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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릉과 사대부 묘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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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8-05 14:31 조회1,756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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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왕릉과 일반 사대부묘의 차이점에 대해서

*출전 : 네이버 지식

 

 

조선시대의 묘 제도는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지요.

 

<경국대전>에는 왕릉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일반 사대부의 묘제도 품계에 따라  묘역의 넓이는 어느 정도까지 쓸수 있는지,

또 석물의 크기와 종류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아주 자세해서 품계에 따른 석물의 크기는 몇치 몇푼이라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센티미터까지 규정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봉분 바로 앞에 놓이는 석상과 석인(돌사람)을 예를 들어보면,

*대군 -  석상 : 길이 7척 너비 4척, 석인: 높이6척

*2품이상 -  석상: 길이 6자5치 너비 3자7치5푼, 석인: 높이 5자 5치

*6품이상  - 석상: 길이 6척, 너비 3자5치, 석인: 높이5척

*7품이하 및 생원, 진사, 음직으로 벼슬한 자의 자제 -

 석상: 길이 5자5치 너비 3척,  석인: 4자5치

 

이런 식입니다.

 

조선의 묘제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상, 장례에 관련 되어 있었으므로 그 규정이 몹시 까다로왔다고 하겠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왕릉의 제도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왕릉 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드리지요.

baechi.jpg
 
일단 용어에 대해 알아보면...
*능상은 무덤의 중요 부속물들이 있는 "언덕"을 말합니다. 그림에서는 마치 봉분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 석마에서부터 그 위쪽의 모든 부분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곡장은 굽은 담이란 뜻입니다. 능의 경계를 나타내주는 것이지요. 이 곡장은 대부분의 사대부 묘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석양, 석호: 이 역시 사대부의 묘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조선 전기에 사대부 묘에서 석양과 석호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 영, 정조 대 이후에는 문인석을 쓰는 대신에 이 석양이나 석호를 쓰는 경우가 빈번해 집니다.
 
*난간석: 봉분 주위를 난간처럼 두르고 있는...돌난간입니다.
 
*병풍석: 봉분을 떠받치고 있는 보호석입니다, 봉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아 놓았지요.
 
*상석 혹은 석상이라고도 합니다. 제사음식을 진열해 놓는 곳입니다.
 
*장명등: 불을 밝히는 등입니다만 실제로는 불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상징적인 의미이지요.
 
*망주석: 기둥 모양의 돌입니다.
 
*문인석: 문관복장의 돌사람, 무인석: 무관복장의 돌사람.
 
왕릉의 경우 대분분 이와 같은 석물을 썼습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또 왕권의 강약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대부 묘를 알아보지요.
 
왕릉과 비교하여 사대부 묘에는, 곡장과 난간석, 병풍석, 석호, 석양, 석마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 무인석도 문인석이든지, 무인석이든지 한쌍만 세울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 외 석상, 망주석, 장명등, 신도비(비석의 종류 중 가장 큰 비석입니다.)는 사대부 묘에서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대부의 묘는 왕릉과 달리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석물들이 크게 달라집니다. 왕릉은 전통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시대가 변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사대부의 묘는 시대에 따라, 가문의 경제력에 따라, 그 크기와  세우는 석물의 수가 달라지는 등, 변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시대에 따라, "품계에 따라" 달라지는 사대부 묘의 석물들에 관해 알아보면...
 
*장명등은 1품이상의 관리에게 세워주던 석물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잘 쓰이지 않게 되지요.
 
*신도비는 비석의 종류 중 가장 큰 것으로 2품 이상의 관리에게 세워주던 것입니다. 왕릉에서는 문종 대 이전까지는 세웠으나, 문종 대 이후, 왕실의 사적은 실록에 모두 기록되므로 신도비가 필요 없다고 하여 사라졌었습니다. 그러다가, 영조 대에 와서 다시 건립하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사대부 묘에서는 조선 초부터 말까지 지속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석양, 석호, 석마는 일반 사대부 묘에서는 쓸 수 없었지만, 위에서 말씀드렸듯, 조선후기 들어 문인석을 세우는 대신, 이러한 석물들을 세우는 경우가 빈번해집니다. 여담이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전해져오는 얘기가 있지요. 영조 대의 어느 문신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더랍니다. 그 아버지 왈 "네가 받치는 제사 음식을 저 못된 문인석이 모두 먹어버린다. 너는 어서 저 문인석을 넘어뜨려라" 했다는 거죠.
그 이후부터 문인석은 제사음식을 가로채는 못된 영물로 인식되어 영조대 이후부터는 문인석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향로석, 동자석은 오히려 왕릉에는 없는, 사대부 묘에만 세웠졌던 석물입니다. 이는 향로석과 동자석이 16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석물이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 봉분 앞에 세우는 작은 묘표(비석)도 왕릉에는 없는 것이네요. 묘표는 본래 누구의 무덤인지는 나타내려고 세우는 것인데,
왕릉에서는 필요 없겠지요.
 
*그 외, 상석, 망주석은 어느 누구나 세울 수 있었던 석물입니다.
 
위와 같이 사대부 묘는 왕릉에 비해 묘 제도가 자유로왔던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돈 많은 중인이나 평민들이 사대부 무덤을 능가하는 묘를 만들어 물의를 빚기도 했지요

댓글목록

김행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행순
작성일

  7월에 갔던 헌인릉, 선정릉을 되새겨 보면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잘 보았습니다.  동구릉 광릉. 사릉............답사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