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과 우리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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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6-08 23:13 조회2,082회 댓글0건본문
우암 송시열과 우리가문
엊그제 현충일날은 대전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는데, 청주에서 대청댐을 한바퀴돌아 신탄진을 거쳐 발길이 대전 대덕구와 동구 일원으로 닿았습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고건물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는데 은진송씨의 대종가인 쌍청당, 동춘당 송준길(송시열의 13촌)의 동춘고택 및 동춘당, 우암사적공원에 있는 남간정사, 송자대전장판각 등이 널려 있습니다. 이 일대는 은진송씨의 집성촌으로서 동명칭도 송씨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宋村洞이라 합니다.
우암사적공원 유물전시관에 있는 송시열 연보에 보면 (익원공파) 김자점 공의 휘자가 보입니다.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살았던 김자점과 송시열은
---김자점은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인조의 측근으로서 새로 일어나는 청나라와의 실리를 중시한 친청파인 반면,
---송시열은 효종의 측근으로 무너져 가는 명나라와의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한 친명파이고 예학의 거두로서 서로 갈등과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이에 대한 것은 추후 광범위한 심층적인 자료수집과 연구분석이 필요합니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선생 및 은진송씨와 관련된 우리 가문 선조분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자료와 이야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시는 분은 소개하여 주시옵기를...
<디지털한국학>
▣ 김자점(金自點)
시대 조선
생몰년 1588-1651(선조21-효종2)
본관 안동(安東)
자 성지(成之)
호 낙서(洛西)
시호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1588(선조 21)∼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억령(億齡), 아버지는 함($함04)이다.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3. 반(反)사림사회 행동 및 평가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權#시45)·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하여 1650년(효종 1)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새 왕이 구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에서는 즉시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익12)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그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黃#헌07) 등도 각자의 직에서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행위 등 당시 사림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하여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淸選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吳洙彰〉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2/04/07 13:33 (from:61.98.0.57) 조회 : 54
▣ 김응하 장군(철원 교육청)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중기 무신
본관은 안동
철원군 어운면 갈운동 하갈리 출신
김방경의 후손으로 김지사(金地四)의 장남으로 출생, 자는 경희, 시호는 충무
14세에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동생 응해(應海)와 함께 자라면서 사냥을 즐겨 맨손과 단검으로 범과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선조 37(1604)년,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경성에서 변방을 지켰고 31세 때 선천 군수를 하면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1610년 다시 선전관이 되었고, 이어 경원판관을 거쳐 도총부경력 삼수군수 북우후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에 후금이 압록강 건너편에 나라를 세우자 명에서 건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하자, 김응하는 선천군수로서 조방장이 되어 부원수 김경서 휘하에 들어갔다.
다음해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좌영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3월에 명나라 도독 유정이 명나라 군대 3만명을 지휘하여 부차령에서 후금의 군대와 접전 끝에 대패하자, 도독 유정은 자결하고 조선의 구원군만이 후금의 6만대군과 대치하게 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우영장 이일원은 달아났고, 김응하만이 3천의 구원군을 이끌고 고군분투 끝에 전사하고 휘하의 군사는 장수가 죽자 패주하였다.
김응하가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그가 전사하던 다음달에 병조판서를 추증하였고, 5월에 정충사를 용만강가에 짓고 여기에 충혼비를 세워 그의 충절을 널리 선양하였다.
이어 조정에서는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나라에서도 신종때에 요동백에 추봉하였다.
1620년 조정에서 영의정을 추사하였고, 1621년 9월에 훈련도감을 시켜 김응하의 행적을 적은 《충열록》울 간행하였다. 그의 행장록이 남아있기에 그의 행장은 소상하게 남아 전한다.
전에는 김응하의 사당이 네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의 고향인 철원 포충사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에는 철원의 유림이 주관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의 묘정비는 ●송시열이 지었고, 사헌부 지평인 박태웅이 글씨를, 영의정 김수항이 제자를 썼으며, 강원도유형문화재제105호이다.
