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도 충렬공 및 냉평국대부인 시제 참예 보고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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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윤식 작성일07-12-02 20:07 조회1,994회 댓글4건본문
2007년도 충렬공 및 냉평국대부인 시제 참예 보고_02 차가운 영호루 강바람에 탓에 제2진은 임하댐으로 떠나고, 우리 일행은 14:25분 식당을 출발해 14:38분 영호루에 도착했습니다. 제1회 안사연 여름캠프 때 본 곳이라 다시 보는 풍경이 낯익습니다. 영호루 현판은 한글로 ‘영호루’라고 적혀 있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글씨체입니다. 영남의 3대 정자 중 하나건만 콘크리트 건물이라 아쉬움이 컸습니다.
영호루는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일본 정벌 후 돌아오시는 길에 이곳에 들러 시를 지으셨는데, 이 시 덕분에 영호루가 그 이전에 지어졌다는 점만 알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충렬공 할아버지 시 덕분에 영호루 창건 연대가 고려시대로 올라가게 된다는 뜻이죠. 그 때문에 안내판에도 “…1274년 김방경 장군이 누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1274년은 잘못된 기록으로 1281년이 맞습니다. 본래 영호루는 현재 자리에서 마주보는 건너편에 있었는데, 몇 차례에 걸친 홍수로 떠내려가 이곳 강 언덕으로 옮겨놓았답니다. 태홍 종친이 건너편 안동시내 신시가지 쪽을 가리키며 큰 다리 아래쪽 주차장 부근이 본래 위치라며 알려줍니다.
영호루에 올라서면 이곳 절경을 읊은 시들이 4면을 돌아가며 걸려 있는데, 시내 쪽을 향한 곳에 충렬공 할아버지 시가 걸려 있습니다. 그 오른쪽으로 조간, 정자후, 채홍철, 도첨의사사공(휘 흔) 할아버지, 왼쪽으로 정포, 권사복, 이집, 전녹생,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태재 유방선 등 고려와 조선시대 선인(先人)들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도첨의사사공은 충렬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일본정벌에도 다녀오셨으며, 합단적을 상대로 연기대첩을 거둔 명장 중의 명장이십니다. 채홍철 공은 충렬공의 사위, 정자후 선생는 민사평 공 및 김륜 선생과 더불어 ‘철동 3암’으로 불리는데, 문온공(휘 구용) 할아버지의 외조부이신 민사평 공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조간 선생은 문영공(휘 순) 할아버지와 가까운 인척 사이이자, 동방 급제자로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두 분 사이에 전해지는 일화는 우리 홈 게시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정포 선생은 충렬공의 외손으로 고려조의 손꼽히는 문인이며, 이집 선생은 여말의 충신으로 우리 문중 파조 할아버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전녹생 선생 역시 지제교공(휘 제안) 할아버지와 함께 사신으로 요동으로 파견된 바 있으며, 정몽주 선생과 정도전 선생은 우리 문중과 너무나 밀접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온통 우리 문중과 인연이 깊은 분들이라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비록 누각 안쪽에 초서체 대자(大字)로 ‘낙동상류 영좌명루(洛東上流嶺左名樓)’라고 쓴 조선조 말 세도정치를 폈던 김학순의 서판(書板) 걸려 있습니다만, 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항용 종친의 청으로 영환 종친께서 영호루와 할아버지 시들에 얽힌 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영환 종친의 설명에 따르면, 충렬공 할아버지 시의 운(韻)을 받아서 도첨의사사공(휘 흔) 할아버지께서 시를 지으셨답니다. 그리고 문온공(휘 구용) 할아버지께서 다시 두 분 할아버지의 운을 그대로 받아서 또 시를 지으셨답니다. 세 분 할아버지 시들은 이렇습니다. 題福州映湖樓(제복주영호루) - 충렬공 映湖樓(영호루) - 도첨의사사공(휘 흔) 安東客舍北樓次高祖上洛公詩韻(안동객사북루차고조상락공시운) - 문온공(휘 구용)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시의 첫행 마지막 글자는 ‘푸를 청(靑)’이며, 도첨의사사공과 문온공께서 지으신 시의 첫행은 ‘맑을 청(淸)’입니다. 영환 종친의 설명에 따르면, 충렬공 할아버지 시에서 운(韻)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므로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시도 본래는 ‘맑을 청(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따라서 ‘동문선’에서 고려시대 시들을 모아서 옮겨 적을 때 잘못 전해진 것 같다는 설명을 들려 주십니다.
종친들께서 영호루 시판을 감상하시는 동안 발용 종친은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고, 윤식은 잠시 아래로 내려와 해설판들을 점검했습니다. 영호루는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영남 3대 누각이며,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파천한 공민왕이 친필 현액을 하사하여 1368년에 새로이 누각을 지었답니다. 그 뒤 4차례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누각과 함께 공민왕의 친필 현판이 유실됐는데, 탁류 속에서 현판이 서광을 비추기에 찾을 수 있었답니다. 태홍 종친은 이 현판이 현재 안동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알려 줍니다. 영호루가 1943년에 홍수로 유실되자 안동시에서는 다시는 수마를 겪지 않도록 197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콘크리트로 영호루를 지었습니다.
