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지 ~ 익원공(김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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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5-31 20:25 조회2,073회 댓글0건본문
시조대왕 김 閼智(알지) |
새漢(새한) |
하道(하도) |
首留(수유) |
郁甫(욱보) |
仇道(구도) |
末仇(말구) |
奈勿王(내물왕) |
卜好(복호) |
習寶(습보) |
智證王(지증왕) |
眞宗(진종) |
欽運(흠운) |
摩次(마차) |
法宣(법선) |
義寬(의관) |
위文(위문) |
孝讓(효양) |
元聖王(원성왕) |
예英(예영) |
均貞(균정) |
神武王(신무왕) |
文聖王(문성왕) |
安(안) |
敏恭(민공) |
實虹(실홍) |
孝宗(효종) |
敬順王(경순왕) |
殷說(은열) |
叔承(숙승) |
日兢(일긍) |
利請(이청) |
義和(의화) |
敏成(민성) |
이중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에서 가장많은 후손들이 나왔다경순왕은 9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중 넷째아들인
은열[殷說]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며구안동[舊安東], 청풍, 김녕, 도강, 전주, 양근, 영광, 안산김씨 등이 은열의
후손으로 전하며 집니다.
敏成(민성) |
孝恭(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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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印(효인) |
충열공 方慶(방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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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慶(지경) |
惺(성) |
永儒(영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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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洙(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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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慶(현경) |
준(준) |
永星(영성) |
激(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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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奎(영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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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箕(영기) |
약(약) |
士文(사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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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구(효구) |
惟善(유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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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綬(효수) |
天錫(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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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組(효조) |
天弼(천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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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따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참고 하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叔承(숙승) |
日兢(일긍) |
利請(이청) |
義和(의화) |
敏成(민성) |
孝恭(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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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印(효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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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慶(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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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慶(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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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구(효구) |
惟善(유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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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綬(효수) |
天錫(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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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組(효조) |
天弼(천필) |
아래 표는 우리 시조方慶방경 할아버지 형제분과 孫손 입니다.
之慶(지경) |
惺(성) |
永儒(영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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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洙(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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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慶(현경) |
준(준) |
永星(영성) |