<문화유적총람>
▣ 유적명칭】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비(遼東伯金應河將軍廟碑)
【관리번호】269-820-199-001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105호
【유적종류】묘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 9리 산 1-1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김응하[선조 13년(1580)-광해군 10년(1619)]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경의(景義)이다. 철원 출신으로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선조 37년(1604)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이항복(李恒福)에 의해 경원 판관(慶源判官)으로 발탁된 뒤 삼수 군수(三守郡守), 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에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정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휘하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하였다.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의 장렬한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조서(詔書)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封)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거북의 등에 귀갑문(龜甲文)을 새기고 확을 파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귀부(龜部)와 비신의 이음 부분에는 보수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비신의 재질은 오석(烏石)이고 귀부와 비갓은 화강암이다. 귀부의 크기는 218cm×275cm×100cm, 비신은 96cm×215cm×32cm, 비갓은 162cm×101cm×35cm이며, 귀부와 비갓의 상태는 양호하나 비신에는 여러곳에 총탄 흔적이 있다.
비문은 앞·뒤로 새겨져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썼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찬(篆)하여 숙종 9년(1683) 10월에 세웠다. 이 비는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강원대학교박물관·강원도 철원군, 1995, <<철원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비 고】1985년 1월 17일 유형문화재 제105호 지정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04/03 00:17 (from:211.57.153.114) 조회 : 57
▣ 민숙공 김언 (안렴사공파)
愍肅公(민숙공 김언) 할아버님의 약력
-1994년 2월 14일 (순절 357주기 기념)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좌승지공파 종친회
愍肅公(민숙공) 할아버님의 약력
1994. 2.14
1. 서기 1588년, 선조21년 음력 6월 탄생, 거금 406년전임
2. 아버님 진사로 洛瑞(낙서), 율곡 선생의 문하생, 평생 불출사, 詩畵(시화)로 벗하고 유유자적, 승정원 좌승지 추증됨, 어머님 전의이씨 병절교위 지내신 희담의 따님
3. 서기 1615년 (28세시) 문과급제, 상봉주부 벼슬 7-8년간 계심, 광해군 폐모론에 불참하여 미관직에서 오래 계심, 36세시 인조반정으로 기성랑으로 승차
19. 그후 난리가 끝나고 세상이 안정됨에 경기도 광주군 기자산에 안장하시고, 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墓碣문을 쓰심 (가전에 의하면 의대와 유품만을 가지고 쓴 허묘였다 함)
<오창지>
▣ 김언
공은 안렴사의 10세손이고 참봉 洛瑞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성천부를 맡았는데 병자호란에 오랑캐가 발호하였다. 공은 성을 지키고 힘을 다해 싸우며 적을 꾸짖고 굽히지 않다가 끝내 나라를 위해 죽었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정려문을 세우고 여러번 추증하여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를 민숙공이라 하였다.
묘갈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짓고 학사 김공 鎭商이 썼으며 죽천 김공 鎭圭가 두전을 하였다.
<증평문화 창간호, 1997>
김득신의 逸話
---류근철 (증평읍 남차리 575, 청안향교 장의)
일화2)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일찍이 북벌론이 일자, 김득신과 의논하고자 찾아왔다. 마침 득신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일어나서 맞이하고는 글 읽기를 계속하자 이에 우암은 말 한마디도 못 꺼내고 돌아갔다고 한다.
<청주시지>
▣ (53) 김성진(金聲振)
본관은 안동, 벼슬은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품성이 질실(質實)하여 허교(虛嬌)함이 없었다.
4세에 모친을 여의고 농사를 지어 정성껏 부친을 모시어 조금도 뜻을 거슬림이 없었다. 일찍 당한 모상(母喪)이 한이 되어 부상(父喪) 때에 병설(竝設)하여 삼년상을 복상(服喪)하였다.
●송시열이 글을 짓고 쓴 묘갈이 있다.
