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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산의 맺힘과 풀림(7)-역사와 전설, 그리고 사실과 허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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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8-01 09:57 조회1,6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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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자석>                                              <망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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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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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석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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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석 후면>


 승지공 묘소에도 묘비가 없다. 그리고 묘비문도 전하지 않는다. 상석의 전면에는 <건좌손향(乾坐巽向)>이란 방위만 기록돼 있을 뿐이고, 후면엔 참판공 상석처럼 뒷면엔 이름자 표기조차 없다. 이는 아드님이신 부호군(휘 남정)께서 의도적으로 새기지 않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당시 子인 부호군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신 학자요 선비셨다. 때문에 사대부(士大夫)가요 양반가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부친의 묘비문을 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 점이 매우 궁금하다. 아마 이것도 참판공의 경우와 같이 새 형상의 지형이기에 묘비 건립을 피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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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지공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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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지공 상석>


 보광산엔 그래도 묘비는 없으나 웅장한 묘역 규모와 당시의 격식에 맞는 여러 석물들이 잘 조성되어 있어 위엄이 있다. 그러나 부호군(휘 南挺)부터 10대손(휘 相國)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8대의 전 묘소에는 묘비는 고사하고 상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안타까운 모습이다. 부호군의 묘소는 손(孫)이신 학생공(휘 東虎. 당시 38세)께서 조성하였을 것이다. 현재 세워져 있는 부호군의 신묘비와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새터의 5기 표석은 본 종가에서 1989년에 세운 것들이다. 이상으로 볼 때 우리 집안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부호군 몰년 이후인 1730년 이후부터 급격한 경제적 몰락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혹시 참판공 묘역 조성과 관련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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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천면 지경리의 이장 전 묘소>                                                  <부호군 신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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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호군 신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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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면 새터의 휘 필광공 묘소와 표석>


 또한 당시 가정 경제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통문>(通文)이란 문서가 있다. 7대손 휘 유화(由和)공께서 1827년 보광산의 참판공과 승지공의 묘역을 사초하기 위하여 돌린 것인데, 여기서 휘 유화공께서는 종가집의 가난을 애통해 하며 다음과 같이 종친들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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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문>(가로-50Cm×세로-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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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

 右文을 돌립니다. 

  조상 선대를 추모하는 것은 天賦의 양심이며, 분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人道의 常事라 함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요, 또한 사람들이 모두 행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저의 종가에 이르러서는 홀로 그렇지 못하니 어찌 개탄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저의 監司公[휘 素] 承旨公[휘 龜萬] 양대 산소의 위토(位土)가 창설 초기에는 있었으나 풍요로움과 검소함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살다가 그 후 종가는 세세로 가난하고 또한 그 삶이 항상스럽지 못하여 영구히 준행(遵行)할 수 없는 지경을 만나게 됐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막중한 묘소에 대해 마침내 향불을 마련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즉 이미 지나간 일은 먼저의 하늘 운에 붙이지만 요즘에는 禁伐하는 명령이나 주장하는 사람도 없으니, 멀고 가까운 초동과 牧夫들이 마치 주인 없는 빈산으로 보며 왕래하는 행인들은 손가락질 아니 함이 없습니다.

  한탄스럽습니다. 옛날을 거슬러 보고 지금을 살펴보니 슬픈 눈물이 옷깃 적심을 알지 못하는 지경입니다. 무릇 자손된 자들은 생각건대 이런 생각을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지난 10여 년 전에 族人 한 소년이 거리낌 없이 애쓰고 고생하며 먼 길을 걷고 물을 건너다니면서 글을 손수 전하여 묘역을 守護하는 계획을 소상히 알렸습니다. 대개 그 본심은 선조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또한 본토의 여러 친족들과 더불어 의견을 물었고 그 뜻을 하나로 모두 수렴하였습니다. 이제 그 전의 경황이 없던 때의 일이 지금에 와서야 가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살고 있는 5-6家는 비록 심히 가난하지만 이번 일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거절함이 없이 능력에 따라 분배하여 간신히 4냥씩을 준비하여 그 자본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량을 합한다 해도 풍족하지 못하므로 옛 고장 각 처의 자손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 해마다 조금씩 노력한다면 운영하려는 일은 머지않아 가히 이룰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 마음은 기쁘고 행복하여 그 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오면서 소문에 들으니 2-3명의 자손이 그 돈을 사사로운 개인 재산으로 만들어 삼켜 버린  뒤에는 다시 그 비용을 내놓을 뜻이 없다고 하니, 그런 마음의 소재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겉으로는 선조의 이름을 거짓으로 빌리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살찌우게 하는 계획에만 힘을 다하며, 선영의 묘에 풀이 무성하게 나 있는 것을 거만하게 보면서도 부끄러운 생각으로 살펴볼 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우리 종가에 이처럼 無禮한 사람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그 나머지 모든 親族들은 老少 할 것 없이 손을 소매에 넣고 입을 다물고는 마침내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게으르기가 가히 후풍(순후한 풍속)에 가까우니 이런 도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맡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포기하도록 일을 되돌리는 것이며, 도리어 이것은 친족을 박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시면 당장 굽어 꾸짖음을 가해 주시고 그 불가한 사유를 밝혀 주실 것이며, 만약 옳다고 여기시면 마땅히 당장 그것을 구별해 내어 추궁하고 조사할 것이며, 宗中의 몇 사람에게 각자 정한 한도를 담당시키어 선영의 땅을 길이 수호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위와 같이 삼가 槐山, 淸州, 淸安, 忠州의 各 宅에 通文합니다.

