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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충렬공 및 냉평국대부인 시제 참예 보고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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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윤식 작성일07-12-02 12:48 조회2,339회 댓글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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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제 참예는 17일(토)과 18일(일) 이틀에 걸쳐 진행되고, 첫날 행사가 많아서 3차례로 나누어 보고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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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충렬공 및 냉평국대부인 시제 참예 보고_01

■일시 : 2007년 11월 18일(음 10월 9일)
■장소 : 충     렬    공 -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능골(음수재)
            냉평국대부인 - 경북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상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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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충렬공과 냉평국대부인 시제 봉행은 때마침 일요일이라 평소보다 많은 종친들께서 참석하실 것으로 기대가 컸습니다. 안사연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토요일에 내려가 시제 전날 음수재에서 펼쳐지는 분정과정은 물론 제례 준비며, 저녁 시간에 오순도순 이어지는 정겨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참석자와 차량 편을 고려해 1진은 영환 종친 차량으로 오전 7:20분 잠실종합운동장역 근처에 모여 회곡동으로 출발했습니다. 2진은 윤만 종친 차량을 이용해 11시 정각에 안동으로 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주에서는 주회 종친께서 고속버스 편으로, 대구에서는 대구청장년회장이신 은호(黙항) 종친을 비롯해 재만 종친(전 대구청장년회장, 현 고문)과 정중 종친께서 각각 출발해 상락재와 영호루에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해마다 매번 시제 전날 음수재에 도착하시는 용주 종친께서는 아마도 이 시간쯤 능골에 와 계실 것 같았습니다.

제1진은 우선 회곡동으로 들어가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세우셨다는 고산정 터를 탐색한 다음 영남 3대 정자 가운데 하나인 영호루를 들르기로 했습니다. 07:45분경 만남의 광장에서 영윤 종친과 발용 종친이 합류한 다음 08:25분 여주휴게소에서 육개장으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습니다. 09:10분 다시 여주휴게소를 출발, 10:50분에 무사히 서안동IC에 도착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는 토요일부터 날씨가 추워지고 흐릴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조금 걱정했는데,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얼마쯤 내려왔더니 포근한 햇볕이 밝게 내리쬐는 겁니다. 다 조상님들께서 어여삐 여기시고 돌보신 덕분인가 봅니다.

연전(年前)부터 안사연에서는 능골과 회곡동으로 가는 전자지도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실험 삼아 회곡동으로 가는 전자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서안동IC에서부터 발용 종친께서 사진을 찍느라 연신 고생입니다. 서안동IC(10:50분)를 빠져나오면 곧바로 3거리(10:52분)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도로표지판을 보고 <안동> 방향으로 우회전하시면 됩니다.[좌 예천・풍산(34번 국도) / 우 안동(34번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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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안동인터체인지. 이곳에서 회곡동 상락재까지 자동차로 15분 정도 거리이다. 마음은 벌써 회곡동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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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계평로>로 이어진다. 왼쪽 도로는 하회마을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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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도로표지판의 <계평> 방향으로 다시 우회전, 10:56분 ‘계평’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송야4거리>로 서안동IC에서 약 5km입니다. 직진하면 <송야천교>를 건너 안동시내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회곡동으로 들어가는 길은 <송야4거리(10:52분)>에서 좁은 도로로 우회전해서 송야천을 따라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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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송야천 4거리>가 나온다. 송야천 다리 앞에서 우회전해서 좁은 길로 들어가면 회곡동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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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동IC에서 회곡동 들어가는 길(소요시간 약 10~15분)
서안동IC → (오거리에서) 이정표 <안동向>을 따라 우회전 → 또 <안동向>을 따라 우회전 → 평면사거리(신호등 있음.) → 계평로(924번 지방도) → 이정표 <(좌)서후면 봉정사>, <(우)계평로>에서 <계평로>로 우회전 → 송야4거리(바로 앞에 ‘송야천교’ 다리 있음.)에서 좁은 길로 우회전 → 송야천을 따라 회곡동 상락재까지 2차선 외길 → 회곡동 도착

