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進士公 金棨(진사공 김계)와 우의정 정언신, 영의정 남구만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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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7-09-02 22:59 조회1,901회 댓글1건본문
進士公 金棨(진사공 김계)
자는 신보(信甫)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을유<宣祖乙酉 : 1585년(선조 18) ☞壬申譜의 1558년은 오기이다>에 나시어 1630년(숙종 8) 경오(庚午) 12월 초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46세(☞壬申譜의 壽 73세는 생년 1558년의 오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또한 오기이다)이다.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에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등제(登第)하여 진사(☞출처 : 家譜)가 되었고 광해조에서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증조부(曾祖父)는 병사공(兵使公) 윤종(胤宗)·조부(祖父)는 음성공(陰城公) 진강(震綱)·부(父)는 상촌(桑村) 입향조(入鄕祖) 하양공(河陽公) 대화(大澕)·외조부(外祖父)는 전주인 이양형(李陽亨)이다.
배(配)는 공인(恭人) 밀양변씨(密陽卞氏)이며 1589년(선조 22) 기축(己丑) 정월에 나시어 1619년(광해군 11) 기미(己未-근거:家譜) 6월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31세이다.<☞壬申譜에 ‘효종 6년(1655) 을미(乙未) 6월17일 卒 墓附 壽 67歲’이란 기록이 있는데 아드님 영희(1622)·영후(1627)의 생년을 고려해 볼 때 家譜기록이 오기인 듯하다> 증 참판(贈參判) 건원(乾元)의 따님이요, 주부(主簿) 증승지(贈承旨) 희전(希銓)의 손(孫)이며, 군수(郡守) 응몽(應夢)의 증손(曾孫)이요, 만호(萬戶) 순천(順天) 김침(金琛)의 외손(外孫)이다. 2남4녀를 길렀는데 맏이 영희(永熙)는 백형(伯兄) 구(榘)의 아들이 되었고 다음은 영후(永煦)이며, 딸은 정수(鄭脩)(☞家譜 원본에는 修가아닌 脩로 壬申譜 및 藥泉集第二十六 家乘을 근거로 脩가 바름, 壬申譜의 李脩는 鄭脩의 오기이다)에게 출가하였는데 동래인(東萊人)이요, 문과(文科)하여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다음은 조형(趙鎣)에게 출가하였는데 한양인(漢陽人)이며, 다음은 권협(權鋏)에게 출가하였는데 안동인(安東人)이며, 다음은 김호(金灝)에게 출가하였는데 경주인(慶州人)이요 진사(進士)이다. 측실(側室)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영훈(永薰)이다.
묘(墓)는 助桑里壬坐(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뿌리 우측 산록)에 있었다. 이 산록(山麓)에는 계(棨) 할아버지 묘역을 기준으로 좌(동)측으로 손자이신 익서(翼瑞)공의 묘역, 아래에는 차자(次子)이신 영후(永煦)공의 묘역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정인(鼎仁)공의 묘역이 있다. 1998년 3월21일 사초를 하면서 새롭게 석물을 세워 단장하였었는데 봉분은 호석을 둘렀고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었다. 사초할 당시 옛 상석은 새로운 상석 받침대로 썼다. 상석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는데 유학(幼學)이 아닌 진사(進士) 또는 생원(生員)이 바른 표기이다.
氏 陽 配 之 幼 諱 金 安
□ 卞 密 墓 學 棨 公 東
□는 ‘壬坐 合附’
그리고 배계절에는 오래된 망주석이 한 쌍이 있었다. 2003년 4월26일 선조 6위 묘역으로 합폄(合窆) 이장(移葬)하였다.
