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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김시양문집(10)-상소문(국가의 다섯가지 폐단을 아뢰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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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12-17 11:13 조회1,75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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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 돌아감을 아뢰고 겸하여 다섯 가지 폐단을 아뢴 차(箚)

    -진퇴귀겸진오폐차(陳退歸兼陳五弊箚)


삼가 신(臣)은 보잘 것 없는 자질로 마디가 길지를 못하온데, 성명(聖明)을 만나 지나친 발탁을 입어, 10년 안에 경재(卿宰)의 지위를 밟으며 앞뒤로 위임을 받은 것이 군(軍)과 나라의 무거운 임무로 감격 아님이 없었습니다. 삼가 영광됨을 항상 생각하며, 그 힘닿는데 까지 순탄함과 험함을 사양 않고 죽기를 기약하였는데, 이는 신(臣)이 본디 가슴속에 쌓은 바입니다.

신(臣)은 참으로 불행하게도 복이 지나쳐 두 눈이 실명하는 재난이 생겨 여러 차례 약물을 내리시는 은혜를 입어, 여러 방면으로 조리하고 치료하였지만 빨리 효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3년에 이르도록 날로 점점 더해져 이미 병으로 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을 다할 수 있는 반열에 나아감도 다시는 그런 길이 없겠고 자그마한 보답을 드릴 희망도 이미 끊어졌습니다.

이제부터는 전원(田園) 가까운데 물러나 부모의 묘소 가까이 가서 뼈로 돌아갈 생각입니다만, 성은(聖恩)이 그리워 차마 문득 결행을 못하며 강(江)곁에서 늦도록 돌아보면 눈물이 쏟아지듯 합니다. 신(臣)이 은혜를 입고 사사로이 신하들 가운데서 뽑아주셨으니, 이제 물러나 돌아갈 때를 당하여 만약 한마디 말도 없이 가버린다면, 임금을 사랑하는 붉은 충성이 장차 어느 처지에 있겠습니까. 이에 분별없는 말을 올려 작으나마 ‘잊지 마소서’ 라는 의미로 계속 생각하려니 가슴이 먼저 막히고, 오래 병들어 정신이 소모된 말은 윤리를 돌아보지 못하고, 임금이 읽을 만하게 갖추지 못할까 하여 신(臣)은 참으로 황공하옵니다.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성상(聖上)의 밝으심은 해와 달과 같고 지혜로움은 모든 사물에 나타나고 생각은 온갖 정사를 두루 하시며, 지혜로움은 신(神)과 같이 헤아리셔서 뭇 신하의 재능은 모두가 성의(聖意)를 채우기에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행하는 조치를 할 때에 혼자서 지배하심을 면치 못합니다.