경치가 아름다운 2차선 뚝방길로 10여 분이면 회곡동 상락재(11:03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경치를 감상하며 이 길을 따라가다 새로 뚫린 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면 강 건너편에 유달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산이 마암(馬巖)입니다. 그 왼쪽(상류)으로 아름다운 정자가 있고, 오른쪽(하류)으로 약간 내려오면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무술 연마를 하셨다는 ‘상락대(上洛臺)’입니다. 이곳이 충렬공 할아버지를 연모하였다는 ‘상락 낭자’와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직접 심으셨다는 ‘상락대 부추’ 전설이 전해지는 장소입니다. 그 아래는 깎아지른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상락대에서 내려다보면 눈이 아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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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곡동 입구에서 건너다본 상락대.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마암으로 그 아래쪽 펑퍼짐한 곳이 상락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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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락대 표석

11:05분 상락대 앞마당에 차를 세우고 마중 나오신 재경(在항) 종친을 비롯해 재회(會항) 종친 및 봉회 종친과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안사연에서는 2005년 12월 3일 영환 종친과 태우 종친의 제의로 상락재 건너편 안산(案山)에 있는 ‘충렬공유허비 옛 좌대’를 상락재 앞 화단으로 옮긴 다음, 이듬해인 2006년 11월 5일 자그마한 ‘충렬공유허비 옛 좌대 해설비’를 세운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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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곡동 상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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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곡동 충렬공 유허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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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안에 충렬공 유허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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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서 본 충렬공 유허비. 유허비 글씨는 대학자 이상정 선생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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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 유허비각. 이곳에서 위쪽에 있는 단층 슬라브 건물이 풍산읍 회곡리 마을회관이다.

▶▶ 회곡리 충렬공 유허비 좌대 이건행사 보러가기(클릭하세요)

▶▶ 충렬공유허비 옛 좌대 해설비 건립행사 보러가기(클릭하세요)

이때 충렬공 유허비 옛 좌대에 표석을 세웠던 홈에 해설비를 앉혔는데, 옛 직가삭형 홈의 모양을 종친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설비를 약간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몇몇 종친들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안사연에서는 해설비를 완전히 좌대 홈에 부착시키지 않고, 해설비 밑부분에 직사각형으로 돌출된 별도의 석재(石材)를 끼워서 옛 좌대가 손상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안사연에서는 이 의견이 옳다고 판단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신 종친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상락재에 내려가는 기회를 모색해 왔습니다. 때마침 올해 시제가 주말이라 우선 상락재로 들어가자마자 해설비를 홈에서 분리해 좌대 뒷부분으로 이동시켜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있도록 복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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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 유허비 옛 좌대 해설비를 분리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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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비 분리 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옛 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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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회곡동에 거주하시는 재경 종친과 재회 종친의 안내로 ‘장군샘’으로 향했습니다. 이 장군샘이 바로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늘 음용하셨다는 샘입니다. 상락재 앞마당에 자그마한 샘이 있는데, 이전까지는 이 샘을 장군샘으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회곡동은 크게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는데, 우리 일가분들께서 윗마을과 아랫마을에 각각 50여 호씩 총 100여 호가 거주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모두 합쳐 20여 호가 충렬공 할아버지 유적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재경 종친께서는 올해 83세로 회곡동에서 태어나 교육계에 투신, 대구에서 거주하시다가 교장을 역임하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재회 종친은 올해 71세로 역시 이곳에서 출생해 현재까지 거주하고 계십니다.

두 분께서는 충렬공 할아버지 유허비각 옆의 밭을 통해 ‘회곡리 마을회관’ 앞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습니다. 마을회관 바로 앞쪽에 움푹 꺼진 곳을 슬레이트 판재로 가려놓았는데, 두 분 종친께서는 이 샘이 바로 ‘장군샘’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슬레이트 판재를 걷어내고 보니 제법 큰 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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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 종친들 증언으로 확인한 장군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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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샘으로 일 년 내내 수량에 변화가 없고 항상 맑은 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지금까지 티끌 하나 흐려지지 않고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장군샘은 타원형 모양인데, 긴 쪽의 지름이 130cm, 짧은 쪽 지름이 105cm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장군샘 주위 전체 크기는 가로 3m×세로 3.5m입니다. 깊이는 85cm로 제법 깊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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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 진입로를 내느라 장군샘이 외따로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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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항용, 재회(71세), 재경(83세), 윤식, 영환, 영윤, 태영 종친. 재회 종친과 재경 종친의 증언으로 장군샘을 확인하였다.

