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회 정기산행(동구릉) 보고_04 건원릉 -- 사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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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윤식 작성일07-09-19 23:24 조회2,004회 댓글0건본문
제46회 정기산행(동구릉) 보고_04 건원릉
■ 왕조 창업의 풍운아, 태조 고황제 : 건원릉(建元陵)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년)의 건원릉은 동구릉의 시작이자 중심이기도 합니다. 1408년(태종 8)에 조성된 건원릉은 고려조 왕릉 가운데 가장 장려하고 완전하게 정비된 공민왕릉(玄陵)과 노국대장공주릉(正陵)의 양식을 계승했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조의 첫 왕릉으로 역대 왕릉을 조성하는 규범이 되기도 했습니다. 능호는 외자가 보통이지만, 건원릉만은 두 자로 지어졌습니다.
1408년 5월 태조께서 승하하자 7월 29일 재궁(齋宮)을 개경사로 고쳐 원찰로 삼았으며, 9월 7일 발인하여 9월 9일 검암산에 계좌정향(癸坐丁向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모셨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명 사찰에서 탑과 관음상을 옮겨오기도 했는데, 1413년에는 해인사 대장경을 인출해 이곳에 봉안하였답니다.
현릉을 벗어나 건원릉 쪽으로 올라갔더니 자그마한 물줄기(금천)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흐릅니다. 그 위에 거칠게 다듬은 10개의 장대석(長大石)으로 금천교를 놓았습니다.
▲ 건원릉 금천교. 주위 자연환경에 맞추어 장식요소가 과감히 생략되었다.
▲ 맑은 물이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설치한 금천교. 축대만 튼실하게 쌓았을 뿐, 측면에도 별다른 장식을 가하지 않았다.
그 뒤쪽에 홍살문을 세우고, 정자각을 향해 박석으로 참도를 깔았습니다. 정자각 앞 오른쪽에 수복방과 비각이 서 있는데, 정자각 왼쪽 수라간은 터만 남았습니다.
▲ 아래는 사각으로, 위는 팔각으로 다듬은 주춧돌 위에 홍살문을 세웠다. 아래쪽 사각은 땅에 묻혔는지 보이지 않는다.
참도가 정자각으로 곧바로 향해 시선을 직선으로 유도한다. 참도는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90도로 꺾어진다.
▲ 건원릉 판위. 사방을 기다란 장대석으로 두르고, 전돌을 깔았다.
▲ 정자각과 비각 뒤로 현궁이 보인다. 두리기둥에 맞배지붕으로 지은 정자각은 겹처마를 얹어 일반 맞배지붕집보다 화려하다.
참도는 직선으로 정자각을 향하다가 정자각 축대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위로 틀어 돌계단[石階]으로 이어집니다. 상단 통로는 소맷돌이 있는 중앙 계단으로, 하단 통로는 곁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중앙 석계의 소맷돌 하단에만 태극무늬로 장식하고, 그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 참도와 석계(石階)가 만나는 부분. 혼령이 사용하는 돌계단에는 소맷돌을 붙이고, 태극무늬를 새겼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돌계단에는 아무런 장식을 가하지 않아 정자각은 혼령이 주가 되는 공간임을 은연중에 나타낸다.
▲ 돌계단의 소맷돌 하단 부분. 태극 문양을 새겼다.
정자각(丁字閣)은 왕릉 제사를 위해 봉분 앞에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입니다. 건원릉의 정자각은 장대석을 쌓아올리고 두리기둥을 세워 맞배지붕을 얹었습니다. 장대석 위에는 전돌을 깔고, 주춧돌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뜻하는 하방상원(下方上圓) 형태로 다듬었습니다.
▲ 참도와 만나는 돌계단이 둘이다. 소맷돌을 붙여 둥글게 보이는 돌계단이 임금의 혼령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 돌계단으로 올라서면 바로 곡배(曲拜) 자리로 연결된다. 제관들의 동선(動線)을 고려한 설계를 엿볼 수 있다.
▲ 잡상과 치미. 용마루 끝의 치미는 신라나 고려에 비하면 매우 생략된 형태이다. 수막새의 마구리에 무늬를 새겨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정자각은 능을 향한 전면공간과 월대로 이어지는 후면공간으로 분할됩니다. 전면공간은 능을 향한 ‘일(一)’자 형태로서 사방을 벽과 분합문으로 둘러막은 닫힌공간(폐쇄공간)입니다. 이에 반해 ‘곤(丨)’자 형태의 후면공간은 사방이 뻥 뚫린 열린공간(개방공간)입니다.
