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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보각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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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7-08-10 21:15 조회1,5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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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3월 15일 (화요일) 11 : 34  문화일보
인각사 보각국사비 복원 노력 ‘결실’
(::中서 비문 필사본 새 자료 찾아…판독 안됐던 陰記(비 뒷면
기록) 90%이상 되살려::)

그동안 비가 훼손된 데다 내용을 담은 탁본마저 완전한 게 전하
지 않았던 보물 제428호 ‘인각사(麟角寺) 보각국사비(普覺國師
碑)’의 뒷면 음기(陰記)가 비문복원에 한평생을 바친 연구자들
의 노력과 새로운 비문 필사본 자료의 공개로 최근 90% 이상 복
원됐다.


이번 복원은 문화재청과 경북 군위군이 내년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 탄생 800주년을 맞아 인각사 경내에 추
진하고 있는 ‘인각사 보각국사비 재현사업’을 위해 진행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실장 박상국)의 기초연구에 이
어 지난해 9월부터 군위군의 용역을 의뢰받아 비문복원 연구를
수행해온 한국불교연구원(원장 정병조)은 비 앞면 양기(陽記) 35
행 2295자와 음기 35행 1670자 등 재현될 비에 담길 총 3965자에
달하는 문안을 최근 확정했다. 책임연구원인 김상현(한국불교연
구원 부원장) 동국대 교수와 서지학자 박영돈씨를 비롯, 채상식(
부산대) 정병삼(숙명여대) 김상영(중앙승가대) 교수 등 11명이
이번 연구에 참여했다. 문도가 소속된 절이름(사명·寺名) 43개를
포함해 164명의 이름이 나오고 ‘문하시중판한림원사(門下侍中
判翰林院事) 이장용(李藏用)’ 등과 같은 당대의 권세가들 39명
이 단월(檀越·비 건립을 시주하고 평소 교류했던 재가신도)로
기록돼 있는 음기에 대해, 정 교수는 “일연선사의 영향력과 생
전에 교유했던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
다.

◈인각사 보각국사비의 조성과 현재 상태〓인각사는 일연이 만년
에 머물며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했던 곳이자 입적한 사
찰로 사리탑과 함께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가 제자인 청분(淸)
등에 의해 1295년(충렬왕 21)에 세워졌다. 당시 문장가인 민지(
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양기는 물론, 일연의 제자가 비의
건립내력과 문도들의 이름을 기록한 음기 모두 중국의 서성(書聖
)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해 만들어진 것이 특징.
그러나 비가 ‘왕희지 집자비’ 중에서도 수작으로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수많은 탁본이 제작되면서 비가 훼손돼 현재 극히 일부
의 비편만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양기 227자와 음기 142자 등
원 비문의 10% 정도만 판독 가능한 실정이다.

◈보각국사비 탁본첩과 그동안 연구성과〓비는 대부분 파손됐지
만 탁본이 20여종 전하고 있어 비문의 복원작업은 다각도로 진행
돼왔다. 이중 양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에 전체내용이 수록된 게 전하고 있어 어려움이 없었으나 음기가
문제였다. 1979년 채상식 교수의 음기 탁본소개와 연구를 시작
으로, 박영돈씨(86년)와 김상현 교수(91년) 등이 각각 기존 탁본을
검토해 음기 복원을 시도했으며 정병삼 교수는 95년 새로운 자
료인 간송문고 소장본을 공개했다. 각각 12종씩 24종의 탁본을
집성한 2권의 탁본집도 1992년과 99년 중앙승가대에서 출간됐다.
그러나 음기의 경우 아직 전체 내용을 전하는 게 없고 탁본을
보관하기 편한 첩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순서가 뒤죽박죽 교란된 게
많아 연구자들은 마치 조각의 상당 부분이 망실된 퍼즐게임을
하듯 이리저리 꿰맞추며 고심해왔다.


◈새로운 자료의 공개와 비문 복원〓내년 재현될 비문 문안 확정
작업은 지난 20여년간 보각국사비 복원에 매달려온 박영돈씨가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 재현해 놓은 ‘박영돈집자본’을 텍스트로
삼아 기존 탁본자료와 한자 한자씩 비교, 토의해나가는 방식으
로 진행됐다. 대체로 양호한 양기의 경우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이지관 전 동국대 총장 소장본과의 비교를 통해 수정해 나갔다. 비
의 건립내력과 문도, 단월 등 3부분으로 구성된 음기는 보다 다
양한 탁본자료들과 비교하는 한편, 문도와 단월의 기재 현황을
살피기 위해 현존하는 다른 고려비문들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음기복원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 자료가 공개됐다. 채상식
교수가 중국 상하이(上海)도서관에 보관돼온 보각국사비문 중 양
기 3편과 음기 8편 등 총 11편의 비문내용이 모양과 함께 판독,
필사돼 실려 있는 4쪽짜리 자료를 복사해와 제공한 것이다. 이는
1831년 청나라의 고증학자 유연정(劉燕庭)이 편찬한 ‘해동금석
원(海東金石苑)’의 저본으로 사용된 자료로 음기의 배열을 추?
ㅗ構?164명에 달하는 문도의 명단을 확인하는 데 획기적인 공헌
을 했다. ‘해동금석원’은 김정희와 조인영 등이 중국에 사신으
로 갔을 때 청나라 학자들에게 조선 금석문 탁본을 선물한 것이
계기가 돼 편찬된 것이나 정작 보각국사비 탁본은 간행된 책에는
실리지 못했다. 이를 통해, 지난 79년 채상식 교수가 처음으로
비 음기 855자를 재구성한 이후 26년만에 음기를 적은 날짜(일
부·日附) 11자와 비의 건립내력을 적은 기문(記文) 832자, 문도
464자, 단월 363자 등 총 1670자로 구성된 음기가 복원됐다. 10
여차례나 글자의 수정 보완을 거듭한 이번 작업에 대해, 채 교수
와 정 교수 모두 “음기의 90% 이상이 복원됐음을 자신한다”고
말했다. 문도 직명 중 탁본에는 나오지만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중대(重大)’ ‘대사(大師)’ ‘가계(加
階)’ ‘계중(階重)’ 등은 이번 복원본에서 제외됐으며 글자를
수정 보완하느라 ‘박영돈집자본’은 모두 11차례나 수정, 제작
됐다.


