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안사연 정기산행 후기 -2-(강릉·육군사관학교·연산군묘) 사진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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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7-10-24 23:56 조회3,127회 댓글6건본문
제47회 정기산행(제3차 왕릉 답사) 후기 -2-(강릉·육사·연산군묘)
사적 제201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223-19
우리는 그 1.7km의 길을 걸으며 휴식처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신도비의 귀두는 목을 길게 빼서 목 위로 돌려 뒤를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 연흥부원군 부인의 90일간의 장례일기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 연안김씨 집안과 관련된 ‘조강지처’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 명종은 현대판 ’마마보이‘이라 할 수 있으나 서원의 사액화가 공적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삼육대학교 위에 위치한 강릉 위쪽에 도착했습니다.
▲ 강릉 능침 후경
명종(1534~1567, 재위 : 1545~1567)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중종 29년(1534)에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545년에 이복형 인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는데 즉위 후 8년간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외척을 견제하고자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하였고 1567년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인순왕후(1532~1575)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551년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으며, 명종이 승하하여 중종의 7번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이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하였다가 선조 8년(1575)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능원은 장대석으로 3단 구분이 되어 있고 동원쌍봉릉(쌍릉)인데 능침을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이어서 연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왕과 왕비의 능사이가 아주 좁게 조성되어 인석과 인석이 부딪칠 정도로 가깝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병풍석의 문양은 태릉과 동일해 보였고, 곡장으로 둘려진 능침 주위에는 석양, 석호 등이 호위를 하고 있고, 능침 앞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의 석양·석마도 배와 다리 부분이 메워진 조각을 하였습니다.
▲ 강릉 능침 전경
▲ 면석 중앙의 사람 형상. 머리부분에 12간지가 새겨져있다.
▲ 강릉의 병풍석 및 난간석. 왕릉과 왕비릉을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하였다.
▲ 강릉의 문ㆍ무인석
▲ 능침 주위의 석양ㆍ석호
사초지 아래에는 부속건물인 정자각,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 산신석, 비각, 홍살문 등이 있습니다.
강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참도의 박석 사이사이에 핀 이끼였습니다. 녹색과 붉은 색깔이 어우러져 하나의 미술작품을 보는 듯 하였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다울수가 있습니까? 그동안 비공개릉으로 인간의 발길이 끊어진 곳 그곳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 그곳엔 자연의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 참도와 박석사이에 붉은 이끼가 자라고 있어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곳임을 알 수 있다.
▲ 태릉에서 산길을 따라 강릉 답사를 시작한 탓에 홍살문과 금천교는 제일 마지막에 지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태·강릉 답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동행하였던 상용님과 종형제간인 준용님으로부터 71사단 관할 불암산 입구 선승회관에서 오리고기 바비큐로 점심을 대접받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암산을 바라보며 선승회관에 도착하였는데 선승회관은 군부대에서 직영하는 회관이었습니다. 이곳의 음식은 역시 전국에서 내놓아라하는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인지라 음식이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럽고 맛이 좋았습니다. 오리 바비큐를 안주로 소주를 반주삼아 밥 한 공기 금새 비우고 추가 밥까지 청하여 정말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 중에 상용님의 제안이 모처럼 태릉에 왔는데 육군사관학교를 안내해 주겠다고 제안하십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우리가 평생 언제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쌍수를 들어 대환영이었지요. 정릉은 후일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과 묶어서 답사하기로 하고 육군사관학교로 향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 들어서니 웅장한 모습의 전망대와 육군박물관 그리고 졸업식 때 열병과 분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랑연병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맹호부대 파월훈련 도중 부하 장병이 떨어뜨린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수많은 부하장병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한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서있는 육군박물관을 먼저 방문하였습니다. 육군박물관에는 군 박물관답게 각종 무기류와 전쟁과 관련된 유물과 서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진품 전시물로 보물 제391호 ‘부산진 순절도’·보물 제392호 ‘동래부 순절도’·보물 제861호 ‘불랑기자포’를 관심있게 관람하였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집무실 또한 우리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박물관 밖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전용차와 맹호부대가 월남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한 '안테패스 전승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 보물 제391호 '부산진 순절도' 와 보물 제392호 '동래부 순절도'
이어서 육사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육사기념관 위에는 육사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64m로 건축한 육사교훈탑이 우뚝 서있고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에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오늘 날씨가 그런대로 쾌청하여 북한산·도봉산·불암산과 그 품안에 깃들어 있는 태릉을 멀리서 조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 육사 상징탑(智 仁 勇 탑)
▲ 상징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태릉
우리 일행은 예정시간을 넘기면서 육사의 이모저모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화랑연병장으로 이동 단체 기념 촬영을 하였습니다. 점심 대접과 함께 육군사관학교를 안내해 주신 상용(안)님에게 우리 일행의 마음을 담아 이 홈페이지를 통해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 화랑 연병장
▲ 화랑연병장에서
<연산군묘(燕山君墓, 제10대 연산군, 거창신씨)>
사적 제362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이곳은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燕山君, 1476~1506)과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1472~1537) 등이 안장된 묘역입니다.
방학동 신동아아파트에서 그린파크로 넘어가는 고개 직전 좌측 110m 지점에 거대한 은행나무와 함께 위치하고 있는데 묘역 뒤편으로는 버스가 다니는 2차선의 도로가 뚫려 도봉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기맥이 끊긴 형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위치의 묘역 상단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가 쌍분으로 되어있고, 가운데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 하단에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과 딸의 묘가 쌍분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임금이 되었지요. 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사화(무오·갑자)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1506년 신하들은 왕위를 박탈하여 연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추방 하였으며, 중종 임금을 새로 추대하였습니다. 그 해 연산군은 (화)병이 들어 강화도에서 31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7년 후인 1513년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묘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담장이 둘러져 있고 장대석으로 상단과 하단을 구분하였으며, 봉분이 있는 상단에는 묘갈 각 1기(연산군·거창군부인 신씨), 상석 각 1기, 망주석 각 1기씩 배치되어 있고, 하단에는 가운데 향로석, 장명등이 각 1기, 좌우에 문인석 2쌍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 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고 합니다.