(문헌 : 청주지)
<오창지>
▣ 김봉채(金鳳彩)
공은 현감 진의 증손인데,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우암은 손수 "군자는 마음을 두기를 청천백일과 같이하여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게 한다" 는 십삼 자를 써서 주었으니, 스승의 인정하고 기약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손자 동수는 재예가 뛰어나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문장이 깨끗하였으나 여러번 응시하여도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죽으니 원통하다고 말하였다.
<老隱亭 (1997, 노은정 문화재추진위원회)>
▣ 노은정은 어떤 정자인가?
1. 노은정의 유래
노은정은 서기 1689년경에 통덕랑 金相器 공이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김공의 호 老隱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상기 공의 자는 鼎甫(정보)요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고종 원종 충렬왕의 3조에 걸친 出將入相으로 외우내환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벼슬이 僉議令(첨의령)에 이르렀으며 上洛郡開國公(상락군개국공)의 勳爵(훈작)을 받고, 여원현합군을 지휘하여 일본을 2차례나 정벌한 고려의 명장 金方慶 공의 후손이며,
不事二君의 굳은 절개로 고려에 충절을 바쳐 두문동 忠賢의 반열에 올려 表節祠의 抗節班에 配享되었고, 충청도의 선비들이 충혼과 학덕을 기려 송천서원에 제향된 안렴사 金士廉 공의 11대손이다.
김상기 공은 서기 1639년에 아버지 志亮 공과 어머니 행주기씨의 2남4녀중 2남으로 청주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숙부 봉직랑 志奭공과 숙모 죽산박씨에게 입양되었다.
김상기 공은 忠勳世家의 명문 집안에서 학문을 닦아 영조의 스승 경한재 곽시징 공, 우암 ●송시열 선생 등과 함께 詩文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김상기 공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물욕에 젖지 않아 자기를 위한 학문과 후진의 양성에 전념키 위해 조상대대로 살아온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로 은거하는
▣ 안렴사공 김사렴
후세인들이 공의 학덕과 충절을 추앙하고 흠모하였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은 공에 대해서
"충성이 밝기로는 일월과 같고, 절개가 굳굳하기로는 산악과 같다. (忠昞日月 節高山岳)" 고 칭송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의 고충대절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공의 충절은 백이숙제를 뛰어넘고, 만고에 변치않을 강목과 상도를 더욱 굳건히 심어 놓았다. (其孤忠大節 不讓於夷齊 樹萬古之綱常) "고 늘 일컬어 오기도 하고
또한 "공의 절개와 충성은 일월과 같이 밝고, 도산 기슭에 어린 충절은 백이숙제와 같이 드높도다. (貞忠與日月幷明 陶山一丘與首陽齊高)" 고 하였다.
<문화유적총람>
▣§ 대전 송여해 묘비(宋汝諧墓碑)
분류번호: 300-310-191-098
주소지: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묘비(묘표)
유적내용:
송여해(문종 2년;1452-중종 5년;1510)는 송유의 증손,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던 중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옥천으로 귀양갔다.
중종 반정 후 안동 부사로 근무중 순직했다. 후에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이다.
[前面] 有明朝鮮國 通訓大夫安東大都護府事兼安東鎭兵僉節制使 宋公之墓 淑人延城李氏之墓附左.
정광필이 짓고 ★(서운관정공파)김희수 씀.
크기: 높이 111cm, 폭 60cm, 두께 14cm
참고문헌: 《대전시사》
<청주시지>
▣ (124) 김진장(金震長)
안동사람이며 상락군(上洛君) 방경의 후예, 규암 송인수의 문하에 있었는데 규암이 그의 모습이 장량과 같다하여 자방)子房이라 자(字)를 했다 한다.
1552년(명종 7년) 도사를 지내다가 돌아와 학문에 전심했다. 동네 아래에 반곡(盤谷)을 쌓았으므로 반곡이라 자호(自號)하고 제영(題詠)이 있었다고 한다.
<청주를 노래한 한시 淸州吟 (임동철, 청주문화원 1998)>
▣ 金震長 (? - ?)