收錢有司   鎰

           由和[1775(영조51)--1835(헌종1)]

정해(丁亥:1827. 순조 27. 필자 53세). 3월 15일

族末(먼 일가). 도(燾), 렴(濂+아래에 불화 점 네개), 烋, 聲義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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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되는 집안의 전답(田畓)과 토지도 극히 적었다. 겨우 식생활을 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부 유전(遺傳)되던 적은 토지들마저도 10대손(휘 相國), 11대손(휘 重應)께서 괴산군 소수면 입암리(원장골)에 사실 때 2회(1926년과 1928년)에 걸친 수해로 생존을 위해 1930년 모두 매각해 버리고 411년의 역사를 간직한 괴산을 떠나 인접 지역인 충북 음성으로 이사해야만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범위를 넓혀 우리 종가댁 외의 후손상황을 보자. 참판공의 아들인 승지공(휘 구만)께서는 4자를 두셨다. 장자인 부호군(휘 南挺)은 상기와 같이 손(孫) 귀(貴)한 가문으로 이어졌고, 2자인 통덕랑공(휘 남채)과 그 아우 집안(휘 남택, 휘 남식)은 종손가와는 달리 경북 성주, 거창, 충주, 제천 등지로 이사하여 살면서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였다. 

 2007년 현재 참판공 후손 약 310가구 가운데 285가구인 92%가 승지공의 2자인 통덕랑공(휘 남채)의 후손인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통덕랑공(휘 남채)의 1子인 휘 정광(鼎光)공의 후손들(178가구-58%)은 휘 동직(東稷)공의 子 휘 병(炳)공이 어려서 경북 성주군 수륜면으로 옮겨 가 살면서 현재 55가구(18%)가 번성해 있고, 차자 휘 동길(東吉)공은 2가구, 3자 휘 동윤(東尹)공의 후손(휘 燻 후손)들은 경북 성주군 성주읍 학산리와 거창으로 이사가 살면서 121가구(39%)로 번성하여 가장 많은 후손 분포를 보인다.

 2子인 휘 진광(晉光)공의 후손들도 충주 등지에 살면서 현재 107가구(34.5%)로 번성했고, 3子인 교리공(휘 恒光)은 문과(1773년)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손자 대(代)에서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다.   

 승지공의 3자인 휘 남택(南澤)공은 현손(玄孫) 대(代)에 이르러 무사(無嗣)했다.

 승지공의 4자인 휘 남식(南拭)공은 현재 4가구의 후손이 이어지고 있는데 子인 참의공(휘 忭光)은 문과(1723년, 40세)에 합격하고 이조 참의를 지냈다. 그 후손들은 현재 충남 당진, 서산 등지에 살고 있다고 하나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상기 교리공(校理公-휘 항광), 참의공(參議公-휘 변광) 두 분은 우리 안동김씨 제학공파의 마지막 문과 급제자에 속한다. 즉 참의공은 1723년에, 교리공은 1773년에 급제하였는데, 제학공파 마지막 급제자인 휘 명저(參奉公 휘 友甲-1자時亮-1자紀-1자鼎臣-2자允熙-1자海徵-明著. 1786년 급제, 자 晦叔, 肅廟 戊戌生, 正廟 丙午 文科, 江原都事, 同中樞府事 丁巳歿. 壽80) 바로 직전에 합격한 것이다. 참의공은 호서(湖西) 육군자(六君子)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며 청백리에 천거되기도 하는 등 영광이 있었으며, 교리공은 문과(1773년, 57세)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를 지내신 바도 있는데, 부친 대(代)에서 끊어졌던 문과 합격이란 가문(家門)의 영광을 이었던 분들이시다. 그런데 신라시대부터 왕족이거나 명문 사대부(士大夫)가였던 우리 안동김씨 전체의 문운(文運)은 이때(170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크게 가라앉기 시작하였으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일이며, 그 이후 우리 참판공가에도 문무과(文武科) 뿐만 아니라 생진사과(生進士科)에 오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20여 년 전(1985년), 필자는 이런 보광산 전설과 우리 집안의 실제 형편 등을 살펴보고 부친께 현재의 변형돼 있는 보광산 묘역을 최초 상태로 복원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이때 부친께서는 “풍수에 의한 묘자리의 길흉은 10대를 지나면 모두 소멸된다고 한다. 이제 참판공으로부터 내가 12대손이 되니 묘소와 관련한 모든 길흉은 이제 소멸된 것이다.”라고 하시며 진행을 중지시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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