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안사연 정기산행 후기 -1-(태릉) 사진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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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7-10-24 15:14 조회2,051회 댓글5건본문
제47회 정기산행(제3차 왕릉 답사) 후기 - 1 -(태릉)
사적 제201호
제47회 안사연 정기산행은 제1차 헌·인릉 및 선·정릉 제2차 동구릉에 이어 제3차 태·강릉, 정릉, 연산군 묘를 답사하기로 하였습니다.
2007년 10월 14일(일요일) 09:30시 약속장소인 태릉 매표소 앞에는 영환(문) 대부님 내외분·발용(군)·상석(제)·상용(안)·영식(안)·은회(익)·준용(안)·태영(군)·태우(군)·항용(제)·윤만(문)·안동인 권호순 시간의 물레 사장이 시간에 맞춰 모였고, 지난번 동구릉 답사 때 명 해설로 우리의 역사적 안목과 인식을 한껏 높여 주었던 진정임 해설사 님과 반가운 인사를 나눴습니다.
답사가 시작되기 전 진정임 해설사께서 이번에도 자비(自費)로 만든 태·강릉과 정릉관련 조선왕조실록 발췌문을 나눠주시고 임진왜란 때 왜적이 태릉을 파헤쳤다는 역사적 사실 등을 실감있게 설명해 주셨는데 오늘 우리의 답사일정을 듣고 일정이 너무 빡빡하고 점심 장소 등은 이동상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하여 태·강릉→중식(불암산 선공회관)→육군박물관→연산군 묘→정릉 순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답사하기로 하였습니다.
▲ 안사연의 산행 및 답사는 힘찬 파이팅으로 시작한다.
▲ 전문 해설사 진정임 선생으로부터 태ㆍ강릉의 대략 소개를 듣고 있다.
이쯤해서 영식 등반대장은 사업상의 일로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지고 태릉 답사를 마칠무렵 상석님이 합류하여 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답사하고자 하는 태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황후 윤씨의 능이고,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드님인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며,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입니다.
왕비와 함께 묻히지 못한 조선 왕릉은 (1)태조의 건원릉 (2)단종의 장릉 (3)중종의 정릉이라고 정리하여 설명하고, 원래 중종의 능은 서삼릉 구역 내에 있는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와 함께 희릉에 묻혔으나 문정왕후 자신이 함께 묻히려고 봉은사 주지 보우대사와 의논하여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긴 것이나 정릉 일대의 지대가 너무 낮아 장마철이면 제물을 배로 실어날을 정도여서 뜻을 접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정왕후는 보우대사를 신임하여 승과를 신설하는 등 불교중흥에 국고를 많이 사용하였다고도 하지요.
문정왕후는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른 아드님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임금이 되신 아드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릴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하여 명종께서는 어머니이신 문정왕후의 목소리만 들어서 벌벌 떨 정도였더랍니다.
이렇게 우리는 문정왕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기행을 계속하였습니다.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폐비 윤씨사건의 전말이 밝혀져 발생된 갑자사화, 중종 때 위훈삭제사건으로 발생한 기묘사화 그리고 명종 즉위년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친정 오빠 대윤 윤임과 제2계비 문정황후의 친정 동생 소윤 윤원형의 외척간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발생한 을사사화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끊일 줄 몰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태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너머로 문정왕후의 능침이 눈에 들어옵니다.
▲ 태릉 가는 길.
▲ 금천교
진정임 해설사님은 태릉안내판 앞에 서서 문정왕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 홍살문 대석 앞에 서서 홍살문 기둥을 타고 내려온 물이 잘 빠지게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과 물이 다 빠지지 않게 약간의 물이 고일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는 그야말로 전문가의 해설없이는 간과하기 쉬운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 대석에 배수 구멍이 보인다.
박석이 깔린 참도는 약간 높은 신도와 약간 낮은 어도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양옆에 박석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도를 따라 정자각 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우측에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 비각 옆에는 또 다른 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대석 군이 있었고 이러한 지대석 군은 강릉에도 있다고 합니다.
▲ 판위. 임금의 능행 시 절을 하던 곳이다.
정자각에는 혼령이 다니는 신계와 능제 참례자가 오르는 동계가 있는데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 먼저 오르고 왼발 갖다 붙이고 오른발 오르고 왼발 붙이고 이렇게 오르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각자 그렇게 한 번 하면서 오르라고 주문합니다. 우리 모두는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초등학생이 선생님 말씀을 따르듯이 그렇게 하면서 정자각에 올랐습니다.
▲ 태릉 정자각.
▲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동계를 오르는 답사팀
▲ 정자각 문을 통해 본 문정왕후 능침
진정임 해설사님은 장례를 치를 때는 달을 넘겨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초하룻날 돌아가신 분은 장례일까지 기간이 너무 길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예법을 따르지 않고 돌아가신 달에 장례를 치루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환장’이라고 한다며, 오늘날 ‘미치고 환장하겠다’고할 때 ‘환장’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명과 남녀가 결혼을 할 때는 육례(혼담·납채·납기·납례·대례·우귀)를 갖추어 혼인을 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육례를 갖추지 않고 치루는 혼인을 ‘야합’이라고 하며,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야합’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새로운 지식 습득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문정왕후 비각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다른 왕릉과는 달리 비각의 안내판을 비각 문 앞에 고정시켜 놓아 능비를 한 눈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비문 전면을 살펴보니 ‘조선국 문정왕후 태릉’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즉 어느 때 ‘조선국’이라고 쓰고 어느 경우에 ‘유명 조선국’이라고 쓰느냐는 질문이 그것이었습니다. “유명 조선국은 명나라에서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다” “그게 아니다” 하는 양설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작년이었던가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에는 문충공 양촌 권근·문경공 지재 권제·익평공 소한당 권람의 3대묘를 답사한 적이 있었는데 려말선초에 걸쳐 관직에 나아가신 권양촌 묘갈에는 ‘조선국’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의 묘갈에는 ‘유명 조선국’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자주성 여부의 표현이 아닌가하는 생각들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조선국’으로 시작하는 능비를 보니 그 또한 그렇지 않다는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태릉의 수복방. 담장이 건원릉에서 본 꽁떡담장이다.