《參考文獻 : 壬申譜/1992·家譜·陰城郡誌/1979》
☞ 직계 후손들의 가보(家譜)에 진사공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마방목에는 “김계(金棨) 자는 신보(信甫). 본관 안동. 을유(乙酉) 1585년에 태어나 29세 때인 광해군 5년(1613) 계축 증광시에 생원 3등 10위로 등제하였다. 거주지는 충주. 전력은 유학(幼學). 아버지는 김대하(金大河 : 초명임)로 사포서별제(司圃暑別提) 승훈랑(承訓郞)이다”고 되어 있고, 공은 1630년에 졸하시고 1661년에 졸하신 사위 정수의 묘지명에도 생원(生員)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진사(進士)가 아닌 생원(生員)이 바른 것으로 본다.
▣ 변삼근(卞三近) ▣
변삼근[선조 12년(1579)~ ]. 자는 성지(誠之) 본관은 밀양이다.
부는 건원(乾元), 조부 희전(希銓) 증조 응몽(應夢) 외조 김침(金琛) 처부 윤희(尹禧)·윤붕(尹鵬)·이온(李蘊)이다.
1606년 병오에 생원이 되고, 광해군 3년(신해 1611)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참판에 이르렀다.《출처 : 조선조방목》
따라서 진사공 계(棨)의 배위 밀양변씨는 참판 변삼근(卞三近)의 여동생이다.
▣ 정수(鄭脩) ▣
정수(鄭脩)는 광해군 1년(1609) 생으로 자는 공신(公愼), 동래인(東萊人)이다. 부는 정세미(鄭世美), 조부 정협(鄭協), 증조 정언신(鄭彦信), 외조 이상의(李尙毅), 처부는 이무림·김계(李茂林·金棨)이다. 2녀2남을 두었는데 장녀는 의령인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에게, 차녀는 함평인 정랑 이정만(李庭萬)에게, 아들은 승지 정래상(鄭來祥), 현감 정지상(鄭至祥)이고, 형은 승지 정유(鄭攸)이다.
효종 1년(경인, 1650) 증광시 을과2(乙科2)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하였다.
▣ 정언신(鄭彦信) ▣
철원부사공 김확[金矱, 선조 5년(1572)~인조 11년(1633)]의 배위가 정언신의 따님이고, 정언신의 증손 정수(鄭脩)의 배위가 김확의 6촌 동생 김계[金棨, 선조 18년(1585)~인조 8년(1630)]의 따님으로 정수의 배위 안동김씨는 재당숙모인 동래정씨의 중매로 혼인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결국 친정의 재당숙모가 시가로는 대고모가 되는 것이다.
정언신(鄭彦信)은 중종 22년(1527)∼선조 24년(159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이다.
슬하에 4남5녀를 두었는데 이조판서 정혐(鄭協), 정율(鄭慄), 전주인 이효삼(李孝參), 의령인 남이준(南以俊), 안동인 김확(金矱), 이경인(李敬仁), 청해인 이중로(李重老), 정관(鄭慣), 정박(鄭박)을 두었다.
명종 21년(156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선조 4년(1571)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선조 16년(1582)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선조 22년(1589)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였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23년(1599)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 정협(鄭協)▣
명종 16년(1561)∼광해군 3년(161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화백(和伯), 호는 한천(寒泉). 우의정 언신(彦信)의 아들이다.
선조 21년(1588) 식년문과에 급제, 검열·정자를 지냈다.
선조 22년(1589) 아버지가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은 뒤로는 미관말직으로 전전하다가 선조 32년(1599) 아버지가 신원(伸寃)되자, 검상에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보덕·수찬·헌납·장령·사인·판교·사간·부응교·응교·사예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38년(1605)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동지중추부사·대사간 등을 지내고, 광해군 즉위년(1608)에 이조참판·좌부빈객·대사헌·대사간·부제학·예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이듬해 동지춘추관사·예조참판·이조판서가 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앞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역대실록을 중간할 때에는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시주를 즐기고, 노소현우를 가리지 않고 교유하였다고 한다.
▣ 정세미(鄭世美) ▣
선조 16년(1583)∼인조 2년(1624).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와(東窩). 참판 협(協)의 아들이다.
