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12(연기군)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2-06-08 23:28 조회1,621회 댓글0건본문
연기.전성지(연기군문화공보실, 1991)
▣ 이곳 연기. 전동은 전서공(성목)파의 세거지 입니다.
pp 91 성씨중.
○ 김성목(金成牧) : 안동인이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전서
(典書)의 벼슬을 지냈다. 고려말에 처음으로 본 현(縣)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김휴(金休) : 김성목(金成牧)의 아들이며 호는 학당(學堂)이다. 고려조에 문과로
검교(檢校)의 벼슬을 지냈다. 사적에 대하여는 유현록(儒賢錄)을 보아라.
○김익정(金益精) : 김휴(金休)의 아들이며 호는 운암(雲菴)이라 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의 벼슬을 지냈다. 효행록을 보아라.
○김익렴(金益廉) : 김휴(金休)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시랑(吏曹侍郞)의
벼슬을 지냈다.
○김숙(金潚) : 김익정(金益精)의 아들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의 벼슬을 지냈다.
○김형(金 ) : 김숙(金潚)의 아우이며 진사였다.
○김저(金저) : 김익렴(金益廉)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한(金漢) : 김저(金저)의 아우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지냈다.
○김변(金 ) : 김한(金漢)의 아우이며 생원(生員)이었다.
○김복령(金福寧) : 김숙(金潚)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사과(司果)였다.
○김수령(金壽寧) : 김숙(金潚)의 아들이며 호는 몽암(夢菴)이었다. 생원과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의 제학(提學)을 지냈다. 좌리공신(佐理功臣) 복창군(福昌君)
에 책봉되고 문도(文悼)의 시호를 받았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부령(金富寧) : 김형(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사직(司直)이었다.
○김대성(金大成) : 김저(金저)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복수(金福壽) : 김한(金漢)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철문(金澈文) : 김변(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이었다.
○김광(金鑛) : 김수령(金壽寧)의 아들이며 충훈부(忠勳府) 경력(經歷)이었다.
○김귀년(金龜年) : 김부령(金富寧)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부장(部將)의 벼슬
을 살았다.
○김사수(金師秀) : 김귀년(金龜年)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현감(縣監)을 지냈
다. 선정비(善政碑)가 있는데 야당(野塘) 홍성민(洪聖民)이 찬(撰)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묘비의 글씨를 썼다.
○김사철(金師哲) : 김귀년(金龜年)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목사(牧使)의 벼슬
을 지냈다.
○김오(金 ) : 김사수(金師秀)의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통어사(統禦使)를지
냈다.
○김순(金淳) : 김오(金 )의 아우이며 음관(蔭官)으로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정(金錠) : 김귀년(金龜年)의 손자이며 음관(蔭官)으로 부장(部將)을 지냈다.
○김구정(金九鼎) : 김오(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직장(直長)이었다.
○김윤정(金潤鼎) : 김사수(金師秀)의 손자이며 음관(蔭官)으로 봉사(奉事)였다.
○김대정(金大鼎) : 김순(金淳)의 아들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
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선(金鐥) : 김구정(金九鼎)의 아들이며 장락정(掌樂正)의 벼슬을 지냈다.
○김해(金垓) : 김윤정(金潤鼎)의 조카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은(金銀) : 김사철(金師哲)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좌랑(佐郞)의 벼슬을
지냈다.
○김제정(金濟鼎) : 김사철(金師哲)의 손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조방장(助防將)을
지냈다.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절의록(節義錄)을 보아라.
○김인길(金仁吉) : 김구정(金九鼎)의 손자이며 진사(進士)로 도사(都事)의 벼슬을
지냈다.
○김인철(金仁哲) : 김대정(金大鼎)의 손자이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태기(金兌起) : 김인철(金仁哲)의 아들이며 호조판서(戶曹判書)의 증직을 받았다.
○김만직(金萬直) : 김선(金鐥)의 손자이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하진(金夏璡) : 김만직(金萬直)의 아들이며 좌윤(左尹)의 증직을 받았다.
○김혼(金混) : 김하진(金夏璡)의 아들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수직을 받았다.
○김형(金珩) : 김태기(金兌起)의 손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득해(金得海) : 김형(金珩)의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는
데 치민(治民)이 알뜰하여 거사비가 있다.