▲ 비각
▲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태릉 표석
▲ 궁궐 지킴이. 전문 해설사 진정임 선생.
우리는 다시 산신석과 정자각 바로 뒤에 있는 신교(神橋)와 신로(神路)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감을 거쳐 사초지를 올랐습니다. 능원은 장대석으로 3단 구분이 되어 있고 상단에는 능침이 곡장 안에 망주석과 석양과 석호의 호위를 받으며 병풍석 및 난간석에 둘려 쌓여 있습니다. 그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이 자리잡고 있고, 중·하단에는 문인석과 석마, 무인석과 석마가 각각 1쌍씩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석양·석마도 배와 다리 부분이 메워져 있는데 이것은 미숙련 석공이 조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숙련된 석공은 배와 전·후·좌·우 다리사이를 모두 파내어 조각한다고 합니다. 능침의 병풍석은 인석·만석·면석·우석·지대석·초지대석(땅속에 묻힘)으로 되어 있는데 인석은 통상 6자이나 4자짜리도 있다고 하며, 문양은 규화(葵花 해바라기)입니다. 인석의 문양은 규화 외에 연꽃과 모란이 있다고 합니다. 면석과 좌우 우석의 문양은 구름모양(운채)이며, 면석 중앙에는 방위가 표시된 통천관을 쓴 십이지신이 새겨져 있는데 태릉의 방향은 임좌입니다.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에는 영저(靈杵)와 영탁(靈鐸)의 문양이, 성종의 선릉 이후에는 운채(雲彩) 문양인데 인조의 장릉에는 모란 문양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 능침에서 바라본 정자각
▲ 병풍석 면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상을 새겨 놓았다.
▲ 태릉의 인석. 봉토안으로 여섯자가 묻혀있다고 한다.
▲ 봉토를 받치는 만석 중간에 새겨넣은 亥자. 해는 북서북을 뜻한다.
혼유석 위 바닥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는데 돌을 다루는 전문가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징으로 돌을 쪼게 되면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서 그 표면이 들뜨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망주석에는 세호가 붙어있는데 통상 우주상행(右柱上行), 좌주하행(左柱下行)의 규칙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망주석에는 우주·좌주 모두 상행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병풍석과 난간석 사이의 박석이 밀려나와 동자석주까지 밀리게 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설명이 이어지기를 통상적으로 왕의 즉위는 선왕의 승하하신 직후 상중에 보위에 오르기 때문에 상복을 입은 채로 즉위식을 거행하였으나 중종의 경우는 반정으로 본인이 보위에 오를 줄 모르는 상태에서 보위에 올랐기 때문에 곤룡포와 익선관을 쓰고 즉위하였고 합니다. 인조의 경우는 반정 전에 본인이 왕위에 추대되었음을 알고 있어서 중종과는 달랐다는 설명이었습니다.
▲ 태릉침 후경
▲ 문정왕후 능침 전경
또한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명종 18년(1563) 1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2년 뒤 모후이신 문정왕후 마저 승하하였으며, 또 그 2년 후 명종 자신이 승하하였습니다. 명종은 외아들과 어머니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부왕의 능을 천장한 후 어느 것 하나 되는 일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말하였다고 합니다. 순회세자의 무덤은 순창원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 30-1 사적 제198호로 서오릉 구내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태릉 답사를 마치고 최고의 기대치를 갖고 비공개 능인 강릉을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강릉은 비공개 능이기 때문에 태·강릉관리사무소에서 관리인 한 분을 따라 붙여서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 예정시간을 넘겨 강릉으로 향하다보니 기다리다 못한 그 분을 되돌아오게 하는 수고로움을 끼쳐 드려 참으로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강릉은 태릉에서 직 코스의 샛길이 있는데 그래도 1.7km나 떨어져 있고 산등성이에는 휴식처(제2관망대)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태릉선수촌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뛰어서 불암산 정상까지 오른다고 하는데 이곳이 그 Closs 코스로 제2관망대-제1관망대-불암산 정상이라고 합니다.
[제가 최근 바쁘다보니 후기가 늦어져 죄송합니다. 그리고 두서없이 적다보니 잘 못 듣거나 이해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정정해야 할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즉시 정정하겠습니다.]
댓글목록
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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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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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들었어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는데 이렇게 정리를 해주시니 한 눈에 쏙 들어옵니다.
후기를 복사해서 저장해 두어야겠습니다.
김영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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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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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신중에도, 복습을 위한 노력에 감사 드립니다.다음달은 안동에서 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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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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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가 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대부님, 자세한 설명 덕분에 눈에 그려집니다. 감사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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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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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재미있고 섬세한 후기 기록에 감사드립니다. 또 사진 촬영, 포토샵 보정 작업, 사진방 올리기, 원고 속에 재 편집하기---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멋진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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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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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후기와 사진 정말 완벽합니다.네티즌들이 많이 퍼가겟습니다.함게하는 수업 속에서 하루하루를 꼼꼼하게 사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많은 걸 본받게 됩니다.스승이 많아서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