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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정기산행(동구릉) 보고_02 개경사와 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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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윤식 작성일07-09-15 07:41 조회2,432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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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정기산행(동구릉) 보고_02 개경사와 수릉

동구릉 답사보고는 시대 변천을 따라 건원릉부터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편의상 우리 일행이 답사한 순서대로 소개드리겠습니다.
답사 순서는 개경사 터, 수릉, 현릉, 건원릉, 목릉, 휘릉, 원릉, 경릉, 혜릉, 숭릉, 명성황후 초장지 터, 지당(池塘)입니다.
또한 왕릉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용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첫 부분이 지루하게 길어진 점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주춧돌만 남은 태조의 원찰, 개경사

아침녘 동구릉 숲길이 호젓하고 운치가 있습니다.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되려던 순간, 때마침 대구에서 올라오신 재만 현종 내외분과 처제분께서 도착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관리사무소에서 가장 가까운 수릉으로 향합니다.

수릉 입구에 들어서자 진정임 선생이 바로 옆 숲속 개경사(開慶寺) 터로 안내합니다. 개경사는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 위치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다가 두어 해 전에 구리문화원 박명섭 선생에 의해 그 터가 발견되었답니다.

군데군데 키를 넘는 수풀을 헤치며 주춧돌을 찾았지만 쉽사리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형옥 선생이 “정밀조사를 위해 문화재청에서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래도 발걸음이 아쉬워 몇 군데 더 둘러본 끝에 재만 현종께서 수풀에 가려 있던 주춧돌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아랫부분은 자연석을 네모꼴로 거칠게 쪼아내고, 기둥과 만나는 윗부분은 둥글게 다듬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로 비교적 정교한 편입니다.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둥근 부분의 지름을 고려하면 기둥 굵기가 꽤 될 것 같습니다. 비록 단 하나뿐인 주춧돌이지만 그 크기로 보아 처마까지의 높이도 만만치 않아 건물 전체 크기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으리으리할 정도로 아주 큰 집 같아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단정한 사대부의 집 형태가 아니었는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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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 원찰 개경사(開慶寺) 터-개국 초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의 왕릉 옆에 원찰을 둔 것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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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경사 주춧돌

이 자리에는 본래 건원릉(태조의 능)을 조성할 당시 재궁(齋宮 능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지었는데, 1408년 7월 태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개경사’로 고치고 건원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실록에 의하면 1408년(태종 8) 7월 29일에 150명의 노비와 토지 300결을 하사해 조계종에 소속시켰습니다. 1결은 씨앗이나 곡식 따위를 한 움큼 쥐어서 뿌린 넓이의 100배를 말하는데 약 3,000평에서 7,000평이라고 합니다. 300결은 최소 90만 평에서 최대 210만 평에 달합니다. 우리가 답사 갈 때면 자주 모이는 잠실올림픽운동장이 대략 17만 평 정도입니다. 그런 대규모 운동장이 작게 잡아도 5개, 많게는 12개가 들어설 정도라니 입이 절로 벌어집니다. 현재 동구릉 면적은 58만여 평인 191만 5,891㎡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검암산은 앞의 드넓은 벌판과 인근 산들을 모두 포함하는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태종은 1410년에 송림현 선흥사(禪興寺)의 탑을 이곳 개경사로 옮겼으며, 세종은 1418년에 쌀 50석을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송림현 선흥사는 문온공(휘 구용) 할아버지 초혼장지와 근접한 절이라 느낌이 각별합니다. 뿐만 아니라 개경사는 안정공(휘 구덕) 할아버지께서 1419년에 조선 제2대 임금 정종(定宗)의 칠재(七齋)를 지낸 곳이기도 합니다. 칠재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에 지내는 재(齋), 즉 사십구재(四十九齋)를 말합니다.

이 개경사는 워낙 건원릉과 가까워 단종 때에 절을 옮기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으며, 어느 땐가 검암산 남쪽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조 23년(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개경사가 폐사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이제 정밀조사가 끝나면 개경사의 옛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범우고>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데, 개경사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 선조님 행적을 파악하는 데 간접적인 도움이 될 것 같아 추후 다시 조사할 예정입니다.

■ 세도정치의 갈림길에서 요절한 문조 익황제, 수릉(綏陵)

수릉은 추존 황제 문조(文祖 1809~1830)와 신정황후(神貞皇后 1808~1890) 조씨의 합장릉입니다. 조선조 왕과 왕비의 능은 각각 독립적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수릉은 예외적으로 합장으로 모신 점이 특징입니다. 이 때문에 동구릉은 17분의 왕과 왕비를 모셨지만, 봉분은 총 16개가 됩니다.

문조는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의 아들로 이름은 영(旲 원래의 音은 대), 자(字)는 덕인(德寅), 호(號)는 경헌(敬軒)입니다. 어머니는 익히 들어온 후안동김씨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입니다. 문조는 1812년(순조 12) 왕세자에 책봉돼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 풍양조씨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이 풍양조씨가 바로 신정황후로 후안동김씨는 물론 흥선대원군과 권력을 놓고 치열한 투쟁을 벌였던 바로 그분입니다. 12살 때 문조(효명세자)의 비로 책봉(세자빈)돼 효부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천성이 어진 분이셨으나, 말년에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제국이 어려움에 처하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는 것을 한탄했다고 합니다.

