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산의 맺힘과 풀림(14)-부록(기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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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8-08 08:07 조회1,426회 댓글0건본문
2) 기타 자료
가) <괴산군 홈페이지>(2005년 이후) 기록 내용<문화유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봉학사지 오층석탑
* 명칭 : 봉학사지 5층석탑
*구분 : 도지정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지정일 : 1976년 12월 21일
*주소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봉학사지 5층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탑이다. 4매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세워진 석탑은 초층 탑신(塔身)만이 2매의 돌로 되어 있고, 각층의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기단(基壇)부는 없어지고, 넓직한 지대석 위에 기단갑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얹고 탑신을 쌓았다. 각층 탑신의 면석에는 아무런 수식이 없고, 모퉁이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上輪部)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이 남아있고, 옥개석에는 5단받침과 2단의 탑신괴임을 조각하였다.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약하여 고려초기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현재 사담리 보광사(普光寺) 뒷편 옛 절터에 있는데, 1966년 이 석탑의 2층 옥개석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청동합(靑銅盒)에 들어있던 청동불상에서 ‘鳳鶴山 鳳鶴寺’라 쓰여진 시주문(施主文)이 발견되었다.
(2)봉학사지석조여래좌상
*명칭 : 봉학사지석조여래좌상
*구분: 도지정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지정일: 1976년 12월 21일
*주소: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은 불신(佛身)만 남아있던 것을 불두(佛頭)를 찾고, 왼팔목 등을 보수한 것으로 보수부위를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으로 통식(通式)을 따르고 있으나,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항마좌는 그 예가 드문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의 높이는 95cm이다. 불두(佛頭)는 나발(螺髮)의 머리에 높은 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을 약간 숙이고 있는 상호(相好)는 원만하다. 굴곡이 배제된 네모진 상체에 띠주름같은 삼도(三道)표현, 평면적이고 네모진 형태, 둔감한 옷주름선 등에서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세부수법을 통해 보면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산 폐사지에 있던 것을 아래쪽에 새로 지은 보광사(普光寺) 대웅전(大雄殿)에 봉안하여 1935년부터 주존불(主尊佛)로 모시고 있다.
나) <괴산지구 고적조사 보고서>(단국대학교 박물관 고적 조사 보고 제 1 책. 단국대학교 출판부. 1967년) 자료 요약
(1) 보광산을 최초로 밝힌 문헌 : <東國輿地勝覽> (卷之十四. 槐山郡 山川 條)에 “普光山 在 郡南二十六里 山頂有小井”이라 최초 기록
(2) <普光寺> 소개
(가)<東國輿地勝覽> (卷之 十四. 槐山郡 佛守條)에 “普光寺 舊在普光山” 이라 하여 조선 중엽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寺址만 남음.
(나)해발 325m
(다)남아 있는 사지 모습 : 산정 가까이 석축이 3단 마련되어 있음
(3) <現 普光寺>
(가)위치 : 산정(山頂)에서 약 100m 아래
(나)건립연대 : 1941년 1월 5일.
(다)근거 : 대웅전 내에 보관중인 <大雄殿 建築時 施主 名單>에 “단기 4274년 1월 5일”이라 기록 되어 있음.
(4) 기타 유물
(가)五層石塔
(1)건립 연대 : 고려 초기로 추정
근거 : 1967년 발견된 2층 옥개석의 원형 사리공의 묵서 기록 : “支那 六月二十二日......大施主 孝宗妻子奇德” 이란 기록으로 보아 효종은 중 국 송나라 때 왕으로서 건립연대는 효종의 재위기간인 1163년(고려 의종 17)--1189(고려 명종19) 사이로 본다.
(2)높이 : 약 5m
(3)그간의 사정 :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것을 화전민 禹英奎씨가 1967 년 임의로 탑을 세우다가 단국대 조사단의 제지로 중단된 후 지방 문화재로 등록 되면서 다시 세워짐.