세상의 큰 일에는 묻지 않음에 병폐가 있고, 작은 일에는 세밀해서 탈입니다. 적을 헤아림은 요행에 가깝고, 아랫사람을 부림에는 임의로 헤아려 간섭합니다. 무릇 이 네 가지는 눈앞의 뛰어난 효과가 아님이 없어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만, 그렇게 흐르는 폐단은 끝내는 위임하게 되어 모든 일을 세밀하게 전념하지 못하게 됩니다. 위에서 총명하게 해도 밑에서 충성으로 힘쓰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을 아는데 아주 밝았던 요(堯)임금이 마치 사악(四岳.주: 堯代의 四方 제후의 우두머리)을 따랐음을 시험삼아 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 그런 일을 크게 하시기를 청하는 것은 독단(獨斷)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문왕(文王. 주: 周나라의 시조․이름은 昌)과 같이 크게 나타나지 못 하더라도, 모든 옥사(獄事)나 모든 삼가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그런 일을 축소하여, 밑으로 침범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삼가 원컨대 성명(聖明)께서는 조심하여 주십시오. 위(魏)의 무제(武帝. 주: 155-220 曹操)가 오환(烏桓. 주: 漢代의 東胡의 하나)을 토벌하려는데 여러 장수가 간언 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쳐서 크게 승리하였는데, 돌아와 간언했던 사람에게 후한 상을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위험을 틈타 요행이었다. 생각해보면 항상 제군의 간언이 완전한 계략이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이후로 말하는 것을 어려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당(唐)태종(太宗)은 말하기를, 「나는 지성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아첨하는 신하가 요(遼)를 치는 것은 불리하다고 요청하였지만 아뢴 대로 쓰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위징(魏徵.주: ?-643. 당 태종 때의 정치가)을 추념하면서 작은 소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위(魏)의 무제(武帝)는 뭇 영웅 중에서 제일이었고 당(唐)의 태종은 잡백(雜伯)중의 임금입니다. 모두 성명(聖明)의 말로 여기기에는 부족하오나, 그 장점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아! 바야흐로 이제 기강은 쓰러져 쇠퇴하여지고 사사로운 뜻은 질펀합니다. 대관(大官)은 유유하게 자리만 지켜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고, 소관(小官)은 건성으로 녹(祿)이나 잡고 있으니, 나라의 형세가 점점 쇠퇴하여져 마치 해가 곧 저물 듯 점차 위험스레 망해 가는 지경에 다가섰으니, 이게 어찌 위에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있다 하겠으며, 다스림을 본받음에는 도리어 한(漢)이나 당(唐)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절(關節․주: 요로에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보내 부탁함)이 크게 행해져 법령(法令)을 믿지 못하고, 탐욕스런 풍습이 점점 치열해지고 사치함은 헤아릴 수 없으니, 군비[軍額]는 날로 축소되어 오늘날에는 다스림에 큰 병이 되었습니다.  신(臣)이 크고 작은 많은 폐단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모두 해치(害治)입니다. 다스림에 해로운 것[害治]에서 가장 큰 것은 관절(關節)입니다. 듣고 보는 것이 이미 익숙하게 습관이 되어서, 항상 하는 사람은 후하다고 하고 하지 않는 사람은 박하다고 하고 있으니, 공도(公道)가 이로부터 떨어지고 사의(私意)가 이로부터 행해지고, 범죄를 다스리는 기강이 이로부터 서지 못하고 염치가 이로부터 날로 잃어버리고, 죄 있는 자가 이로부터 요행히 면해지고 재주 없는 자가 이로부터 관직을 얻고, 전조(銓曹. 주: 文武官을 전형하는 吏曹와 刑曹)가 인재(人才)의 현명한지 아닌지 묻지도 않고 오직 관절(關節)의 후함과 박함을 보며, 법관(法官)이 사리(事理)의 가볍고 무거움을 논하지 않고 오직 관절(關節)의 높고 낮음만을 보니, 만약 금단(禁斷)을 가함을 엄히 하지 않으면, 끝내는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해 비국(備局. 주: 비변사)에 금지하도록 청했지만 정수리에 침 한번 꽂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미 얼마 안되어 가끔 스스로 몸소 어기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는 앵무새가 지껄이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어찌 한(漢), 당(唐)의 법이 관절(關節)을 죽을죄로 여겼던 일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우리나라 세종(世宗)때 재상 황희(黃喜.주: 1363-1452 문신. 자 懼夫. 호 厖村. 본관 長水. 시호 翼成)가 관절(關節)이 있어서 표운평(表芸平)의 의옥사건에서 하옥되어 그 자리에서 파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진 재상으로 황희(黃喜)같은 이가 없고 세종의 위임이 황희(黃喜)보다 더 함이 없지만, 오히려 이러한 거동이 있자 그러한 금지를 무겁게 하여 만세(萬世)의 법을 세웠던 것입니다. 어찌 오늘날 당연히 취해야 할 법(法)이 아니겠습니까.

대간(臺諫)은 제신(諸臣)의 건백(建白.주: 윗사람에게 의견을 드림)을 따져 늘어놓아 성지(聖旨)를 받들어 아뢰어 밝히도록 하며, 만약 행하는데 불편한 것이 있으면, 사유를 갖추도록 하여 다시 성지(聖旨)를 받들어 계(啓)를 아뢰도록 한 후에 그만두게 함이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법대로 실시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여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나 마찬가지로 보아 버립니다.

시험삼아 한 두 가지 일을 언급하겠습니다. 대간(臺諫)의 직(職)에 있으면서 아뢰지 않는 자는 파직한다고 확실히 영(令)을 밝혔습니다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잠자면서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벼슬에 들어올 때 그 햇수를 적어두게 성교(聖敎)를 내렸습니다만, 세도가의 자제(子弟)들이 이미 햇수를 속이고 있음을 주의하여 논의하여야 합니다. 한흥일(韓興一.주: 1587-1651 문신. 자 振甫. 호 柳市. 본관 청주. 시호 靖溫)의 상소에 따르면, 공납(公納)된 포목이 조종조(祖宗朝)의 규정대로는 양끝에 푸른 실을 써서 바꿔 바치는 폐단을 방지하였습니다만 곧 다시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호령(號令)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고 두렵게 받들어지겠습니까. 범죄를 다스리는 법이 업신여겨지고 해이해지는 것은 모두 이런 일들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법령(法令)에 만약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논의를 아뢰어 윤허를 받은 후에 고친다면 거의 범죄를 다스리는 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며 나라의 체통이 설 것입니다.

