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모가지'- 이유 같지 않은 이유
페이지 정보
김상석 작성일07-10-23 18:36 조회1,743회 댓글4건본문
'군수모가지'-단양의 구전 설화 ---#5
고삼(高三)이 막 되기 전 <학도호국단> 간부를 뽑는 날이었다.촌놈이 선도부장이 되었다고 한 해를 꿇고 같이 다니게 된 시골 동창녀석이 이른바 놀던놈 馬군의 집으로 무작정 나를 끌고 가 소주 한 잔으로 자축을 해 주었는데 마군의 집은 당시 일정지역(今 산본일대)에서 닭을 집하해 큰공장의 식당이나 치킨집에 대주는 닭공장을 하고 있었다.마군은 귀신같이 닭을 처치하더니 금방 털을 뽑고 손에 익은 듯 익숙한 솜씨로 삶아왔다.-마치 방과 후 해야하는 숙련된 일과처럼-----.
이야기의 발단은,닭이 나오자 동창녀석은 제일 먼저 닭의 꽁지부분을 뜯더니 나와 마군을 번갈아 보고 씨-익 웃으며 이게 '군수모가지다!'하고는 무턱대고 나에게 들이밀었다.지금도 그리 좋아라 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권하면 하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새벽을 알리는 동물이라 먹질 않습니다'라고 점잖게 빼기도 하고 원래부터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저 삶은 닭만 쳐다보며 계란을 까다말고 단양 친구녀석이 말한 <군수모가지>를 되뇌며 흐린기억 저편의 아득한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1975년, 초가을----
오늘은 우리학교에 도지사(道知事)가 오는날이다.아마도 행정적인 일로 예하 면사무소를 찾아오는 길인 듯싶은데 교장선생님과 친분이 있는 것인지 면장님에게 하달하거나 갑자기 특별히 지시할 전달사항이 생긴 것인지 그도저도 아니면 고충처리를 해줄 요량인지 알 수는 없었다.다만 도지사의 장거리 운송수단인 헬리콥터가 마땅히 뜨고 내릴 공간이 없었던 소재지에서 그나마 시야가 확보되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선택하였을 것이라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잡다한 게 중요할 리가 없었고 갑작스런 도지사의 방문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지서와 면사무소 직원들 그리고 예비군 중대본부와 방위병 형들의 군기든 모습과 함께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교내의 일사분란한 분위기에 잘 따라주는 도리밖에 임무가 별도로 하달되지 않았다.
이미 담임선생님께선 어제 아침 <자연학습>이라는 명목아래 단양우씨 사당(우 탁,역동선생 생가) 앞 개울가로 우리를 데리고 가 신발을 벗기고 남학생들은 웃통까지 벗으라 하시고 세수와 머리를 감으라고 하시고는 각자 조약돌 하나씩을 주워 가지고 때를 벗기라고 까지 하시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주번을 맡고있던 육학년 형들이 운동장 한복판에서 소사 아저씨(학교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H 字를 만들어 거기에다 석회를 깔고 있었던 것도 보았었는데 그 때까지도 조무래기들 어느 누구도 오늘의 일을 알 리 없었다.
두-두-두-두- 디옹-디옹 소리를 내며 날개달린 동체가 하늘에서 수직으로 천천히 하강하고 있다.금방 조회가 끝나고 H자를 피해 <신세기체조>를 마친 텅 빈 운동장에 바람이 일었다.교정의 플라타너스 잎 새가 고스란히 바람을 받아 펄럭거렸고 푸른빛을 잃은 잎들은 곤두박질 치다가 다시 솟구쳐 올랐고 <민방공 대피훈련> 때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그늘이 참 좋았던 측백나무들이 불규칙적으로 부채춤을 추며 사시나무 떨듯했다.
달달거리고 있던 창문 사이로 비행물체가 드러났다.
한참을 공중선회 하던 육중한 동체의 그림자 아래로 횟가루와 함께 뽀얀 흙먼지가 날렸고 거기엔 예비군 중대장과 면장 그리고 지서장,교장선생님이 차례로 마치 거수경례를 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흙먼지와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우리반은 교무실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도지사 이하 장학사들이 들어온 3교시 산수시간을 담임선생님이 예사낮춤의 어법으로 가르쳐 주셨다.방정식을 다루었는데 귀에 쏙쏙 들어왔다.
우리집은 양어와 양계도 겸했는데 고기는 주로 잉어였고 닭은 알을 제일 많이 낳던 레그혼이었다.오늘은 닭병(뉴카슬病)에 일곱 마리가 숨이 끊어져 땅에 묻은 것을 동네 갑출이(천간으로 이름을 지은 듯) 아저씨 일당(가끔 약을 타서 잉어도 죽었다고 몇 마리씩 챙겨감)이 꺼내 흙을 털고는 계륵(鷄肋)이 식기 전에 가야한다며 서둘러서 구워먹으러 갔다고 하셨다.