○김치혁(金致赫) : 김태기(金兌起)의 현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지
냈다. 누동(樓洞 ; 다락골). 방동(方洞 ; 사방골). 양지(陽地 ; 양지리). 생졸(生拙)
에서 산다.
pp 111 유현(儒賢)
○김휴(金休) 안동인 전서(典書) 김성목(金成牧)의 아들이다. 호는 학당(學堂)이며
포은 정몽주선생에 따랐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의 벼슬을지
냈고 조선조가 되어 조정에서 한성좌윤의 벼슬을 가지고 불렀지만 따르지 아니하
였다. 서울을 떠나 낙향하면서 읊은 시가 있다.
pp 112 인물과 유행(儒行)(원거인 : 原居人)
○ 김성목(金成牧) 안동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이며 전서(典書)
의 벼슬을 지냈다.
○김익렴(金益廉) : 김성목(金成牧)의 손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左
郞)을 지냈다.
○김기(金基) 안동인. 충장공(忠壯公) 김제정(金濟鼎)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전사함을 애통히 여기고 항상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드릴 것을 마은에 품
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싸움에 나가 본진을 찾아서 정이흥장군(鄭以興
將軍)을 만나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가 금천에서 순절하였다.
pp 121 절의(絶義)
○김제정(金濟鼎) 안동인. 목사(牧使) 김사철(金師哲)의 손자이며 인조조에 무과
(武科)에 올라 인산( 山)의 조방장(助防將)이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의 호란
(胡亂)에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병조참판의 증직과 제사를 내리고 영조조에 충장
(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pp 124 효행(孝行)
○김익정(金益精) 안동인 호는 운암(雲菴). 생원으로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
여 대사헌(大司憲)의 벼슬에 올랐다. 학문이 일세에 뛰어나며 3년거상에 관직을
사양하고 빈민의 구제에 힘쓰며 법에 의하여 관직을 임명하고 법을 지키니 백관
이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김사준(金師俊) 김익정(金益精)의 현손이며 호를 사암(思巖)이라고 하였다. 천성
으로 효성이 독실하며 학식이 고명하였다. 예종조에 참봉(參奉)벼슬을 내렸지만
받지 아니하였다. 명종조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동구 밖에는 그를 기념하는 〈효
자거리〉가 있다.
pp 137 총묘(塚墓)
○ 김성목(金成牧) 안동인. 관 공조전서(工曹典書). 묘는 동면(東面) 학당(學堂)에
있다.
○김휴(金休) 김성목(金成牧)의 아들로 관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이며 묘는 학당
(學堂)에 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주회 - 와! 어마어마한 자료입니다.
▣ 태영(문) -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 이곳 연기. 전동은 전서공(성목)파의 세거지 입니다.
pp 91 성씨중.
○ 김성목(金成牧) : 안동인이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전서
(典書)의 벼슬을 지냈다. 고려말에 처음으로 본 현(縣)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김휴(金休) : 김성목(金成牧)의 아들이며 호는 학당(學堂)이다. 고려조에 문과로
검교(檢校)의 벼슬을 지냈다. 사적에 대하여는 유현록(儒賢錄)을 보아라.
○김익정(金益精) : 김휴(金休)의 아들이며 호는 운암(雲菴)이라 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의 벼슬을 지냈다. 효행록을 보아라.
○김익렴(金益廉) : 김휴(金休)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시랑(吏曹侍郞)의
벼슬을 지냈다.
○김숙(金潚) : 김익정(金益精)의 아들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의 벼슬을 지냈다.
○김형(金 ) : 김숙(金潚)의 아우이며 진사였다.
○김저(金저) : 김익렴(金益廉)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한(金漢) : 김저(金저)의 아우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지냈다.
○김변(金 ) : 김한(金漢)의 아우이며 생원(生員)이었다.
○김복령(金福寧) : 김숙(金潚)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사과(司果)였다.
○김수령(金壽寧) : 김숙(金潚)의 아들이며 호는 몽암(夢菴)이었다. 생원과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의 제학(提學)을 지냈다. 좌리공신(佐理功臣) 복창군(福昌君)
에 책봉되고 문도(文悼)의 시호를 받았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부령(金富寧) : 김형(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사직(司直)이었다.
○김대성(金大成) : 김저(金저)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복수(金福壽) : 김한(金漢)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철문(金澈文) : 김변(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이었다.
○김광(金鑛) : 김수령(金壽寧)의 아들이며 충훈부(忠勳府) 경력(經歷)이었다.
○김귀년(金龜年) : 김부령(金富寧)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부장(部將)의 벼슬
을 살았다.
○김사수(金師秀) : 김귀년(金龜年)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현감(縣監)을 지냈
다. 선정비(善政碑)가 있는데 야당(野塘) 홍성민(洪聖民)이 찬(撰)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묘비의 글씨를 썼다.