비록 절기가 달라 초겨울 바람이지만, 문온공 할아버지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선조님들 시판이 걸린 영호루는 옛 모습 그대로라 떠나기 싫었습니다. 아참, 영호루에 걸린 시판은 모두 46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제2진과 합류하기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15:25분 영호루를 출발해 15:45분 임하댐의 명성휴게소(명성쉼터)에 도착했습니다. 제2진은 상석(在항) 종친을 비롯해, 윤만 종친, 태우 종친, 영식 종친(등반대장) 등 4명이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정의공(휘 철) 할아버지 단소에 인사를 올린 뒤 명성쉼터에서 잠시 허기를 달래며 목을 축였습니다. 얼마 후 정의공파 총무이사이신 태인 종친께서 도착하시고, 우리 일행은 정의공 할아버지 제단으로 향했습니다.
정의공 할아버지 사적비에는 “고려 정의대부 천우위 대장군 봉안동군 조선개국원종공신 예조판서 양파 김공 사적비(高麗 正儀大夫 千牛衛 大將軍 封安東君 朝鮮開國原從功臣 禮曹判書 陽波金公 事蹟碑)라 새겨져 있습니다. 양파(陽波)는 정의공 할아버지 호입니다. 정의공 할아버지 사적지는 오래 전에 포항에 거주하시는 재원 종친께서 소개해 주신 덕분에 눈에 익었습니다.
▶▶ 정의공 사적비와 비문 내용 보러가기(클릭하신 다음 조금 밑으로 내리시면 됩니다.) 거북좌대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7자 크기의 정의공(휘 철) 사적비는 후손들이 2001년 9월에 건립한 것으로 뒷면에 정의공 할아버지 사적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음기 기록에는 “방후손(傍後孫) 창회 근찬, 정의공파종회 근수”라 적혀 있습니다. 글자를 찬찬히 살펴보던 일행 중 어느 분이 손으로 일일이 새긴 것 같다고 합니다. 의성 사촌에 거주하시는 명문장가 창회 종친의 조카이신 태홍 종친은 “맏아버지(큰아버지) 글씨”가 맞다고 합니다. 서체 또한 온화하고 낱낱의 자획이 어느 곳 하나 이지러진 곳이 없어 평소 단정하신 창회 종친의 모습을 뵙는 듯합니다. 사적비 뒤쪽 제단은 크기가 아담합니다. 정의공 할아버지 후손들은 주로 함경북도에 거주해 왔고, 남한에는 훨씬 적다고 합니다. 종손은 현재 강릉시에 거주하는 종식 종친이시랍니다. 정의공파종회에서는 남녘에 거주하는 종친들이 힘을 모아 사적비를 세웠는데, 당시 230여 가구가 동참했답니다. 매년 음력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향사를 올리며, 대략 50여 명의 종친들이 참예한다고 합니다. 어느덧 해가 커다란 미루나무를 배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햇볕을 받은 임하댐 수면이 황금물결로 일렁입니다. 주회 종친은 그 광경에 이끌렸는지 조용히 카메라에 담고 있네요.
참배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17:00시 정각 정의공 할아버지 사적지를 떠나 죽송동 능골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숙소를 정하려고 도산서원 근처에서 조금 지체했는데, 이곳에서는 묵을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길을 달려 18:20분경 음수재에 도착했더니 바깥마당이 시끌시끌합니다. 종친들과 인사를 나누고, 음수재 안으로 들어갔더니 경향 각지에서 모이신 문중 어르신들께서 말씀을 나누시는 중이었습니다.
20:00시 정각, 드디어 충렬공 할아버지와 냉평국대부인 할머니 시향 분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시간이 넘도록 진행된 분정과정은 내용이 방대해 생략하고, 결과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분정과정에 참여하신 분들은 문중 어르신들을 비롯해 모두 50여 명이며, 모든 결정은 토의와 추천을 거친 다음, 우리 문중에 대한 공헌도 등을 참조해 이루어졌습니다.
충렬공 할아버지 헌관은 관례에 따라 대종회장께서 초헌관으로 결정되고, 아헌관과 종헌관은 호석 종친 및 태영 종친께서 각각 선정되었습니다. 집례인 찬자에는 동수 종친, 제례 절차의 최종 확인을 담당하는 직일에는 학응 종친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냉평국대부인 할머니의 경우에는 그 동안 안사연의 활동과 공로를 높이 사는 한편, 젊은 청장년층에게 우리 문중 고유의 제례 절차를 전수한다는 차원에서 안사연 회원들을 대거 기용해 주셨습니다. 문중 어르신들께서 보잘것없는 활동을 마음 속에 새겨 두시고 계시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초헌관은 남응 종친, 아헌관은 재철 종친, 그리고 문중 어르신들 배려로 종헌관에 영환 종친께서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찬자에는 항용 종친이 선정되었습니다. 직일은 워낙 막중한 자리라 부사공파종회 전 회장이시며 현재 부사공파종회 고문을 맡고 계신 재은 종친께서 담당하시게 되었습니다. 이후 우리 일행은 음수재에서 묵기에는 너무 인원이 많아 밤늦게 안동시내로 들어와 숙소를 정하고 단잠에 빠졌습니다.
-다음 제3편은 2일째 행사인 충렬공 및 냉평국대부인 시제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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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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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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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우리 홈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아서 미리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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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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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후기와 사진 잘 보고 있습니다
불야성을 이룬 음수재의 야경 모습이 걸작입니다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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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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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하셨습니다.
책자에 실려있는 영호루의 현판 기록들을 옮겨야겠습니다.
김태홍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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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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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그렇게 피했건만..ㅠㅠ 결국 찍혔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