문조는 세자 시절인 1827년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습니다. 당시 문조는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처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문조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애석하게도 불과 4년 뒤인 1830년에 22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후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었던 점에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를 혁파하기 위한 큰 뜻을 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문조의 독살설(毒殺說)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풍양조씨들이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계기로 조정에 대거 진출해 후안동김씨 일파와 치열한 권력다툼을 전개했고, 결과적으로 세도정치는 조선의 국가적 위기를 야기했습니다.

효명세자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요절하자 양주 천장산(현 서울 석관동)의 의릉(懿陵 경종의 능) 좌측 언덕에 유좌묘향(正西에서 正東 방향)으로 안장하였습니다. 당시는 세자의 무덤이었으므로 묘호는 연경원(延慶園)이라 했으며, 아들 헌종이 1835년에 즉위해 익종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수릉(綏陵)으로 높였습니다. 그러나 1846년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으로 옮겨 모셨다가 1855년(철종 6)에 다시 건원릉 좌측 언덕에 임좌병향(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천장하고, 1899년(광무 3)에 문조 익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 문조의 요절과 반대로 신정황후 조씨는 춘추 83세이셨으니 역사의 갈림길은 되씹을수록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개경사를 둘러보고 수릉 앞 홍살문을 지나 참도(參道)를 따라 잔디밭을 걸어갑니다. 홍살문은 능(陵)·원(園)·묘(廟)·궁전(宮殿) 또는 관아(官衙)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 문입니다.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데 양 옆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위에는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좌우에 화살 모양의 나무를 박아 놓은 형태입니다. 태극 문양 위에는 2지창 또는 3지창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홍살문은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홍살문이 있는 곳부터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정자각으로 향하는 길[參道]은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한 단을 낮춰 어도(御道)가 잘 정비돼 있습니다. 그 오른쪽으로 다시 한 단을 낮춰 문신(文臣)들이 사용하는 길과 신도 왼쪽으로 단을 낮추어 무신(武臣)들이 사용하는 길이 설치돼 있습니다. 각각의 낱말에서 짐작하듯이 신도는 승하하신 왕과 왕비의 혼령, 어도는 임금, 문․무도는 문신과 무신이 사용하는 길입니다. 능에 가시면 가급적 신도와 어도는 밟지 않는 것이 예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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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릉 정자각과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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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 얇고 넓적한 돌)을 사용했으며, 홍살문에서부터 정자각까지 3번 꺾여 있는데 수릉의 지형지세를 전혀 거스르지 않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문화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절묘하게 인공(人工)을 가하는 점이 특징입니다. 신도가 3번 꺾여 있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건축에서는 길을 꺾음으로써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변화를 주는데 서양인들은 이를 시퀀스(sequence)라고 한답니다. 길을 통한 발걸음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풍경의 변화를 유도하는 시퀀스는 종묘에 가 보시면 그 아름다움과 절묘함에 탄복하실 겁니다.

신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에 수복방 터와 정자각 왼쪽으로 수라간 터가 남아 있습니다. 묘비는 2기인데, 맨 윗부분에 하나는 ‘朝鮮國’, 다른 하나는 ‘大韓’이라 적혀 있습니다. ‘大韓’으로 적힌 것은 1897년 ‘大韓帝國’을 공포한 뒤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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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의 표석은 1890년 고종이 찬하고 글을 썼다. 비문 말미에 昇遐八月三十日 祔葬于 綏陵而同封壽八十三嗚呼前面與陰記小子泣血敬撰並書」崇禎紀元後二百六十三年 月 日 (아! 비의 앞면과 뒷면 글씨는 소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짓고 쓴다. 숭정기원후 263년(고종 27, 1890년) 월 일에 세움) 라 하며 애통함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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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해설사 진정임 선생

수릉 앞에는 반듯한 정자각이 서 있는데, 기단을 잘 다듬은 장방형 돌로 쌓아 월대가 툭 튀어나온 것처럼 보여 엄숙함을 느끼게 합니다. 정자각 지붕에는 잡상(雜像)이 놓여 있습니다. 잡상은 장식 기와의 일종으로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 의하면 소설 서유기의 등장인물과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이라 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궁궐의궤>(1934년)에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서 그 형상을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잡상은 19세기 이후 것들인데, 맨 앞에 손오공상(像)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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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릉 정자각의 잡상

참도를 따라 정자각에 도착하면 돌 계단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왕의 혼령이 사용하는 신계(神階)이며, 그 오른쪽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계단입니다. 진정임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신계 소맷돌에 북과 징의 형상을 만들어 놓기도 하는데, ‘북’은 ‘전진(前進)’, ‘징’은 ‘태어남[出生]’를 뜻한다고 합니다.