○김사철(金師哲) : 김귀년(金龜年)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목사(牧使)의 벼슬
을 지냈다.
○김오(金 ) : 김사수(金師秀)의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통어사(統禦使)를지
냈다.
○김순(金淳) : 김오(金 )의 아우이며 음관(蔭官)으로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정(金錠) : 김귀년(金龜年)의 손자이며 음관(蔭官)으로 부장(部將)을 지냈다.
○김구정(金九鼎) : 김오(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직장(直長)이었다.
○김윤정(金潤鼎) : 김사수(金師秀)의 손자이며 음관(蔭官)으로 봉사(奉事)였다.
○김대정(金大鼎) : 김순(金淳)의 아들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
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선(金鐥) : 김구정(金九鼎)의 아들이며 장락정(掌樂正)의 벼슬을 지냈다.
○김해(金垓) : 김윤정(金潤鼎)의 조카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은(金銀) : 김사철(金師哲)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좌랑(佐郞)의 벼슬을
지냈다.
○김제정(金濟鼎) : 김사철(金師哲)의 손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조방장(助防將)을
지냈다.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절의록(節義錄)을 보아라.
○김인길(金仁吉) : 김구정(金九鼎)의 손자이며 진사(進士)로 도사(都事)의 벼슬을
지냈다.
○김인철(金仁哲) : 김대정(金大鼎)의 손자이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태기(金兌起) : 김인철(金仁哲)의 아들이며 호조판서(戶曹判書)의 증직을 받았다.
○김만직(金萬直) : 김선(金鐥)의 손자이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하진(金夏璡) : 김만직(金萬直)의 아들이며 좌윤(左尹)의 증직을 받았다.
○김혼(金混) : 김하진(金夏璡)의 아들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수직을 받았다.
○김형(金珩) : 김태기(金兌起)의 손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득해(金得海) : 김형(金珩)의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는
데 치민(治民)이 알뜰하여 거사비가 있다.
○김치혁(金致赫) : 김태기(金兌起)의 현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지
냈다. 누동(樓洞 ; 다락골). 방동(方洞 ; 사방골). 양지(陽地 ; 양지리). 생졸(生拙)
에서 산다.
pp 111 유현(儒賢)
○김휴(金休) 안동인 전서(典書) 김성목(金成牧)의 아들이다. 호는 학당(學堂)이며
포은 정몽주선생에 따랐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의 벼슬을지
냈고 조선조가 되어 조정에서 한성좌윤의 벼슬을 가지고 불렀지만 따르지 아니하
였다. 서울을 떠나 낙향하면서 읊은 시가 있다.
pp 112 인물과 유행(儒行)(원거인 : 原居人)
○ 김성목(金成牧) 안동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이며 전서(典書)
의 벼슬을 지냈다.
○김익렴(金益廉) : 김성목(金成牧)의 손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左
郞)을 지냈다.
○김기(金基) 안동인. 충장공(忠壯公) 김제정(金濟鼎)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전사함을 애통히 여기고 항상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드릴 것을 마은에 품
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싸움에 나가 본진을 찾아서 정이흥장군(鄭以興
將軍)을 만나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가 금천에서 순절하였다.
pp 121 절의(絶義)
○김제정(金濟鼎) 안동인. 목사(牧使) 김사철(金師哲)의 손자이며 인조조에 무과
(武科)에 올라 인산( 山)의 조방장(助防將)이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의 호란
(胡亂)에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병조참판의 증직과 제사를 내리고 영조조에 충장
(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pp 124 효행(孝行)
○김익정(金益精) 안동인 호는 운암(雲菴). 생원으로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
여 대사헌(大司憲)의 벼슬에 올랐다. 학문이 일세에 뛰어나며 3년거상에 관직을
사양하고 빈민의 구제에 힘쓰며 법에 의하여 관직을 임명하고 법을 지키니 백관
이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김사준(金師俊) 김익정(金益精)의 현손이며 호를 사암(思巖)이라고 하였다. 천성
으로 효성이 독실하며 학식이 고명하였다. 예종조에 참봉(參奉)벼슬을 내렸지만
받지 아니하였다. 명종조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동구 밖에는 그를 기념하는 〈효
자거리〉가 있다.
pp 137 총묘(塚墓)
○ 김성목(金成牧) 안동인. 관 공조전서(工曹典書). 묘는 동면(東面) 학당(學堂)에
있다.
○김휴(金休) 김성목(金成牧)의 아들로 관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이며 묘는 학당
(學堂)에 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주회 - 와! 어마어마한 자료입니다.
▣ 태영(문) -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