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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簡易集) 의 몽촌 김수 관련시문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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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10-06 09:10 조회1,56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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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백(方伯) 김공(金公) 수(晬) 이 조남명(曺南冥)의 집을 방문하고 지은 시에 차운하다.

 

시내 따라 떠나는 걸음 더디고 더딘 게 당연하니 / 沿谿莫怪遲遲去

처사께서 당년에 이 집에 거 하셨음이로다. / 處士當年此着家

산고수장(山高水長) 그 풍도 흠모하러 찾았을 뿐 / 山水高長風可挹

학이나 매화를 구태여 보려고 온 것이 아니로세. / 不應在鶴在梅花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의 호가 남명(南冥) 임.

산고수장(山高水長): 영원히 전해질 고결한 인품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임.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 “구름 낀 산 푸르고 푸르듯, 저 강물 곤곤히 흐르고 흐르듯, 선생의 풍도 역시 산고수장(山高水長)이로세[雲山蒼蒼 江水泱泱 先生之風 山高水長]”라는 말이 나옴.


방백(方伯) 김자앙(金子昻) 수(睟)에게 바치다.


황화의 재주가 노씨보다 앞섬에 / 皇華才調是盧前

새로 지은 두 수의 시어 다시 아름답네 / 兩首新詩語更圓

푸른 바다 동쪽 끝에 와서 객을 전송함에 / 滄海東頭來送客

누 가득한 등 그림자 달과 밝음 다투누나 / 滿樓燈影月爭鮮


사월 초파일날 저녁 동루(東樓)의 전송하는 자리에서 상사(上使) 황송당(黃松堂) 윤길(允吉)이 지은 詩의 韻을 차하여 방백(方伯) 김자앙(金子昻) 수(睟)에게 바치다.


황화(皇華)의 재주: 황화는 본디《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인데, 사신으로 가서 시를 짓는 재주를 말한다.

노씨(盧氏): 당 나라 초기의 시인인 노조린(盧照鄰)을 가르 킨다. 당 나라 초기에 왕발(王勃), 양형(梁炯), 노조린, 낙빈왕(洛賓王)을 사걸(四傑)이라 칭하였는데, 양형이 “내가 왕발의 뒤에 있는 것은 부끄럽고 노조린의 앞에 있기는 어렵다.” 하였다.


출전: 간이집(簡易集)


최립 [1539~1612]

본관 통천(通川). 자 입지(立之). 호 간이(簡易)·동고(東皐). 이이(李珥)의 문인.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여러 외직(外職)을 거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 녀왔다.

1581년 재령군수(載寧郡守) 때 기민구제(飢民救濟)에 힘썼으며 1584년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 1592년 공주목사(公州牧使), 1593년 전주부윤(全州府尹) 등을 지냈다. 1594년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5년 판결사(判決事) 등을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러 사직, 평양에 은거했다.

국내외에서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시(詩)에 탁월하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고 문장은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나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글씨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 저서에《간이집(簡易集)》《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십가근체(十家近體)》가 있다.


황윤길 [黃允吉, 1536~?]

본관 장수(長水). 자 길재(吉哉). 호 우송당(友松堂).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 1567년 지평이 되었다. 1585년(선조 18) 황주(黃州)목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접견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반드시 내침(來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복명하였다. 이때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와 서로 상반되었으나, 조정은 동인(東人)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서인인 그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1592년 봄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그의 말을 좇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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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귀한 자료를 올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