◈앞으로의 과제〓문화재청과 군위군은 내년 보각국사비 재현을
위해 3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비문의 100% 완벽한 복원이 불가
능하기 때문에 재현이라 이름붙였다. 귀부(龜趺·거북모양의 비
석 받침돌)는 화강암으로, 비신(97×187㎝)은 최상의 오석(烏石)
으로 제작될 보각국사비 재현의 최대 과제는 한 글자당 가로 세
로 1.8㎝ 크기의 왕희지 글씨를 제대로 새길 수 있는 각수(刻手)
를 확보하는 문제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2001년 11월 30일  연합뉴스
<신발견 「보한집」(補閑集) 발문(跋文) 전문>

풍아(風雅)가 이미 변하여 당송(唐宋)에 이르러 시인들이 증정한 □□(결락)이
많았다. 이로써 문집이 크게 많아져 세상에 모두 열람할 수 없게 되었다. 호사자들
은 □련(□聯), 이어(異語), 양추(陽秋)라고 말하는 것들을 모아 시화(詩話)를 만들
었다.
본조(本朝. 즉, 고려)의 문물이 한.당(漢唐)에 비해 융성하면서도 유술(儒術)을
힘껏 숭상하여 조충(雕蟲. 잔재주)을 일삼지 않았다. 그러나 문장으로 이름이 있는
자 또한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권질(卷蛭)로 편찬하지 않아 문집이 세상에 전해오는 것이 오로지 수
십 개에 그쳤다. 나머지는 인몰되어 들려오지 않으니 진실로 애석하다.
옛날 정추승 사문(鄭中丞 嗣文. 정서<鄭舒>)이 습기잡서(習氣雜書)를 저술하였
는데, 또한 신화류(新話類)이다. 숭경(崇慶) 연간에 이대간 미(李大諫 眉. 이인로<
李仁老>)가 평소에 기술한 바에다 간략하게 평론하여 '파한'(破閑)이라 이름했다.
지금 참정(參政) 최공(崔公. 최자<崔滋>)이 이를 이어받아 편찬하여 '보한'(補
閑)이라고 이름했다. 무릇 '한'(閑)이라는 것은 소요하면서 일이 없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 한가로우면서 한묵(翰墨)을 일삼으나, 그 한가로움이 온전하지 않기에 '파'
(破)한다고 했다. 그런고로 파(破)한 것이 아니라 여겨진다.
여유롭게 음영하고 하늘의 화기(和氣)를 발하여, 다만 한가로운 맛을 보(補)한
까닭으로 '補'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정의 명제가 절로 높다고 하겠다.
청하공(淸河公)이 공명 부귀의 지위에 있으면서 경사(經史)가 □□하고, 문장을
잘했다. 이 책을 보고 좋아하여 말하기를 공무에서 물러나 쉬면서 재실에서 읊조리
고 뛰어난 문사를 맞이하며 손으로 펼치고 입으로 노래함이 있으며, 맑고 활기로움
에 밑거름 되고 태평함을 치장하며, 문화(文化)를 단장하기에 족하도다.
나라에 대해, 한가로움의 아름다움에 어찌 조그마한 보탬이 □겠는가? 보한(補
閑)의 뜻이 이로써 더욱 명백하다. 그래서 나에게 명하여 이 뜻을 적게 하고 공을
불려서 각판한다. 을묘년 칠월 한림학사 경원(翰林學士 慶源) 이장용(李藏用)이 제(
題)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風雅旣變, 至唐宋, 詩人多爲投贈(공격2자), 由是文集浩廣, 世不可遍閱. 好事者,
取(공격1자)聯異語陽秋之謂爲詩話, 本朝文物, 比隆漢唐, 而惇尙儒術, 不事雕筮, 然
以詞藻顯名者, 亦不爲少, 初未有緝成卷帙, 故其集行於世, 唯數十家而已. 餘湮沒無聞,
誠可惜也. 昔鄭中丞嗣文, 著習氣雜書, 亦新話之類也. 崇慶中, 李大諫眉 筆素所記者,
略爲評論, 名破閑. 今參政崔公, 續編之, 名補閑. 夫閑者, 逍遙無事之稱也. 閑而事翰
墨, 其閑不全, 故曰破(공격1자), 故以爲非破也. 從容嘯 , 暢發天和, 所以裨益閑味,
故曰補, 然則參政之題, 其自高矣. (공격2자)淸河公居功名富貴之地, 而(공격2자)經史,
深於文章, 見此書而悅之, 乃曰其有自公退食, 開吟齋, 迎佳士, 手披口 , 而資淸活,
足以粉澤大平, 丹靑文化, 則於國家閑暇之美, 豈(공격1자)小補, 補閑之義, 於此益知
也. 於是命予志之, 而召公 梓云. 乙卯七月日, 翰林學士, 慶源李藏用題.
(서울=연합뉴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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