조선문인. 자를 子房이라 했고 안동인이며 상락군 방경의 후예이다. 圭庵 宋麟壽의 문하에서 수업했는데 규암이 그의 모습이 張良과 같다하여 자방이라 자를 했다 한다.
1552년(명종7)에 都事를 지내다가 버리고 돌아와 학문에 전심했다. 동네 아래에 盤谷을 쌓았으므로 반곡이라 自號하고 위의 제영이 있다.
盤谷池亭 반곡지정
孤山孤住漢水濱 고산고주한수빈 ---외로운 산 한수가에 외로이 거하는데
雲霧倂軒節點鹿 운무병헌절점록 ---구름과 안개 동헌을 가려 한 점의 티끌도 없네
斜日斷橋僧獨渡 사일단교승독도 ---끊어진 다리로 해지는데 중 혼자 건너고
平沙秋渚?初賓 평사추저?초빈 ---가을 물가 평평한 모래톱에 기러기 첫 손님이네
雨如水墨圖新就 우여수묵도신취 ---비 내리니 수묵화 새로 그린 듯
晴似蛾眉?粉均 청사아미?분균 ---맑게 개이니 미인이 방금 분단장 한 듯하네
淮擬西湖形勝是 회의서호형승시 ---서호의 승경과 견줄 만하여
不知人有看梅人 부지인유간매인 --- 사람 있는 줄도 모르고 매화만 바라보네
[淸州誌]
▣ 김재원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발용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정중 - 모든면에 감사 드립니다
▣ 김윤만 -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엊그제 현충일날은 대전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는데, 청주에서 대청댐을 한바퀴돌아 신탄진을 거쳐 발길이 대전 대덕구와 동구 일원으로 닿았습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고건물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는데 은진송씨의 대종가인 쌍청당, 동춘당 송준길(송시열의 13촌)의 동춘고택 및 동춘당, 우암사적공원에 있는 남간정사, 송자대전장판각 등이 널려 있습니다. 이 일대는 은진송씨의 집성촌으로서 동명칭도 송씨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宋村洞이라 합니다.
우암사적공원 유물전시관에 있는 송시열 연보에 보면 (익원공파) 김자점 공의 휘자가 보입니다.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살았던 김자점과 송시열은
---김자점은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인조의 측근으로서 새로 일어나는 청나라와의 실리를 중시한 친청파인 반면,
---송시열은 효종의 측근으로 무너져 가는 명나라와의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한 친명파이고 예학의 거두로서 서로 갈등과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이에 대한 것은 추후 광범위한 심층적인 자료수집과 연구분석이 필요합니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선생 및 은진송씨와 관련된 우리 가문 선조분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자료와 이야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시는 분은 소개하여 주시옵기를...
<디지털한국학>
▣ 김자점(金自點)
시대 조선
생몰년 1588-1651(선조21-효종2)
본관 안동(安東)
자 성지(成之)
호 낙서(洛西)
시호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1588(선조 21)∼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억령(億齡), 아버지는 함($함04)이다.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3. 반(反)사림사회 행동 및 평가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權#시45)·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하여 1650년(효종 1)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새 왕이 구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에서는 즉시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익12)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그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黃#헌07) 등도 각자의 직에서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행위 등 당시 사림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하여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淸選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吳洙彰〉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2/04/07 13:33 (from:61.98.0.57) 조회 : 54
▣ 김응하 장군(철원 교육청)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중기 무신
본관은 안동
철원군 어운면 갈운동 하갈리 출신
김방경의 후손으로 김지사(金地四)의 장남으로 출생, 자는 경희, 시호는 충무
14세에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동생 응해(應海)와 함께 자라면서 사냥을 즐겨 맨손과 단검으로 범과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선조 37(1604)년,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경성에서 변방을 지켰고 31세 때 선천 군수를 하면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1610년 다시 선전관이 되었고, 이어 경원판관을 거쳐 도총부경력 삼수군수 북우후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에 후금이 압록강 건너편에 나라를 세우자 명에서 건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하자, 김응하는 선천군수로서 조방장이 되어 부원수 김경서 휘하에 들어갔다.
