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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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5-31 09:27 조회1,567회 댓글0건본문
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02
金得臣의 생애 -01
---林東喆 (충북대 교수)
01세 (1604)
---10월 18일에 출생
10세 (1613)
---부친(=김치)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함
21세 (1624)
---동래부의 원으로 있는 부친을 가서 만남
---어릴 적에 부친과 같이 청당현(=현재의 괴산군)에 살았음
22세 (1625)
---부친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 얼마후 복주(=현재의 안동)에서 객사하여 청당현 栗峽(율협=현재의 증평읍 율리) 으로 운구해 옴
24세 (1627)
---외숙 목서흠으로부터 文辭의 시험을 통해 비로소 詩才를 인정받음
26세 (1629)
---8월 금강산에서 서울로 향함
27세 (1630)
---경오 山寺와 괴산 일대를 다니며 문장 수업에 매진함
31세 (1634)
---이때부터 36년동안 36편의 古文 讀破를 반복하고는 67세(1670)때에 [讀數記](독수기)를 지음
32세 (1635)
---9월 하순에는 한양 종남산(=현재의 남산) 아래 京第(경제)에 있었음
33세 (1636)
---영남 善州(=현재의 ?)로 피난감
34세 (1637)
---영남에서 木州 栢谷,野+土(백곡?)로 돌아왔다가 관동(銀石사찰에 머무름)으로 유람감
?세
---점차로 詩名을 얻게 되면서 당대의 한문 대가인 택당 이식(1584-1647)에게 인정을 받음
39세 (1642)
---京山에서 사마회시를 치르기 위해 봄에 京師에 이름. 진사시 합격으로 나타남
▣01세 (1604)
---10월 18일에 출생
●백곡집 취묵당기에는 백곡의 부친이 墳墓를 위해서 신축년(1601)부터 4년간 괴산군 능촌리 방아재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백곡이 취묵당기를 지으면서 이 일을 서두에 언급한 것은 아마도 괴산지역과 인연맺은 맨처음 때임을 말하고자 한 듯하다.
●김석(1495-1534)은 김득신의 4대조이다. 김석은 조선 중종조에 진사에 급제하고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도학이 높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은사인 조정암이 화를 당하자 외가인 의성김씨들이 많이 살고있는 괴산 전법리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김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묘소는 괴산읍 능촌리 방아재에 있으며 그의 아들 김제갑이 쓴 墓碣이 있다.
●또한 김석의 아들 충갑(1515-1575)은 1546년(명종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헌납, 북평사, 안악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을사사화때 서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고, 서청주(=현재의 병천)에 유배되어 백전리의 이성춘의 女를 취하여 이 마을에 살았다. 그의 묘소는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에 있었으나 괴산읍 능촌리로 천봉하였다.
●김득신은 취묵당을 건립하면서 청당태수(=현재의 괴산군수)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며, 김치의 형이며, 증평(당시 청안현 삼성당)에 살던 金級으로부터 글을 배웠다고 한다. 김급은 통진현감을 지냈고 묘소는 증평읍 미암리에 있다.
●김득신의 출생지는 증평이나 또는 괴산 방아현일 가능성이 높다.
▣ 김영환 - 밤 늦게까지 이렇게 ..... 고맙습니다.
▣ 김재원 - 주회조카님! 오늘 숙직하십니까? 이밤늦은 시간에...?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저는 백곡할아버지의 출생지를 방아재(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추정합니다. 일명 방아재는 이곳에 옛날에는 연자방아가 있어 불렸던 이름. 능촌은 백곡의 고조부이신 휘 김석의 묘가 있어 붙여진 이름.
▣ 김주회 - 어제 저녁에 술한잔 하고 사무실에서 좀 쉬다가 게시판에 올리고 퇴근하였습니다. 바로 답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김태서 - 글 잘읽었습니다.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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