장군샘 앞에는 자그마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두 분의 증언에 의하면 마을에 대대로 전해 오는 말로 아주 오랜 옛날, 정월 열나훗날 우물에서 나온 장닭이 이 바위에 올라가 홰를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장군샘을 확인한 다음 우리 일행은 다시 재경 종친과 재회 종친의 안내로 충렬공 집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냉평국대부인 할머니 단묘로 올라가는 산길 초입에서 내려다보면 파란색 페인트칠을 한 자 형태의 기와집이 있습니다. 현재 이 집은 재경 종친의 아우님이 살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 집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상락재까지 편평한 땅이 이어지는데, 담장만 없다면 기다란 밭 형태로 한 필지(筆地)나 마찬가지입니다. 냉평국대부인 할머니 단묘 아래쪽 산기슭은 만(灣)처럼 휘어져 들어가 있는데, 그 땅 전체가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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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평국대부인 할머니 단묘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내려다본 충렬공 할아버지 옛 집터로 추정되는 곳. 가운데 ㄱ자 형태의 파란색 기와집 뒤쪽에서 와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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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지 등 옛 기록에 따르면, 회곡동 입구에 긴 밭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충렬공 할아버지의 집터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산으로 조금 올라간 위치에서 내려다보니 기록으로 전해지는 바로 그 형태입니다.

파란색 기와집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대구에서 출발한 은호 종친과 재만 종친, 정중 종친, 그리고 안동에서 대학원과정을 밟고 있는 태홍 종친께서 상락재에 막 도착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냉평국대부인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 다음 파란색 기와집으로 향했습니다.

철제 대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더니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대문 바로 옆에 수백 년은 됨직한 향나무가 버티고 있는 겁니다. 밑둥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가지가 울창하게 뻗었는데, 얼마나 실하게 자랐는지 10여 개의 철제기둥으로 굵은 가지들을 지탱해 놓았습니다. 우리 일행 모두 여러 차례 회곡동에 갔었지만 처음 본 향나무 위용에 다들 놀랐습니다. 특히 남쪽으로 갈라진 두 개의 줄기가 용틀임을 하면서 구불구불 휘어져 있는데, 향나무가 아니라 마치 수백 년 묵은 커다란 반송(盤松)이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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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눈에 연륜을 느끼게 하는 향나무. 밑둥에서 갈라진 두 줄기를 쇠기둥으로 지탱해 놓았다.

재경 종친의 말씀으로는 회곡동에서 기와가 나오는 곳이 없는데, 이 집 뒷마당에서 여러 개의 와편(瓦片)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 기와 조각들이 조선 시대 유물인지, 아니면 고려 시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땅의 생김새로 봐서는 심증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다만, 너무 오랜 세월이라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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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편이 출토된 뒷마당

집터를 둘러보고 다시 재경 종친의 안내로 ‘고산정’ 터를 더듬어 보기 위해 낙동강 변의 ‘고산(孤山)’으로 향했습니다. 재경 종친께서는 ‘고산’ 대신 ‘독산(獨山)’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영가지 등에는 ‘고산(孤山)’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옛 풍동초등학교 울타리를 따라갔더니 영가지 등에 기록된 그대로 회곡동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낙동강으로 들어가 합류하는 ‘합수(合水) 지점’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풍동초등학교는 폐교되고, 현재는 ‘토우공방’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합수 지점은 예전에 강 저쪽 단호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것 역시 옛 기록과 일치합니다. 나루터 이쪽과 강 건너편 저쪽으로 넓디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재경 종친께서는 “낙동강 물이 이쪽으로 굽이쳐 흐르면 회곡동 쪽이, 반대로 단호리 쪽으로 굽이치면 단호리 쪽이 부자가 된다.”는 흥미로운 옛말이 전해진다고 들려주십니다.

합수 지점의 개울은 초겨울이라 그런지 수량(水量)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폭이 너른 것이 한여름에 큰물 질 때에는 쏟아지는 물이 엄청날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상락대가 산 위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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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나루터에서 건너다본 단호리 쪽 풍광

그런데 이 개울을 중심으로 위아래에 각각 산이 하나씩 있습니다. 위쪽은 예전에 우리 일행이 고산정을 찾느라 먼저 둘러본 곳입니다. 아래쪽은 이번에 처음 가 본 곳으로 말 그대로 자그마한 동산 하나가 덩그러니 외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어느 곳이 ‘고산(또는 독산)’인지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재경 종친께서는 수십 차례 이 산들을 오르내리며 고산정 터를 찾아보았답니다. 비록 학봉집에 기록된 ‘고산정 주춧돌’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래쪽에 외따로 떨어진 산이 ‘고산(독산)’이며, 이곳에 고산정이 있었던 것 같다고 들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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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나루터 자리에서 본 외따로 떨어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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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는 자그마하게 보이나 실제로는 훨씬 큰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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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경 종친의 증언을 채록하는 장면