▲ 연산군 묘 전경
연산군 묘갈은 ‘연산군지묘’ 부인의 묘갈은 글자를 판독할 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산군 상석은 어찌된 영문인지 상석 중앙부분이 반 토막으로 깨어져 있어 보기가 좀 민망하였습니다.
▲ 연산군 묘의 석물
▲ 연산군묘 후경
그 다음 묘는 진정임 해설사님에 설명에 의하면 태종의 후궁 또는 세종의 후궁으로 추정된다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입니다.
▲ 의정궁주 조씨의 묘. 윗쪽이 연산군 묘
▲ 의정궁주의 묘비를 살펴보는 답사 일행
- 태종이 총애하던 명빈 김씨가 돌아가시자 후궁을 얻었는데 미모가 부족하여 궁주로 두었다하여 태종의 후궁이라는 설.
- 세종에 대한 기록에 의정궁주라는 후궁이 있으므로 세종의 후궁이라는 설.
- 연산군은 거창신씨와의 사이에 2남1녀, 후궁 조씨와의 사이에 2남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 모두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습니다. 바로 이 후궁 조씨의 묘가 연산군 묘역에 있다는 설. 그러나 ‘의정궁주 조씨지묘’라는 묘표의 '궁주'라는 용어가 성종조 이전에 사용되었던 용어이므로 연산군의 후궁이라는 설은 틀린 것이 아닌가 한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현재 문화재청에서 확인작업과 함께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환 대부님의 의견은 명빈 김씨는 우리 안동김씨 안정공파 파조이신 김구덕의 따님으로 태종의 후궁으로서 태종 사후에도 장수를 하셔서 성종조까지 사셨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명빈 사후 태종의 후궁 설을 바르지 않다는 의견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종의 후궁에 의정궁주가 있다면 세종의 후궁이 맞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의정궁주 조씨의 묘는 거의 방형에 가깝고 전면과 좌·우 양면은 돌로 호석을 둘렀습니다. 그리고 장대석으로 상·하단을 구분하였으며 상단에 봉분·묘갈·상석이 있고 하단에 문인석 1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 맨 아래쪽에는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과 딸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땅은 능성구씨 문중의 소유로 연산군은 사위 집안의 땅에 묻힌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 연산군 사위 구문경과 딸의 묘.
묘역은 장대석으로 상·하단 구분을 하였고 상단에는 쌍분·묘갈 1쌍·상석 1쌍이 있고, 하단에는 가운데 향로석과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묘갈에는 ‘능성구공지묘’ ‘전주이씨지묘’가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진정임님은 한 눈이 아니라 반눈으로도 연산군 묘역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며 우리를 연산군 묘역 앞에 있는 신동아3단지아파트 옥상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옥상에 올라서니 연산군 묘역이 정말 한 눈에 보일뿐 아니라 멀리 북한산·도봉산·수락까지 휘둘러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며, 인근에 있는 세종대왕의 공주이신 정의공주 의 묘역과 재실까지 들어옵니다.
▲ 신동아 아파트 옥상에서 바라본 연산군 묘역. 도봉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 있다.
▲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와 사위 안맹담 묘역
이제 오늘 하루도 날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바쁜 일정을 강행군하다보니 아직 김밥 한 박스가 남아 있어서 인근 가게에 들려 막걸리를 조달하여 김밥을 안주 삼아 오늘 하루를 feedback하여 봅니다. 즐겁고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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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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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두분 덕택에 편히 앉아서 좋은 공부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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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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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참석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보고 싶었던 곳이라 아쉬움이 크지만, 자세한 설명과 멋진 사진 덕분에 마치 다녀온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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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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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글과 사진 끝내주십니다.
마지막 파노라마 사진을 보며---수도서울의 외곽을 비추던 찬란한 태양도 능선을 베개삼아 쉬려하는지 고개를 숙이며 산을 넘고 있는데 연산은 잠들어 무얼 말하려 한다. 연산! 그대가 꿈꾸던 세상도 그나마 아우인 진성대군을 살려 한참을 더 내려오다 스러져 갔다오. 열성조의 무덤을 살피다가 찾아온 당신의 자리를 보니 허무한 마음이 드는구려. 무엇이 그리 급하여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고 한꺼번에 작살을 내다가 이지경이 되었소? 후세의 왕릉을 크게 써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고 흥분해서 무덤을 뛰쳐 나오지도 마시오. 반듯한 정자각도 없으니 열성조께서 혼유석으로 쓰고있는 여기 상석이 수랏상인 듯 싶어 다시 찾아와 술 한 잔 붓고 시공을 초월해 거룩한 분노를 말하다 가는 것이라오.임제가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잔잡아 권할이 없어---"라고 심경을 토로하며 슬퍼 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조선의 담벼락을 넘어 어떤 청년이 찾아와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갔다고만 전해주오!
김상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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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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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답사한 것보다 더 생동감이 있는 글과 사진입니다. 별로 한것도 없는데 과분한 칭찬 감사 합니다
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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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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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정말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사진과 글을 볼 때마다 느껴집니다.
동행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용님께서 대접해주신 그날 먹은 오리고기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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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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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사진과 어울려 멋진 산행기가 되었습니다. 윤만 대부님, 발용대부님, 고생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