(나)石佛坐像 : 현 보광사 내에 주존불로 보관중임. 본래 옛절(구 보광사) 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며 산정 뒤 산기슭에 굴러 떨어져 매몰된 것을 1972년 경 사찰에서 발굴, 수습하여 경내 露天에 이안했다가 현재 수리하여(전면에 백분을 입히고 채색함) 현 보광사에 봉안함,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됨.
(다)石燈臺石 : 봉학사에 있던 것으로 등대석을 답치는 초석으로 보인다. 현재 보광사에 보관중이다.
(라)礎石 : 우영규씨가 석탑에서 남쪽 20m 되는 곳에서 우물을 파다가 다른 많은 잡석과 함께 발굴, 圓座의 株礎石, 方形 화강석재. 현재 오층석탑과 참판공 묘소 사이에 있다. (둘레 84--62.5cm. 높이:22cm. 원좌 바깥 지름:46cm. 안지름:35.5cm)
(마)塼(벽돌) : 회청색의 벽돌. 거의 방형에 가깝다. 상기 우물을 파다가 발견된 것으로 법당에 깔려 있던 것으로 추정됨.
*주변길이 : 24×20.5cm. 두께 : 5.5cm
(바)碾臼(맷돌 절구) : 현 보광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 중앙의 臼孔(절구 구멍)은 후대의 가공으로 판단. 제작 연대 미상이나 봉학사에 있던 것으로 추정. 현 보광사에 보관중임.
*긴 쪽 지름 : 140cm, 좁은 쪽 지름 : 115cm
다) 오층석탑 옆의 샘물에 대하여(손석복 談. 1987년 김항용 채록)
오층석탑 좌측에 있는 이 샘물은 옛날에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풀리는 깊은 샘이었는데 절을 헐 때 메웠다 함. 아무리 가물어도 이곳은 마르지 않는다고 함. 지금도 보광사에서는 이 물을 호스로 연결하여 쓰고 있음
라) 참판공 생가에 대하여
(1)손석복 談.(1987년 김항용 채록) :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2구(荷島) 105 번지의 현 정원사(태고종. 고진수 주지승) 앞 밭 자리.
(2)송만영(사담 2구 389번지 거주. 79세. 1987년 김항용 채록.) 談 : 이 집 터 자리는 “참깨 천석을 하는 터”였다고 함. 정원사는 1977년 경 건립 됨.
마) 사담리(하도) 마을비 소개 (2003. 9. 김항용 현지 답사)
<마을 입구>

<마을비 내부>
(1) 건립일시 : 1993. 11.
(2) 장소 : 사리면 사담리 하도 마을 중앙. 마을회관 옆.
(3) 비문내용
마을 이름을 하도(荷島)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의 형상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연꽃 하(荷)자와 섬 도(島)자를 인용하여 이름을 정하였다. 마을 앞은 옛날 한양(漢陽)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국사당(國士堂-‘士’는 ‘祠’의 誤記)이 있었고 큰 시장이 열리던 매우 번창한 곳이었다.
옛부터 학문을 숭상하여 마을에서 담을 세우고 배움에 힘써온 바 조선 현종조에 비인(庇仁)현감 손우(孫愚)공, 흥해군수 손지(孫志)공, 제주목사 손유(孫愈)공, 충청도 관찰사 김소(金素)공 등을 배출하였다.
갈잎을 뜯어다 종이 대용으로 글씨를 쓰며 글을 익혔다고 하니 그 당시의 향학열을 가히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후에도 향학의 뜻은 이어져 일제치하에서도 우종국(禹鍾國)공 등이 주축이 되어 마을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써왔다. 지금 우리 마을 출신 인사들이 경향각지 각 분야 요소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것도 이렇듯 끊이지 아니한 향학열로 후진을 양성한 것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인들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더욱 복된 마을을 만들어 가자는 다짐으로 이 비를 세운다.
1993년 11월 일. 하도마을 주민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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