이 산 동남쪽이 낙동강에 면해 있는데, 그 아래로 깎아지른 절벽이며 깊은 담(潭)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넓은 백사장이 깔려 있어서 크기만 작을 뿐입니다. 건너편 단호리로 흘러가는 지금의 물줄기가 이곳으로 바뀌면 곧바로 깊디깊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질 자리입니다. 비록 이번에도 고산정의 흔적을 찾지 못했지만, 선조님들과 관련된 유적을 찾는 데에는 한 점 의혹도 없어야 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조상님들과 관련된 각종 기록을 우리에게 유리하게만 적용하려고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이 날 우리 일행은 고산정 터를 찾지 못했음을 글과 사진으로 분명히 기록합니다.

산 위로 올라가 산 전체를 둘러보고 내려온 우리 일행은 12:40분경 풍동초등학교 입구로 되돌아 나왔습니다. 태홍 종친은 하회 쪽으로 가시는 종친들을 모셔다 드린 다음 합류하기로 하고, 우리 일행과 대구에서 오신 종친들은 주회 종친과 합류하기 위해 안동시내의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13:05분경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태홍 종친이 합류하고, 13:20분경 드디어 주회 종친께서 반가운 얼굴로 고속버스에서 내려 우리 쪽으로 걸어옵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해 더욱 반가운 얼굴입니다.

이어 우리 일행은 태홍 종친과 정중 종친의 안내로 안동댐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 정중 종친이 제1진 차량으로 옮겨 타서 구수한 설명을 펼칩니다. 덕분에 새로운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이윽고 13:30분경 제1회 안사연 여름캠프 당시 들렀던 월영교 부근의 식당에 도착해 안동 헛제삿밥으로 맛난 점심을 먹었습니다. 여러 해 전 여름캠프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즐거웠던 한때가 펼쳐집니다. 헛제삿밥은 이곳 아니면 먹어 볼 기회가 없는 데에다 안동 식혜 또한 안동의 별미라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게다가 회계를 맡으신 영윤 종친께서 안동소주를 사 오셔서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어느 틈에 정중 종친께서 식대를 치르셨답니다. 현지 종친들 폐를 안 끼치려고 부단히 노력하건만 벌써 여러 차례 폐를 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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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영교 부근의 식당. 제1회 여름캠프 당시 들렀던 곳으로 헛제삿밥과 안동 식혜가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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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댐의 월영교.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다. 현재는 목재 다리 상판이 낡아 통행이 금지되었다.

그 사이 윤만 종친 차량으로 출발한 제2진이 14:05분경 합류장소인 영호루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부랴부랴 출발했건만 강바람이 너무 차가워 제2진은 정의공파 파조(휘 철) 할아버지 제단이 모셔져 있는 임하댐 근처 명성쉼터에서 합류하기로 다시 약속장소를 변경했습니다.

-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시제 참예 보고가 늦어졌습니다.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호루부터는 제2편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잘못된 내용은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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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보고가 늦어진 점 거듭 사죄 드립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그간의 후기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작품의 탄생을 위하여 기다림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관련 기록으로의 연결을 통해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한 시도가 돋보입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고생하십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2편을 고대합니다.

김좌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좌회
작성일

  사진을 위한 글인가? 글을 위한 사진인가?  두분(발용,윤식)의 합작은 궁합중에도 찰떡 궁합으로 가슴에 다가옵니다. 잘 보았습니다. 다만, 장군샘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정중
작성일

  저는 충렬공실기 편찬창립모임에 참석하여 깊은 감명을 받고 대구에 잘 내려왔습니다.
또한 이렇듯 시원스런 사진을 제공 하시기 위해 몸부림 치신 발용대부님
그리고 상세하고 소중한 글을 지어주신 윤식아우님 넘넘 감사합니다

김태영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영
작성일

  후기를 읽고 볼때마다 매번 감탄합니다. 두 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회곡동에서 충렬공유허지와 장군샘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고산정이 있었던 일명 독산을 알아낸 것이 이번 시제참예 중에서 큰 수확이었습니다.

김영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식
작성일

  멋진 글과 사진 감사 합니다,잘 읽고 있습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용주
작성일

  좋은 경치와 영호루.분정을 의논하는 어른들의 모습 참 보기 좋읍니다. 윤식아저씨.글쓰시느냐고 고생하솃고 발용대부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