전면공간은 중앙 칸이 사분합(四分閤), 곁칸이 삼분합(三分閤)으로 되어 있어 필요할 때에는 분합문을 모두 들어올려 순식간에 열린공간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서양 건축이라고 열린공간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한번 벽으로 꽁꽁 틀어막으면 헐지 않고서는 공간 변형이 어려운 서양 건축의 공간구성에 비하면 우리 건축의 공간구성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 아파트에서 가변형 벽체가 인기를 끄는 것도 부분적이긴 하나 집주인 마음대로 공간구성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죠.
측면은 아래쪽에 전돌로 쌓은 다음 위에 흙으로 다시 쌓았기 때문에 흙 입자 사이의 미세한 구멍을 통해 안팎의 공기가 드나들며 숨쉬는 공간이 되도록 했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 칸에 문을 내서 능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 정자각 안에서 능침을 바라본 장면.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문 앞에 댓돌이 있다.
이 문 앞에 댓돌(섬돌)을 놓고, 능에서 흘러내리는 배수로 위에 석판교(石板橋)를 깔아 제관(祭官)이 밖으로 나가서 참도를 따라 능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왕릉 상설도’ 참조)
▲ 정자각에서 능침으로 나가는 공간. 문 앞에 댓돌을 놓고, 넓적한 돌로 다리를 놓아 제관들이 현궁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 돌다리 측면. 아래쪽은 능침에서 흘러내리는 빗물 따위가 잘 빠지도록 만들어 놓은 배수로이다.
▲ 왕릉 상설도. 망료위 표시는 잘못된 것이라 한다.
정자각 앞쪽 너른 마당 오른쪽에 수복방(守僕房)이 있습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이들이 숙직하는 집입니다. 진정임 선생은 우리 일행을 이끌고 수복방 뒷벽을 보여 줍니다. 담벽 아래쪽에 아이들 키 높이로 회벽을 쌓았는데, 사이사이에 호박 크기만한 돌을 둥그스름하게 약간 다듬어서 비교적 촘촘히 박았습니다. 이게 ‘콩떡담장’이랍니다. 콩으로 소를 넣어 만든 떡을 칼로 잘라낸 단면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겠지요. 순박하다 못해 ‘촌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더 좋았습니다. 함부로 숨쉬기조차 어려운 엄숙한 공간인 왕릉에 일반 서인들 집벽을 옮겨놓았으니 옛 사람들의 생각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 수복방 정면과 측면. 사각 주춧돌에 민기둥으로 지은 집이다. 눈에 잘 띄는 남쪽과 북쪽 담벼락은 다듬은 사괘석으로 쌓았다.
▲ 숨은 공간인 수복방 뒤쪽의 콩떡담장. 황토로 벽을 쌓고 호박돌을 박은 다음 회를 칠했다.
수복방 위쪽 비각에는 태조의 신도비 2기가 서 있습니다. 하나는 건원릉 조성 시에 세운 ‘태조건원릉비(太祖建元陵碑)’이며, 다른 하나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인 광무 4년(1900년)에 세운 ‘대한태조고황제건원릉(大韓太祖高皇帝陵)’ 비석입니다. 두 비석 모두 각각 거북좌대와 복연좌(伏蓮座 잎이 아래로 엎어진 모양의 연꽃 좌대)를 놓고 비신을 세운 다음 귀부를 얹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맨 밑의 거북좌대와 복연좌의 마멸 정도가 서로 다릅니다. 대한제국 선포 직후 새 신도비를 세우면서 복연좌를 하나씩 더 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비각으로 향하는 답사팀. 사진 중앙이 영식 등반대장.
▲ 비각 안의 신도비. 왼쪽은 조선 초에, 오른쪽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 세운 것이다.
▲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 세운 신도비의 탁본(탁본 출처 :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
답사팀 모두 비각으로 들어가 비신(碑身)에 적힌 비문을 살펴봅니다. 어느 분이신지 “익원공 할아버지다!”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짐작하시죠? 그 순간 우리 일행의 눈동자를요.
익원공(휘 사형) 할아버지 휘자가 적힌 곳이 잘 드러나지 않아 어느 분이 손가락으로 짚자 여기저기서 디카 플래시가 터집니다.
