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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김시양문집(1)-충렬록을 읽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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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11-24 12:40 조회1,4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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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김시양선조님께서 충무공 김응하장군의 이야기가 실린 <충렬록>을 읽고 나서 쓰신 글입니다.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인이야기, 기생과의 이야기, 김경서 이야기, 신경진의 부하일 때 좋은 신을 남에게 주어버린 일, 하담께서 준 종이로 종이옷을 만들어 입은 이야기, 청빈했던 삶 이야기 등 등--

 

*출전 : 하담김시양문집(2001년. 하담문집발간추진위간. 312P)

 

*충렬록을 읽고서-독충렬록(讀忠烈錄)

 

 나는 공(公)에게는 문중사람인데, 나는 종성(鐘城)에서 욕[유배]을 당하고 있었고 공(公)은 북방의 막료를 도왔으므로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아, 매번 사냥하는 여가에 혼자 말을 타고 다녀가곤 했다. 꼭 두 번으로 기억되는데 그렇게 최촉을 해도 잠을 자고 나서 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公)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공(公)이 서쪽 요새로 나가고 나는 남쪽(영해)으로 유배지를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공이 나라를 위하여 전사(戰死)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나무에 이는 바람소리에 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공의 불행에 조의를 표했다. 다행히 나는 공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기에 충렬록(忠烈錄)이 나왔다기에 남에게 구해서 읽어보았다. 그 포상되어 높인 것은 지당하나 또한 사실과 틀린 말도 있었다. 이것이 어찌 공의 뜻이겠는가.

 삼가 공에게서 귀로 들은 것을 공을 위하여 짓는다. 공(公)의 부인(夫人)은 박상국(朴相國․주: 相國은 재상을 뜻함)에게는 외종모(外從母)가 되며, 박상(朴相)도 공(公)을 알고 있다. 아마 공(公)이 부인을 맞을 때가 활쏘기 시합하는 날에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공(公)의 효도와 우애는 집안에서 뛰어나서 고을에서는 충성과 신의로 행동하였다. 박상(朴相)이 공(公)을 안 것은 여기서였지 활쏘기 재주를 보고 난 끝이 아닌 즉, 이는 장부(丈夫)라고 하기에는 평범하다.

 공(公)은 일찍 부모를 잃어 고독했으면서도 외로운 고통을 모른 채 공부를 하였고, 더 성장해서는 활쏘기와 말타기로 몸을 일으키고, 지략(智略)을 스스로 기약하였으나 병서(兵書)에는 부지런히 하지 않은 나머지, 병법(兵法)을 배우지는 못했다.

 완산(完山) 기생을 만나 아들을 두었다고 했는데, 나는 그 어미와 아들의 이름이 누구인지 미처 묻지를 못했지만, 공(公)이 완산(完山)에 아들을 두고 있음은 잘 알고 있다. 그 아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는 모르나, 만약 혹시 살아 있어도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데, 공(公)의 본심은 아니다.

 공(公)은 일찍이 절도사의 명령으로 행영(行營)의 동쪽과 남쪽 두 문의 누대 망루를 고쳐지었는데, 방어하는 도구가 되기에 아주 크고 웅장하였다. 그런데 성을 쌓는데 감독했다는 것은 공(公)이 한 일이 아니다. 충성과 신의로써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 공(公)의 평생의 일이었는데, 전기[傳]를 지은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박하게 대접을 했을까.

 공(公)은 우후(虞侯)이고 김경서(金景瑞․주: 1564-1624 무신. 자 聖甫. 본관 金海. 시호 襄毅)가 즉 병사(兵使)였다. 경서(景瑞)는 강인하고 사나워 스스로 많이 부리므로 아래 무리들과 더불어 서로 잘못되는 것은 공(公)이 오직 바르게 고치어 즐겁게 조화시키며, 굽히지도 않고 미움도 받지 않아 사람들이 어렵게 여겼다.

 공(公)은 일찍이 들에서 풀을 베는 감독을 하였는데 풀을 쌓는 사람들이 공(公)이 사랑하는 기생집으로 물건을 혹시 잃게 할까 하여 관(官) 가까이에 쌓을 것을 부탁을 하였다. 이에 공(公)은 거짓을 진짜로 하기 어려우므로 관(官)으로 모두 실어오게 급히 명령하여 그 집에서 호소를 해도 또한 들어주지 않았다. 공(公)은 이와 같이 사심이 없었다.

 공(公)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추성(楸城)의 반자(半刺․주: 判官.縣監)일때, 신경진(申景禛․주: 1575-1643. 문신. 자 君受. 본관 平山. 시호 忠翼)은 부사(府使)였는데, 자못 청렴하고 간소하였습니다. 나는 마침 좋은 신발을 얻어 아끼면서 신었습니다. 그런데 조사(朝仕․주: 아래 동료가 아침마다 으뜸벼슬아치에 뵈는 일)때 마다 항상 신공의 눈이 나의 신발로 가니, 나는 즉시 물러 나와 신발을 벗어 남에게 주어 버렸습니다」고 하였다. 그렇게 빙벽(氷壁․주: 청빈함)함을 스스로 법으로 삼았음을 대략 알 수 있다.

 공(公)은 북영(北營)에 있다가 삼수군수(三水郡守)로 왔는데, 삼수(三水)는 담비굴이었지만, 공은 겨울을 지낼만한 한 벌의 옷이 없어, 종이로 옷을 만들려고 했으나 역시 얻을 수가 없었다. 내가 종이 네 권을 주자, 공은 즉시 풀로 종이 옷을 만들어 바람을 막았으니 그 청빈한 괴로움이 어떠했을까.

 공이 남쪽으로 돌아오게 되어 나는 경계 상에서 서로 만나 전별하기로 했는데, 마침 병을 얻어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공이 길에서 지내는 제사 자리에 도착해서 내가 병중에 있다는 것을 듣고, 즉시 말을 돌려 30리를 달려와서 나의 손을 잡고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격려하며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지금 돈이 많은 사람은 지위가 높다고 하는데, 공(公)의 재주는 충분히 스스로 분발할 수 있는데 저자에서 등짐지게에 돈을 움켜쥐지 못했구려. 원래대로 옛 명망이구려」하였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공의 말씀은 약석(藥石)입니다. 천천히 살펴보시면 어기지는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후에 공(公)은 여러 차례의 심의에서 순조롭지 못하여, 관(官)이 군수(郡守)에 멈추었는데, 그것이 스스로 수립한 것인가 또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내가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고 남은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감히 숨겨진 역사를 남겨 두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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