激(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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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奎(영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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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箕(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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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文(사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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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金方慶). 충렬공(忠烈公). 1212년(강종1)---1300년(충열왕26).
金 方 慶 墓 誌 銘
1. 원문
高麗國上洛公之墓誌(題額)
(1) 夫天下有達尊三 德一齒一爵一 君子之行於世 得其一二猶難 況得其三者乎 其得三而無缺者 惟我上洛公而已 公姓
(2) 金 諱方慶 永嘉郡人也 曾祖司戶義和 贈檢校軍器監 祖掌冶署丞兼直史館敏誠 贈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 考正議
(3) 大夫兵部尙書翰林學士充史館修撰官知制誥孝印 贈金紫光祿大夫中書令 皆以公故 追加 元興鎭副使郎將宋耆
(4) 本金海府之女也 公天性忠勤而恭儉 信厚而沈嚴 雖起自虎官 能於吏幹 以將軍兼給事中 或兼御史中丞 或以金吾衛
(5) 大將軍知閤門事 又知御史臺事 又拜御史大夫 揚歷臺閣 夙夜匪懈 決斷神明 凜凜然生風 人皆畏肅 或以民望 累鎭西
(6) 北 恩威迭用 其俗謳歌 至今懷慕 國歌當庚午歲 自江都復出松京 有不臣輩 謀亂而南公以同知樞密院事 爲追討使統
(7) 軍 圍賊于珍島 至翌年五月 凡大戰十五度而取之 遂拜金紫光祿大夫守大尉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 大子大保 俄
(8) 拜門下侍郞平章事 是役也 漏網餘種 入據耽羅 阻險肆毒 又以公爲行營中軍兵馬元帥 癸酉四月二十八日 帆過大洋
(9) 盡蜂屯 如以大山壓卵 三韓擧有聊生之望 元廟召入寢殿 曲賜宴慰 授守大師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柱國
(10) 判御史臺事 是年 先帝詔入朝御廣寒殿 坐公於丞相列設大宴 手賜於案上珍味 仍以金符金鞍白銀鋌 多般幣帛
(11) 賞之 天下之見聞者 無不歆艶 知三韓有人焉 於是 又奉東征之命 甲戌入討日本 甚多 越己卯公再上章乞退
(12) 上每遣中使敦諭云 孤欲賜卿机丈 以是多故 禮儀未備 孤心怏怏 請卿更起視事 公未遂其志 庚辰冬 朝于
(13) 帝所 帝授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 辛巳夏 又入日本 南宋軍後期三月 因以淹留腐船而疫興 上國群師 每誘以
(14) 還軍 公力爭不可 累戰而後還 癸未又上章懇乞 上不得已加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重大匡判都僉
(15) 議事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 仍令致仕 上心未滿 丙申冬 又加上洛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 公之在
(16) 位 常夜寢早起 坐而待旦 及懸車亦如之 猶以邦國安危爲慮 至大德四年秋八月十有六日 因疾而薨于栢木洞 溪里
(17) 以九月初三日 歸葬于禮安西山之麓 從遺敎也 於戱 救難濟民社稷復安德一也 年至八十九 齒一也 以上國都元帥 又
(18) 加封公 爵一也 所謂備三而無缺者 盖實錄非溢美也 公嘉 起居郞知制誥朴益 之女也 生三男三女 瑄爲奉翊大夫
(19) 副知密直司事典法判書 先公卒 爲管高麗軍萬戶鎭國上將軍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將軍 恂爲奉翊大夫
(20) 密直司副使 判秘書寺事文翰學士 一女適參知政事 趙季恂之二子 仕至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上將軍典理判
(21) 書 一適知僉議副使金光遠之一子 朝顯大夫神虎衛保勝將軍金元沖 一適通禮門使權允明朴氏 先公薨 又娶孫氏 生
(22) 一女 適通禮門祗侯蔡宜 諸孫繩繩 亦爲華顯 蘭接玉聯而輝映門戶 公至九十而童顔眼見孫之 是亦異哉 若夫征戰
(23) 之際 每與 大朝軍馬出入應對由法 雖和而不使狎 雖抗而不使怒 至於臨難 無苟免 奮死不顧生 如此等一一功業
(24) 皆布在錄券與國史 此不詳陳 但存其大槪耳 予有瓜葛之分 且別承知待者 又有嗣子相國之請 謹把筆而銘之曰
(25) 大厦庇人 惟柱惟石 寒署不侵 風雨不迫 於万斯年 居之無 巍巍我公 爲周旦奭
(26) 佐命之功 定亂之策 至今三韓 民受其澤 國老其 天地脈脈 行路無知 感念今昔
(27) 故鄕勝墟 滿山松柏 厥祖有靈 卜隣可宅 遺囑分明 何必更擇 公不獨安 子孫蒙益
(28) 大德四年庚子九月 日
(29) 前正獻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文翰學士充史館修撰官知制誥 李 瑨 撰
상락 부원군 김사형의 졸기
상락 부원군 김사형이 졸하였다 김사형의 자는 평보인데, 안동부 사람이다대대로 귀하고 현달하여, 고조
김방경은 첨의 중찬 상락공으로서, 문무 겸전의 재주가 있어 당시의 어진재상이었고 조부김영후는 첨의
상락후 였다 김사형은 젊어서 화요직을 두루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 가
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을 일신하고 대신을 나누어 보내 각지방을 전제하여을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내를 잘다스렸다. 경오년에 지밀직사사로서 대사헌을 겸하였고 조
금뒤에 지문하부사로 승진하였다 대사헌에 있은지 일년이 넘었는데 조정이 숙연하여졌었다 여러번 전직
하여 삼사 좌사가 되었다가 임신년 7월에 여러 장수. 재상들과 더불어 태상왕을 추대하여 문하시랑찬성
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 전서 옹양위 상장군에 승진하고 일등공신에 녹훈되어 분의 좌명 개국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12월에 문하 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에 봉작되어 식읍 1천호에 식실봉 3백호를 받았
다 정축년에 겸 판사헌부사를 제수받았다 무인년의 변란에 김사형이 조준과 함께 대궐에 나가 백관을
거느리고 적장을 세워 사자를 삼을것을 청하였다 상왕이 임 내선을 받으니 녹공이 또 1등이 되어 공신
의 호를 더하기를 "동덕 정난 정사"라 하엿다 건문황제의 등극때에 중국에 들어가 하례하엿다 기묘년12
월에 스스로 성만하다고 진달하여 여러번 직임을 그만두기를 비니 상왕이 오랫만에 허락하였다 김사형
이 조준과 더불어 8년동안 함께 정승 노릇을 하엿는데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을 전
담하고 사형은 관대하여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을 진압하니 물의가 의중하였다 주상
이 즉위하자 신사년 3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었다가 임오년10월에 사임하고 영사평부사가 된지 달포가 지
나서 부원군이 되어 사제로 은퇴하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않고 성색
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때부터 운명할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
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졸한 나이가 67세이다 조회를 3일을 정지하고 좌
부대언 윤수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이라 하였다 두 아들은 김승과 김 육이다.
▣ 김영환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 김윤만 -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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