선조 39년(1606) 진사가 되고, 2년 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사가 되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당시 호남의 유생 고경리(高敬履)가 성혼(成渾)이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의 4현(賢)의 도를 이어 받아 정주학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원을 청할 때, 이언적(李彦迪)을 논외로 함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깎아내리는 처사라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광해군 3년(1611) 수찬을 거쳐 정언·도호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 이상의(李尙毅) ▣
명종 15년(1560)∼인조 2년(1624).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소릉(少陵), 사재감첨정 우인(友仁)의 아들이다.
선조 18년(1585)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선조 32년(1602) 이조참판, 이듬해 성천부사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리고 학교를 크게 일으켜서 지금까지 그 고을에서 한명도 내지 못했던 소과 합격자를 냄으로써 학구열을 불러일으켰다. 1606년 중앙으로 다시 올라와 성균관대사성·도승지·형조판서를 거쳐 광해군 1년(1609)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져 공조판서가 되었고, 1616년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10년(1618) 좌찬성에 올라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위성공신이 혁파되어 훈봉이 삭탈되고 1품계가 강등되는 동시에 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소릉집 少陵集》이 있다. 뒤에 선조조의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 남구만(南九萬) ▣
아래 남구만의 문집 약천집에 실린 장인의 묘지명“외구묘지명(外舅墓誌銘)”에 의거 남구만(南九萬)은 정수(鄭脩)의 큰 사위로 김계(金棨)의 외손녀 사위가 분명하다.
인조 7년(1629)∼숙종 37년(1711).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효종 2년(1651)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종 7년(165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전적·사서·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효종 10년(1659) 홍문록에 오르고 바로 교리에 임명되었다.
현종 1년(1660) 이조정랑, 이어 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62년에는 영남에 어사로 나가 진휼사업을 벌였다.
현종 15년(1674) 함경도관찰사로서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하였다. 숙종 초 대사성·형조판서를 거쳐 숙종 5년(1679) 좌윤이 되었으며, 같은 해 윤휴(尹鑴)·허견(許堅)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1680년과 1683년 두 차례 대제학에 올랐다. 병조판서가 되어 폐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무창(茂昌)·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軍政)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하였다.
숙종 10년(1684)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숙종 13년(1687) 영의정에 올랐다. 이즈음 송시열(宋時烈)의 훈척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하여 소론(少論)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숙종 20년(1694)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숙종 27년(1701)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에 대하여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 낙향하였다.