본래 알낳는 닭은 고기가 적고 이미 알을 낳느라 기력을 소진한 지 오래여서 식용의 가치가 없다.당시 촌엔 먹을 게 마땅치 않기도 했지만 닭병의 조짐이 보이면 죽기 전에 그냥 먼저 동네분들을 불러 차례로 나눠주기도 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닭을 한 마리 잡으셨다.식구들이 육식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의정부의 미군부대(今 카투사)에서 중사로 계셨던 아버지는 먼저가신 백부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할머니를 모시고자 전역을 하시고 곧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읍에서 제빵사업을 하시다가 다시 면으로 오셔셔 당시 예비군 소대장직도 맡고계셨다.
'지사는 잘 댕겨간나?'하시기에 어린 내가 보고느낀 바대로 자초지종을 소상히 말씀드리고 나니 닭의 꽁지를 가리키시며 이게 <군수모가지다!>라고 하시며 某郡을 찾은 도지사를 군수가 대접하는 자리에서 그만 제일 맛있는 '군수모가지'를 군수가 먼저 날름 챙겨 모가지(목을 속되게,좌천이나 옷을 벗는다는 의미)가 날라갔다는 일화를 들려주셨다.
어린 나는 군수모가지를 칠 수 있는 아까 본 도지사님이 헬리콥터에서 내리실 때 얼굴은 잘 모르지만 군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군현제도는 있었지만 학교에서 배운 관찰사나 암행어사가 아닌 도지사가 등장해서 최근의 일로 여기고 잠이들었다.
도지사가 떠났다.읍에서 다음날부터 시내버스가 들어왔고 사나흘 운행하다 끊겼다.우리동네 형과 누나들은 예전처럼 다시 걸어서 읍내 학교를 다녔다.내가 읍내 중학교엘 가자 누군가 차인태가 진행하는 <장학퀴즈>에 우리면이 나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전국 면단위 중 버스노선이 없는 곳은 어딜까요?'였다고 했다.나는 엿먹으라고 하며 화를 몹시냈지만 다 맞는 말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다음 해에 전근을 가셨고 그 뒤 5년 후에야 의자를 다 뜯어낸 마이크로버스(24인승을 50인승으로 개조,불법)가 읍내로 가는 면민들의 발이 되어 주었다.그나마도 충주댐의 물이 차면서 배를 띄울 수 없게되자 읍내로 가는 비포장 길에서 버스바퀴 자국을 한동안 볼 수 없었고 진등은 더욱 질퍽거렸고 동네는 더욱 더 고립되어 갔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마을들이 흩어져 일부는 도회지로 나갔고 차마 고향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은 가뜩이나 줄어든 농지를 껴안고 물을 피해 산으로 올라붙었다.소풍가서 보물찾기 하던 자갈밭이 처음으로 물을 받더니 마을이 하나 둘 서서히 추억의 그림자를 숨기며 물속으로 사라져 갔다.
시간이 흘렀다.이제와 자식을 키우는 아비로써 돌이켜 보니 농작물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집에서 기르던 가축은 그 숫적 손실과는 별개의 의미를 갖는다.어릴 적 간간이 생선비린내가 났지만 우리집 식구들은 육고기를 거의 손대지 않았었다.선군께서는 일찍 혼자되시어 큰아들을 먼저 보내신 할머니를 모시다가 그러셨을 것이고 선비께서도 생때같던 어린 형을 먼저 앞세우셨으니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당연히 피하셨을 것이라 사료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죽은 형에 대해서도 선군께서는 생애동안 침묵하셨으나 단 한 번도 잊고 사시질 못하셨을 것이고 선비께서는 이따금 봉분없이 묘를 쓴 곳이 어디라고 하시며 정확한 곳은 일러주시지 아니하시고 '니 아부지가 가끔 살펴보시는 눈치시다' '살아있으면 올 해 몇인데---'하시며 때로 삶을 되짚어 가셨었다.그때 어린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고 동무였다.
생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혼은 감히 만날 수 없다.다만 양친의 음성을 들으며 자랐고 그 음성은 가르침이었기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해가 바뀌면 더 선명해져 간다.
지금도 닭꽁지를 일러 무어라 말하는지 모르고 그냥 군수모가지라 부르고 싶은 이유같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뿐이다.
선군이시여! 삼백예순 날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당신의 음성을 듣고 새기겠나이다.해는 양(陽)이오니 선군께서 오가시는 것이라 여기며 그리 하겠나이다.아직도 수양이 덜 된 죄인인 아들이 속세에서 頓 首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 |
김윤식 |
---|---|
작성일 |
잠시 짬을 내 들어오곤 합니다.
장학사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군요.
하긴 환영받지 못하는 귀찮은 손님이 장학사뿐이겠습니까.
오늘은 가슴 찡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김윤만님의 댓글
![]() |
김윤만 |
---|---|
작성일 |
우와 대단한 문장이십니다.
제 어릴 적 모습과 대비하면서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물속에 잠겨 있는 단양의 한 마을, 그 중 한 집 속에 남아 있는 보석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맛있게 써주시니--잘 읽었습니다.
500년 쯤 뒤에 충주댐 물 속 어느 집에서 나온 물건에 <김상석>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본 홈의 이 글과 대응된 뒤 신문 기사가 된다.
코베이에서는?
행순님의 댓글
![]() |
행순 |
---|---|
작성일 |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