반정(反正)을 한 후에, 정치를 하는 임금이 죄를 감춘 관리를 은혜롭게 용서를 하며 정법(正法)으로 임하지 않았던 것이 인심이 해이해져 전조(銓曹)의 관(官)에 이르기까지 엄히 행실을 방정하게 아니한다고 간혹 사람들이 언급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말하기를 요즘 인심이 얇아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신을 신고 관(冠)을 바로 쓰도록 스스로 취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에 방납(防納.주: 納貢者의 貢物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를 納貢者로부터 倍徵하는 일)의 폐단이 시정(市井)에 있게 되면 나라를 병들게 함과 같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방납(防納)의 폐단이 궁가(宮家)와 사대부 집에까지 옮겨져 무성하여 그 세력으로 이(利)를 엿봄이 다섯 갑절이나 되니, 해로움이 장차 이르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3명이 날마다 여러 궁가(宮家)에 말을 진상하며 억지로 봉납하는 폐단을 대간(臺諫)은 계(啓)로 논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도 요청을 받다보니 궁가(宮家)의 억지 봉납은 갈수록 심해만 가니 백성이 어찌 어려운 원망을 안 하겠으며 어찌 흥분을 않겠습니까.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때에 부마(駙馬) 구양윤(歐陽倫.주: ?--1397.明의 安慶公主의 駙馬로 여러 차례의 茶禁으로 사형에 처해짐)이 다금(茶禁. 주: 사헌부의 탄핵)을 범하여 중죄(重罪)로 처벌되었으며, 선종황제(宣宗皇帝)때에는 탐내는 풍속이 날로 치열하므로 좌도어사(左都御史) 유관(劉寬)1)을 조사하여 죄를 주었는데, 유관은 바로 세 황제를 모셨던 구신(舊臣)이었습니다. 법(法)은 반드시 스스로 귀하여 가까운데서 시작한 후에야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바 되어 감히 범하지를 못 합니다.

성명(聖明)께서 친족에게 돈독하게 하시고, 친족의 일은 궁가(宮家)에 있으므로 곧 우대하여 용납하심이 신료(臣僚)를 존경하여 대우하는 것입니다. 죄가 재상들에게 있는데 가벼운 형전(刑典)에 따르게 하면 덕(德)이 후하여 은혜에 젖겠지만, 끝내 폐단을 고치는 데에는 아마 은혜를 준 한 임금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신(臣)은 전하께서 오로지 위엄과 사나움을 행함으로써 인후(仁厚)로 다스림을 다치게 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을 위한 계략은 위엄이 길(吉)하다는 (易經의 말을) 참고로 쓰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행동에 권하는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옛 사람이 말한 바 사치하는 화(禍)는 천재(天災)보다 심하며, 천재가 비록 슬픔이 깊다 해도 그 어려운 시기가 멀어질 수 있지만, 사치의 폐해는 재물을 다치고 백성을 고단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화(禍)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바, 광대나 하천한 자가 모두 붉은 비단을 입고 있고 서인(庶人)이나 종들이 모두 수놓은 비단을 싸고 있으며 사대부 집은 더욱 심합니다. 이는 오직 가도(椵島.주: 평안북도 철산군에 있는 19.2㎢의 섬. 仁祖 13년 당시 明나라 군대가 淸에 대항하며 주둔하고 있었음)의 통화(通貨)가 중국의 서울(北京)에서 바다를 따라온 소치로, 재물이 바닥나고 나라가 피폐해질 것은 필연입니다. 지난번 대간(臺諫)이 금지하자는 의견은 좋은 것이지만 인정(人情)이 두고 있는 바를 법으로 다할 수는 없습니다. 약간 죄를 지었다는 사람은 세력이 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 세종(世宗)대왕께서는 항상 목면 옷으로 지내셨고, 세조(世祖)대왕께서는 목영자(木纓子. 주: 나무로 구슬같이 만들어 옻칠을 한 갓끈)를 쓰셨고, 성종(成宗)대왕께서는 항상 깨끗이 빨래한 저고리로 지내시면서 검소함으로 아래를 인도하며 크게 부유하게 되도록 하여, 상감께서 참으로 법(法)이 되셨습니다. 조종(祖宗)의 검소한 덕이 밑으로 바람이 불어가면 어찌 민초에게 영향을 주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중한 법으로 금지하지 않더라도 개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천(私賤)은 세계에 없는 바로서, 양처병산(良妻幷産)을 취하니, 이 때문에 사천(私賤)은 많아지고 양민(良民)은 작아지니, 호패(戶牌)때에 군역(軍役)으로 정해진 자가 겨우 15여만이고, 사천(私賤)은 많게는 40여만에 이르렀습니다. 신(臣)이 평상시에 듣건대, 고려 때에는 양처병산(良妻幷産)의 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때의 권신(權臣)이 한나라를 흔들 때에도 노비(奴婢)는 불과 수십 명이어서 그러므로 고려 때에는 군사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臣)은 꼭 그렇게 보장하라고는 않지만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양처병산의 법은 태종10년(1410)에 시작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건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저 천녀(賤女)는 그 지아비를 정하지 못하므로 태어난 자는 아비의 역(役)을 따르기가 어려워 어미를 따라 역(役)을 한다는 것이 이게 바로 양법(良法)인 것입니다. 천인(賤人)은 이미 어미의 역(役)을 따르는데, 사천(私賤)으로 태어난 자가 어찌 또 아비의 역(役)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러한 사천(私賤)이 많아져서 깎이다 보니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적은 강하고 군대는 약한 때를 당하여, 아무리해도 변통해 볼 수가 없이 그 망하는 대로 앉아서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 계속해서 이런 막대한 폐단이 있는 법을 없애고 교훈을 살려 20년이 모이게 되면 국가에 강병(强兵)에 속하는 자가 응당 10여만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 내수사(內需司․주: 대궐에서 쓰는 쌀, 베, 잡물과 노비(奴婢)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관부)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라안에 영(令)을 내리시면 누가 감히 원망하겠습니까.