1409년 윤4월 13일 건립된 옛 신도비는 길창군 권근이 비명을 짓고, 정승 성석린이 글씨를 썼습니다. 전액은 전 판한성부사 정구의 필체입니다.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이 짓고, 성석린이 썼는데, 태종의 명에 의해 개국공신(開國功臣),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 명단을 적었습니다. 발용 현종께서 미리 프린트해 온 유인물을 보니 익원공 할아버지 휘자는 개국공신과 정사공신 명단에 각각 1번씩 적혀 있습니다. 개국공신은 1392년(태조 원년)에 태조가 송경(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하면서 조선 개국에 공이 큰 신하로 책록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정사공신은 1938년(정종 즉위년)에 정도전, 남은, 유만수 등이 정종의 동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옹립하려다가 주살(誅殺)되고 난 뒤에 책록된 공신을 말합니다. 익원공 할아버지께서는 두 공신 명단에 각각 1등급으로 책록되셨습니다. 좌명공신은 1400년(태종 원년)에 회안대군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한 공신들입니다.
▲ 비음기의 익원공 할아버지 휘자를 살펴보는 답사팀. 재만 현종께서 그 부분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 비음기에 적힌 익원공 할아버지 휘자(사진 중앙 아래쪽)
▲ 익원공 할아버지 휘자(사진 중앙 아래쪽). 바로 왼쪽에 우리 문중과 관계가 깊은 조박 선생의 휘자도 보인다.
태조 이성계는 잘 아시다시피 여말의 뛰어난 무장(武將)입니다. 잘 알려진 인물이므로 기본적인 내용만 소개합니다. 충숙왕 복위 4년(1335년)에 태어나 태종 8년(1408년) 춘추 74세로 승하하였습니다. 처음 사용한 자(字)는 중결(仲潔), 호(號)는 송헌(松軒)인데,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晋)으로 고쳤습니다.
태조가 공양왕을 폐위하고 개경의 수창궁에서 즉위한 때는 1392년 7월입니다. 당시 태조는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문물제도와 법제(法制)를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른다고 선언했습니다. 새 왕조의 창업이란 그만큼 어려운 모양입니다.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입니다.
정자각 왼쪽에는 소전대(燒錢臺)와 예감(瘞坎)이 있습니다. 소전대는 능에서 제사를 올린 뒤 철상(撤床) 때 축문을 태우는 석물입니다. 그 생김새가 단정하면서도 유려한 곡선이 볼수록 은은한 아름다움이 넘칩니다. 실측을 못 했습니다만, 황금비례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소전대는 제3대 태종(헌릉)까지만 조성하고, 그 이후에는 예감(瘞坎)으로 대체되었습니다.
▲ 앞쪽 석물이 소전대이다. 크기나 장식 기법 등에서 고려조를 계승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예감(瘞坎)은 제를 올린 뒤 폐백과 축판(祝版)을 묻는 구덩이로서 ‘瘞埳(예감)’이라고도 합니다. 예감은 길쭉한 석재(石材)로 4면을 막은 형태인데 안쪽이 우물처럼 움푹 들어가 있고, 바닥에 전돌을 깔았다고 합니다. 예감을 설치한 것은 축문을 태울 때 능에 불이 날 염려가 있어서 묻는 형태로 바뀐 것이랍니다. 예감에는 축문 외에 비단 1필과 음식물을 함께 묻는다고 합니다.
소전대나 예감에서 축문을 태우거나 묻을 때 바라보는 자리가 바로 망료위(望燎位)입니다. 망료위 위치는 정자각에서 곡배(曲拜)를 하는 자리의 건너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각종 안내용 팜플렛에는 예감과 대칭되는 봉분 동쪽으로 잘못 표시돼 있습니다. <조선조 왕릉문화의 이해> 120쪽을 보면 ‘행망료례(行望燎禮)’가 축문을 태우는 의식임이 분명한데, 망료위가 어느 위치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망료위의 위치를 정확히 말씀드리지 못한 점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 망료위. 곡배자리와 마주보는 위치다. 왼쪽에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가 보인다.
▲ 수라간 터와 정자각 서쪽 부분. 소전대나 예감, 수라간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은 산 자들이 오가는 공간이므로 장대석으로 하나만 만들었다.
▲ 예감. 실화(失火) 등의 우려 때문에 소전대를 대체하는 석물로 조성되었다. 송판으로 덮개를 만들어 덮었다.
