당했다가 복직되기도 했던 것 등이 그것이다.
이 갑술환국(1694년) 이후 양덕공 이하 우리 집안은 불행하게도 문과 2명(변광, 항광), 무과 4명(의만, 덕연, 덕후, 노범), 진사 2명(남정, 문규)의 급제자만 배출하고 마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사에 급제한 후 문과 시험을 거쳐 관직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마신 불행한 부호군께서(휘 남정)는 궁벽한 시골 괴산에서 오직 43세에 얻은 하나뿐인 아비 없는 불쌍한 손자(東虎-1694년생. 10세에 부친 잃음)와 함께 부인도 없이 고독하게 사셔야 했다.
최근 부친의 조사(2007. 2.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송성익씨의 談)에 의하면 부호군께선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 사시다가 청안면 운곡리(안동김씨 안렴사공파 한주공(漢柱公) 후손들의 거주지)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타계하신 후 묘소를 운곡리에서 청천면 지경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경리 묘소에는 배위이신 정부인 광주이씨 할머니가 함께 합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2006. 10. 20. 이장시 확인) 아마도 부호군께서는 정부인이 돌아가시던 해 이전부터(부호군 38세, 1689년) 청안면 운곡리에 사셨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사리면 사담리에서 좌구산 옆 질마재를 넘어 30리 이상 떨어져 있으며, 안렴사공파 후손들 몇 가구만이 살고 있는 운곡리로 이사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혹시 보광산 묘소 조성 이후 봉학사 폐사에 따른 동네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부호군 이장 전 묘소:청천면 지경리>

<이장 후 묘소 : 청안면 문당리>
<묘비>

<진사급제 백패>
그 후 이어지는 가계(家系) 역사는 더욱 놀랍게 진행되었다. 아래와 같이 참판공으로부터 11대 후손에 이르기까지의 자손은 극히 귀해 진다. 참판공의 증손자 대(代)에서부터 4대는 딸도 없이 독자로 연이어 오다가 2대를 건넌 뒤에는 후손을 잇지 못해 3대는 양자를 들여야 했다. 참으로 보기 드문 손(孫) 귀한 종가였다. 또한 3대(회건, 유화, 대년)는 연이은 상처(喪妻)로 인해 배위를 2분씩 두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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