아아! 다섯 가지는 참으로 오늘날의 큰 폐단입니다. 그 중 가장 큰 우두머리는 관절(關節․주: 뇌물청탁)에 있습니다. 관절이 만약 행해지지 않으면 법령(法令)이 행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지며, 탐욕한 풍속이 그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그치며, 사치가 혁파되기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혁파되며, 군대자금이 많아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많아질 것입니다. 조정에 사사로운 뜻이 없으면 관절(關節)은 저절로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로운 뜻은 형체가 없어 금지하기가 매우 어려우나 관절(關節)은 형체가 있어서 금지하기가 조금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 쉬운 것부터 거꾸로 시행하고자 하심이 이 또한 부득이 한 말입니다.

이 밖에 신(臣)이 또한 아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주저하여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성명(聖明)을 거스르셨다면 신(臣)의 죄는 만 번 죽고도 만 번 죽을 만합니다. 이괄(李适.주: 1587-1624. 무신. 반란자. 자 白圭. 본관 固城)등이 모반(謀反)한 사건은 기찰(譏察)을 너무 많이 한데서 크게 국가에 관계되었다고 하겠으며, 유효립(柳孝立․주: 1579-1628 문신. 자 行源. 본관 文化)의 모반은 기찰(譏察)을 얻지 못해 역시 이를 믿다가 난을 일어나지 않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여 헛소문이 쉽게 일어나고 허깨비에 놀랍니다. 아무 곳에 아무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기찰(譏察)이고, 아무 사람이 아무 말을 지어낸다는 것이 기찰(譏察)입니다. 하나가 둘을 전하고 둘이 셋을 전하다 보면 아무 집에 기찰을 한다 아무 땅에 기찰을 한다고 말하게 되어 흉흉하게 의구심을 일으켜 아침저녁으로 안심을 못하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인산(因山)때(․주: 왕비 韓氏가 인조13년 12월에 승하함) 상감께서 수원군(水原軍)이 들어와 호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큰 성인(聖人)은 우뚝 솟아 꿈적도 않고 위의(危疑)에도 진정하여 심상하게 여유 만만하게 나옵니다. 당태종(唐太宗)은 말하기를 「모반은 혼자서 하지 못한다. 어찌 걱정한다고 일어나지 않겠는가. 모반이란 것은 천하에 대역부도(大逆不道)한 것이다. 무릇 혈기 있는 자가 있어서 몹시 악독함과 어울려 하는 것이니, 어찌 걱정한다고 일어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먼저 의심이 쌓였을 때 기찰(譏察)해야지 백성을 막아서서 인심이 불안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까. 인심이 불안하면 이게 난에 이르게 되는 길입니다. 신(臣)은 기찰(譏察)이 난을 제어해야 하는데 도리어 난을 일어나게 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삼가 성명(聖明)께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신(臣)의 몸은 중병을 앓고 있어 궐 아래에 발걸음이 끊겼습니다만, 귀하신 몸이 계시는 곳에 머리 숙이고 두려운 마음으로 신중히 생각하며 글을 올리자니 목메어 울음이 나와 말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상소문을 살펴보고 모두 잘 알았노라. 경(卿)의 눈병이 점점 중하여 진다니 내 심히 애석히 생각한다. 상소문 중에 말한 것은 약석(藥石)의 말이 아님이 없다. 폐단을 건지는 대책은 염려하지 않아도 경(卿)의 뜻에 따라 시행하겠다. 더구나 경(卿)이 물러나서 내 마음이 너무 허전하니 꼭 귀향하지 말고 서울에 있으면서 조리하여 고치시오」라고 하셨다.


1) 유관(劉寬) : 劉觀의 誤記. 明의 保定雄縣의 사람. 永樂13년.1415년에 左都御史였으며, 仁祖 즉위 때에 太子少保가 되었으나 법을 어기고 탐욕스럽게 재물을 모아 時論으로 배척되고, 宣德 3년. 1428년에 재물을 받았다가 파직되어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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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묵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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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