소전대와 예감을 유심히 살핀 후 봉분으로 올라갑니다.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고, 군데군데 일정하지 않은 자연석이 여기저기 박혀 있습니다. 진정임 선생은 이 돌들이 기맥(氣脈)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인위적으로 박아 넣은 돌 같지는 않습니다. 황토로 쌓아올린 봉분 사이에 군데군데 돌이 박혀 있으면 장마철에 물기를 많이 머금어도 토사가 한꺼번에 쓸려 내리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 현궁에서 바라본 장면. 앞쪽이 비각, 사진 중앙이 정자각이다.
봉분으로 올라서자 다른 왕릉과 달리 잔디가 아니라 억새로 봉분을 덮었습니다. 태조가 생전에 고향을 그리워했기에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덮은 것이라 합니다. 자세히 보니 봉분 오른쪽이 약간 꺼져 있고, 억새풀도 그 부분만 다소 실하지 못합니다. 진정임 선생은, 1989년에 봉분 일부가 훼손돼 목릉 동쪽의 억새를 옮겨 심었으나 유독 그 부분만 잘 자라지 않는다고 들려 줍니다.
▲ 태조의 능침 전경
▲ 태조의 현궁. 봉분을 억새로 덮었는데, 오른쪽이 약간 함몰되었다.
태조의 첫 왕비는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1391년) 한씨로 본관은 안변(安邊)입니다. 이분은 공양왕 3년(1391년)에 승하해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묻혔습니다. 능호는 제릉(齊陵)이며, 정종을 비롯해 태종, 방우(芳雨), 방의(芳毅), 방간(芳幹), 방연(芳衍) 등 6남과 경신(慶愼), 경선(慶善) 두 공주를 두었습니다. 개풍군 옛 지도를 보면 제릉이 잘 표현돼 있습니다.
계비는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년) 곡산 강씨입니다. 태조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두었는데, 강씨가 바로 경처였답니다. 신덕왕후의 친정은 여말의 권문세족으로 조선의 개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소생으로 방번(芳蕃)·방석(芳碩)과 경순공주(敬順公主)를 두었습니다. 신덕왕후의 능이 정릉(貞陵)인데, 정릉 답사는 다음 기회를 기대합니다.
태조는 생전에 신덕왕후와 함께 묻힐 생각으로 미리 정릉에 자신의 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무시한 채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를 이곳 동구릉으로 모셨습니다.
▲ 정릉(신덕왕후 강씨의 능). 태종이 취현방(聚賢坊 현 영국대사관 자리)에서 양주 사을한(沙乙閑 현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하였다.
봉분은 밑부분에 화강암으로 12각의 호석을 두르고, 그 주위에 난간석을 둘렀습니다. 또한 병풍석 면석에는 구름무늬(雲彩)와 현릉에서 살펴본 것처럼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새겼습니다. 십이지상은 사람 몸에 짐승 얼굴을 하고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데, 머리 위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간지(十二干支)가 새겨져 있으나 오랜 세월 탓에 마멸이 심합니다. 병풍석을 비롯해 봉분 지하(地下)와 지상(地上)에 석물을 설치하는 것은 왕릉 이해에 필요하나 내용이 지루해 별도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난간석 앞에는 봉분을 둘러싸고 석호(돌호랑이)와 석양(돌양)을 각각 2마리씩 배치했습니다. 석호는 땅 위, 석양은 땅 속의 잡것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석호와 석양은 후대 왕릉과 달리 활달한 기상이 넘쳐 보였습니다. 특히 석호는 앞발을 턱 버티고 앉아 늠름한 기상을 느끼게 합니다.
봉분 뒤에는 동쪽에서 북쪽을 거쳐 서쪽까지 곡장(曲墻)을 둘러 봉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곡장 사이사이에는 둥글게 깎은 화강암 심을 박아서 곡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건원릉은 기본적으로 고려조의 현릉과 정릉을 따른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새로운 양식을 도입함으로써 일정한 변화를 주었습니다. 새 왕조의 창업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곡장 역시 조선시대의 능제에 새롭게 추가된 요소입니다.
봉분 앞은 3층으로 층이 져 상계, 중계, 하계를 이룹니다. 상계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망주석은 혼령이 무덤을 찾을 때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워 놓은 돌기둥인데, 제를 올릴 때 세호에 뚫린 구멍에 금줄을 친다고 합니다. 망주석 사이의 혼유석은 귀면(鬼面)을 새긴 고석 5개가 받치고 있습니다.
▲ 혼유석. 다섯 개의 고석으로 밑을 고였다.
▲ 장명등. 가운데 부분은 팔각집 형태로서 모서리마다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인방을 새겼다.
