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계군 이심원의 제자 김공량(金公亮)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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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7-09-19 18:12 조회1,547회 댓글1건본문
주계군 이심원(1454~1504)
휘:심원(深源)
자:백연(伯淵)
호:묵재(默齋).성광(醒狂).태평진일(太平眞逸)
시호:문충(文忠)
증조부:효령대군 보
조부:보성군 합
부 :평성군 위
천성이 엄숙하고 강직했다.
일찍이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과 종유
하였으며 도학.문장이 당대에 뛰어났다.
안원군 김공량(金公亮, 1472∼1544)
안원군파의 파조가 되는 公亮(1472∼1544)은 안렴사공의 7세손이다.
자를 필지(弼之)
호를 양곡(楊谷)
증직으로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받았고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올라 안원군(安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공은 묵재이심원(默齋 李深源, 1454∼1504)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문과 덕행이 순결(純潔)하고 아름다웠는데,
연산조때 절제과로 등제하였으나 스승과 뭇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전시(殿試)에 나가지 않고
세사(世事)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고요히 지내셨다.
묘는 경기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고, 묘갈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짓고
동고(東皐) 김로(金魯, 1498∼1548)가 썼다. 정사룡의 문집 [호음잡고](湖陰雜稿)에 <유명조선국김군공량묘갈명>
(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이 실려 있고,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었다.
안원군의 묘갈을 書한 로(魯)는 우리 가문의 서운관정공파 희수(希壽)의 아들이며 당대의 명필로서, 이외에도 승지공
김공예(金公藝, 1485∼1537) 묘갈, 아버지 김희수(金希壽, 1475∼1527) 묘비를 書하였다.
**도 : 안원군(김공량) 묘
**도 : 안원군 묘갈 (정사룡찬, 김로서)
1520년(3자 주 8세) 기묘년 주계군 성광 이심원 공의 문인으로서 장차 사문(師門)에 앙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를 보지 않았다. 내구(內舅)인 충정공 허종(許琮) 상공께서 벼슬에
나아가도록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곤과 심정 등이 권력을 휘둘러 여러 현인들을 무고하여 죽였다.
매서이신 문강공 박세희(朴世熹)도 역시 화를 입었다. 이에 마침내 세간사에 뜻을 끊어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궤안(机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두지를 않았다.
1544년 5월 27일 판서공(공량)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송별하고 부의하는 뜻을 내리셨다. 9월 17일 모친 정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또 부의를 보내었다. 10월 20일에 고와 비를 여주 백양동 선영 안 정좌 벌에 합장하였다.
1546년 8월 15일에 선고비의 묘도에 비갈을 세웠다. 호음 정사룡 판서가 명을 짓고, 동종의 동고 김로 교리가 글씨를 썼다.
12월에 상기를 마쳤다.
김공망 [金公望] 자 위수(渭수)
이심원(李深源)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06년(중종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다.
사간원 ·사헌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어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심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5년 동안 선정을 베푼 뒤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문장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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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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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안녕하셨습니까
상기 안원군 내용을 본 홈 <안렴사공파란>의 주요 선조님 항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