그 뒤 부처(付處)·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서용되었으나, 숙종 33년(1707)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당시 정치운영의 중심인물로서 정치·경제·형정·군정·인재등용·의례(儀禮) 등 국정전반에 걸쳐 경륜을 폈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 뛰어나 책문(冊文)·반교문(頒敎文)·묘지명 등을 많이 썼다. 또한,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남기고 있다.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숙종 묘정(廟庭)에 배향,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鐘山書院), 무산(茂山)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천집》·《주역참동계주 周易參同契註》가 전한다. 글씨로는 좌상남지비(左相南智碑), 찬성장현광비(贊成張顯光碑), 개심사(開心寺)·양화루(兩花樓)·영송루(迎送樓)의 액자를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外舅墓誌銘
舅氏鄭公下世後三十年。嗣子司諫來祥謂余曰。幽堂之銘。尙未有述。非所以爲悠久之圖。今不可舍親而他求。敢以屬。噫。余於玆事。唯不文是懼。不然豈待夫求之與屬之哉。雖然亦不可以不文辭。乃敢載其世系。次其官序。著其志行。紀其媲匹。錄其葬地。列其子姓。以俟于無窮。公諱脩字公愼。籍東萊。考諱世美。賜緋長淵府使贈吏曹參判。祖諱協。吏曹參判贈吏曹判書。曾祖諱彥信。議政府右議政。妣驪州李氏。左贊成尙毅之女。遠祖高麗左僕射穆。本朝禮曹判書可宗。大司憲守弘最其顯者。此公之先系也。年二十二。崇禎庚午歲成進士。以推擇補穆陵參奉。廣興倉奉事,掌樂院直長,司僕寺主簿。庚寅登文科。拜禮兵二曹佐郞。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成均館直講。兵曹正郞。永春縣監。有去思碑。禮曹正郞。司憲府持平。平安道都事兼春秋館記注官。漢城府庶尹。成均館司藝。司䆃寺正。其歷京司。或一職再三。此公之官序也。未冠而孤。母夫人有疾。經年不瘳。達夜扶將。晨輒沐浴虔禱于家廟。久以爲常。有弟早歿。推居宅以讓于寡嫂。於家未嘗以芬華近。於官未嘗以長物隨。自牧以卑。恂如也。自執以讓。恬如也。旣通文籍。功名有道路可指取。而其於樹援引借聲譽。一掃而絶之。論其資地與位遇。而其所以然者可知矣。此公之志行也。初娶淑人全義李氏。同知敦寧府事茂林之女。夭而不育。墓在坡州分水院。再娶淑人安東金氏。惕若齋九容之九代孫生員棨之女。以萬曆癸丑生。以崇禎戊辰歸。辛丑三月三十日卒。初葬于果川。明年三月移葬于鐵原府寬仁里負乙之原。是年十一月十一日公卒。明年正月合窆焉。此公之媲匹若葬地也。男長卽來祥。次至祥生員。女長卽九萬妻。次適參奉李庭萬。來祥有三男二女。男長琢。餘幼。至祥有二男四女皆幼。九萬一男鶴鳴。一女適禮賓正趙泰相。李庭萬二男寅斗,寅奎。四女適權濟經,任守經,尹彙全,鄭河瑞。此公之子姓也。金淑人孝於姑以婦道稱。順於君子以妻道稱。訓於子女以母道稱。至若蓄旨之勤。御窮之勞。靡有朝夕。使貧而不至於傷。儉而不至於陋。是又可以家道稱也。九萬及冠而贅公之門。事公者十五年。宜可鎰公之全。而識昧文淺。所述止此。豈足以爲效於公也。雖然亦不敢有一字之溢。以負公平日挹遜之敎云。銘曰。
於戲舅氏。謙以守志。如甘之嗜。拙以遠利。如臭之避。官榮而庳。壽下而止。其爲者已。其報者彼。留其餘祉。後人之委。
《藥泉集第二十六 家乘》
- 전 략 -
초취 부인 숙인 전의이씨는 동지돈령부사 무림의 따님으로 일찍 돌아가시어 자손이 없다. 묘는 파주 분수원에 있다.
재취 부인 숙인 안동김씨는 척약재 구용의 9대손 생원 계의 따님으로 만력계축[광해군 5년(1613)]에 태어나, 숭정무진[인조 6년(1628)]에 시집오고, 신축[현종 2년(1661)] 3월 30일 돌아가셨다. 처음 과천에 장사를 지냈는데, 다음해 3월 철원부 관인리 부을 원에 이장하였다.
이 해 11월 11일 공이 돌아가시고 다음 해 정월 합폄하여 부인과 같은 장지에 모셨다. 장남은 래상이고, 다음은 지상으로 생원이다. 장녀는 구만의 아내이고, 다음은 참봉 이정만에게 시집을 갔다. 래상은 3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탁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지상은 2남4녀를 두었는데 다 어리다. 구만은 1남을 두었는데 학명이고, 딸 하나는 예빈정 조태상에게 시집갔다. 이정만의 2남은 인두와 인규이다. 딸 넷은 권제경, 임수경, 윤휘전, 정하서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이것이 공의 자손들의 성이다.
안동김씨 부인은 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므로 부도의 칭송을 들었고, 남편을 잘 섬김으로 처도의 칭찬을 들었으며, 자녀의 훈육을 잘 하므로서 모도의 칭송을 들었다.
- 후 략 -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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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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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진사공(휘 계)의 자료 감사합니다. 홈 문온공파란 중에 해당 선조님 부분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