▲ 망주석. 연꽃 봉오리 밑에 여의두 무늬를 새기고, 그 아래를 팔각기둥 형태로 다듬었다. 세호에 뚫린 구멍으로 금줄을 친다.
상계보다 한 단 낮은 중계에는 좌우에 문인석과 석마(石馬)를 각각 1쌍이 놓여 있으며, 중앙에는 장명등을 설치했습니다. 다시 한 단을 내려와 하계에는 문인석과 열을 맞추어 갑옷과 투구 차림에 칼을 쥔 무인석과 석마를 각각 1쌍씩 배치해 능을 수호토록 합니다. 특히 석마는 모두 4발이 입체적으로 뚫린 형태입니다. 석마의 4다리를 모두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조각기법상 어렵기도 하지만, 각수(刻手)의 솜씨는 물론 당시 왕실의 재력 및 묘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합니다. 후대 왕릉의 경우에는 석마나 석양의 배를 막아서 네 발을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대신 막은 부분에 영지초를 새겨 넣기도 합니다.
▲ 중계의 문인석과 하계의 무인석
▲ 무인석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칼을 짚고 있다. 팔꿈치 부분의 나비매듭 모양 장식이 이채롭다.
▲ 문인석. 홀을 쥔 손이 보이지 않고, 가느다란 수염이 표현돼 있다. 여말선초의 관료 복장이 엿보인다.
▲ 무인석. 투구와 갑옷을 입은 전투복 차림이다.
첫 번째 왕릉답사인 헌인릉 답사에 참가하지 못했더니 진정임 선생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알아듣는 데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봉분 주위의 다양한 석물과 병풍석을 둘러싼 지대석, 초지대석 및 땅 속에 묻힌 석물까지 설명을 듣고 났더니……괜스레 턱이 얼얼하고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이게 한낮의 뙤약볕 때문만은 아니겠죠.
봉분을 둘러보고 답사팀은 진정임 선생을 따라 곡장을 돌아 능침 뒤쪽 소나무 그늘로 들어갑니다. 머리 위에서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라 나뭇그늘이 더욱 서늘합니다. 두 다리 쭉 뻗고 등산화 끈을 고쳐 맵니다.
이 자리는 앞에서 볼 때, 봉분 뒤에 땅이 불뚝 솟아오른 곳이다. 지맥(地脈)이 멀리 조산(祖山)에서부터 뻗어와 혈(穴) 자리에 맺히기 전에 용맥(龍脈)이 몸을 크게 뒤트는데, 우리가 앉은 자리가 바로 그 자리라는 겁니다. 이런 지형을 ‘잉’이라고 하는데, 15~30m쯤 된답니다. 진정임 선생은 ‘잉’에 5분만 앉아 있으면 몸에 좋다며 빙그레 웃습니다.
▲ 태조 능침 후경. 석호(돌호랑이) 4마리와 석양(돌양) 4마리가 현궁을 수호한다.
▲ 혈자리 바로 앞에서 용맥이 불뚝 일어선 '잉'에 대해 진정임 선생이 설명을 하고 있다.
‘건원릉신도비음기(建元陵神道碑陰記)’에 의하면, 동구릉의 지세(地勢)는 “장백에서 근거하여 2,000여 리를 꾸불꾸불 내려와 철령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여 수백 리를 내려와 백운산이 되고, 또 남으로 100여 리를 내려와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검암산을 이루었다.”고 설명합니다.(<조선조 왕릉문화의 이해> 23~24쪽)
또한 <건원릉지>에는 건원릉까지 이르는 내룡(來龍), 즉 지맥(地脈)은 “수락산으로부터 왼쪽으로 남행하여 불암산이 되고, 불암산으로부터 왼쪽으로 떨어진 곳에 강릉과 태릉을 조성하였다. 이 강릉의 청룡이 남쪽으로 꺾여 된 것이 사현이다. 이곳을 조금 지나 솟아오른 것이 검암산인데, 검암산으로부터 왼쪽으로 떨어져 능 뒤에 이르러 머리를 이루고 있다. 그 머리는 감(坎) 방향으로부터 들어와 검암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다. 능으로부터 약 3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위의 책, 24쪽)
▲ 앞줄 왼쪽부터 진정임 선생, 영식 등반대장, 항용, 윤만, 재만 현종 부인과 처제분
뒷줄 왼쪽부터 윤식, 재구, 재만, 용주, 태우, 발용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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