정자각 오른쪽(정자각에서 북동쪽)으로 능 바로 앞에 산신석(山神石)이 배치돼 있습니다. 왕은 산신보다 높은 존재이므로 산신석을 능 앞쪽에 배치하고, 왕에 대한 제례가 끝난 후 산신에게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정자각을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수릉으로 올라가 4배를 드립니다. 지존(至尊)이신 임금께 신하가 올리는 절은 선읍후배(先揖後拜)라 하여 먼저 읍(揖)을 한 다음 허리를 굽혀서 꿇어 엎드린 자세로 손을 앞으로 내밀어 고개를 숙이는 배(拜)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완전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쯤 일어나 다시 꿇어앉아 배(拜)를 합니다. 이렇게 4번 반복하기에 4배라 하는데, 배를 올릴 때 두 손의 모양은 서로 포개지 않고 좌우 검지가 서로 맞닿도록 해서 들입자[入] 모양이 되도록 합니다. 이를 양수입자형배(兩手入字型拜)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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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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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수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나중에 조성된 능으로서 ‘동구릉’이라는 명칭이 고착된 왕릉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초기에 조성된 왕릉보다는 석물(돌짐승)이나 석인(石人)의 배치가 상대적으로 덜 정밀하고, 비례도 상당히 흐트러져 있습니다.

수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릉이지만 단릉(單陵)처럼 봉분도 하나, 혼유석(魂遊石)도 하나입니다. 조선 초기 왕릉과 달리 병풍석이 없고, 난간만 둘렀습니다. 일반 사대부의 경우에는 무덤 앞에 상석(床石)을 놓고 그 뒤에 자그마하게 혼유석을 마련합니다. 왕릉의 경우에는 능 앞쪽의 정자각에서 제사를 받들므로 무덤 앞에 상석처럼 생긴 돌이 혼유석이 되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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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간석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鼓石)은 북 모양으로 생긴 석물인데, 왕릉의 경우에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5개를 사용하는 예가 많지만 동구릉에는 현재 3곳만 그러하다고 합니다. 고석 4면에는 도깨비 형상을 양각으로 새기고 그 위아래에 구슬 띠 모양의 무늬를 빙 둘러 새깁니다. 도깨비 입에는 둥근 고리가 물려 있는데, 자그마한 북을 새긴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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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석

수릉의 봉분 둘레에 배치한 석물은 대부분 <국조상례보편>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능 앞에는 초계·중계·하계의 3단으로 층이 지게 하는데, 수릉은 중계와 하계가 하나로 합해져 문인석과 무인석이 같은 단에 배치돼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영조의 원릉부터 철종의 예릉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세조가 백성의 고초를 덜어주기 위해 자신을 비롯한 후대 왕들의 능을 간소하게 만들라는 왕명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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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릉 문·무인석

문·무인석은 고려나 조선 초기의 사례와 달리 웅장한 맛이 나지 않아 왜소하고 섬약하지만, 무늬를 새긴 것은 매우 세밀한 편입니다. 문·무인석 모두 하체가 짧고 상체가 상대적으로 긴 형태입니다. 문인석은 홀을 쥔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위를 향해 있습니다. 머리에는 복두 대신 금관(金冠)을 썼는데, 후수(後綬)까지 세밀히 조각해 놓았습니다. 후수는 6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뒤에 늘이던 수를 말합니다. 뒤에서 바라본 문인석의 조복 무늬도 매우 섬세해 놀랄 정도였습니다. 가만히 손으로 더듬었더니 오돌토돌한 느낌이 퍽 좋습니다. 무인석도 장수의 기상은 느낌이 덜해 보였으나 투구와 갑옷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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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석과 조복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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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석

이외에 망주석과 장명등이 서 있는데, 익히 보아 온 형태이므로 생략합니다. 다만, 망주석의 세호(細虎)는 좌우의 방향이 상하행으로 되어 있으며, 꼬리가 유난히 깁니다. 세호는 호랑이 또는 다람쥐를 새긴 것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다람쥐가 좋아하는 도토리까지 새긴 사례도 있지만, 진정임 선생은 공민왕릉의 망주석에 새겨진 ‘담비’에서 유래된 학설을 소개합니다. 또한 세호는 나비 모양을 한 경우도 있으며, 그 형상이 사람의 귀를 닮았기에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형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고 일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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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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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릉 능침 후경

댓글목록

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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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헌인릉과 선정릉과 또다른 맛을 느낄 수가 있네요. 정말 아쉽습니다. 담에 또 한번 가요~~~
이 다음 왕릉은 어디로 가나요?? 벌써 궁금해집니다.
훌륭한 글과 사진이 만나니 더욱 흥미진진해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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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왕릉에 대해서는 개미실 대부님께서 오랫동안 답사하면서 연구해 오신 주제입니다.
이 날 저는 용어도 잘 몰라 돌아와서 쩔쩔 매고 있습니다. ㅠㅠ
지난 번 왕릉 답사를 못 간 게 무척 아쉬웠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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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개경사에 하사한 토지 면적과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출한 기록 등이 추가로 확보돼 관련 내용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