다음해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좌영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3월에 명나라 도독 유정이 명나라 군대 3만명을 지휘하여 부차령에서 후금의 군대와 접전 끝에 대패하자, 도독 유정은 자결하고 조선의 구원군만이 후금의 6만대군과 대치하게 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우영장 이일원은 달아났고, 김응하만이 3천의 구원군을 이끌고 고군분투 끝에 전사하고 휘하의 군사는 장수가 죽자 패주하였다.
김응하가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그가 전사하던 다음달에 병조판서를 추증하였고, 5월에 정충사를 용만강가에 짓고 여기에 충혼비를 세워 그의 충절을 널리 선양하였다.
이어 조정에서는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나라에서도 신종때에 요동백에 추봉하였다.
1620년 조정에서 영의정을 추사하였고, 1621년 9월에 훈련도감을 시켜 김응하의 행적을 적은 《충열록》울 간행하였다. 그의 행장록이 남아있기에 그의 행장은 소상하게 남아 전한다.
전에는 김응하의 사당이 네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의 고향인 철원 포충사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에는 철원의 유림이 주관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의 묘정비는 ●송시열이 지었고, 사헌부 지평인 박태웅이 글씨를, 영의정 김수항이 제자를 썼으며, 강원도유형문화재제105호이다.
<문화유적총람>
▣ 유적명칭】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비(遼東伯金應河將軍廟碑)
【관리번호】269-820-199-001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105호
【유적종류】묘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 9리 산 1-1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김응하[선조 13년(1580)-광해군 10년(1619)]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경의(景義)이다. 철원 출신으로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선조 37년(1604)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이항복(李恒福)에 의해 경원 판관(慶源判官)으로 발탁된 뒤 삼수 군수(三守郡守), 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에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정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휘하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하였다.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의 장렬한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조서(詔書)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封)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거북의 등에 귀갑문(龜甲文)을 새기고 확을 파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귀부(龜部)와 비신의 이음 부분에는 보수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비신의 재질은 오석(烏石)이고 귀부와 비갓은 화강암이다. 귀부의 크기는 218cm×275cm×100cm, 비신은 96cm×215cm×32cm, 비갓은 162cm×101cm×35cm이며, 귀부와 비갓의 상태는 양호하나 비신에는 여러곳에 총탄 흔적이 있다.
비문은 앞·뒤로 새겨져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썼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찬(篆)하여 숙종 9년(1683) 10월에 세웠다. 이 비는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강원대학교박물관·강원도 철원군, 1995, <<철원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비 고】1985년 1월 17일 유형문화재 제105호 지정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04/03 00:17 (from:211.57.153.114) 조회 : 57
▣ 민숙공 김언 (안렴사공파)
愍肅公(민숙공 김언) 할아버님의 약력
-1994년 2월 14일 (순절 357주기 기념)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좌승지공파 종친회
愍肅公(민숙공) 할아버님의 약력
1994. 2.14
1. 서기 1588년, 선조21년 음력 6월 탄생, 거금 406년전임
2. 아버님 진사로 洛瑞(낙서), 율곡 선생의 문하생, 평생 불출사, 詩畵(시화)로 벗하고 유유자적, 승정원 좌승지 추증됨, 어머님 전의이씨 병절교위 지내신 희담의 따님
3. 서기 1615년 (28세시) 문과급제, 상봉주부 벼슬 7-8년간 계심, 광해군 폐모론에 불참하여 미관직에서 오래 계심, 36세시 인조반정으로 기성랑으로 승차
19. 그후 난리가 끝나고 세상이 안정됨에 경기도 광주군 기자산에 안장하시고, 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墓碣문을 쓰심 (가전에 의하면 의대와 유품만을 가지고 쓴 허묘였다 함)
<오창지>
▣ 김언
공은 안렴사의 10세손이고 참봉 洛瑞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성천부를 맡았는데 병자호란에 오랑캐가 발호하였다. 공은 성을 지키고 힘을 다해 싸우며 적을 꾸짖고 굽히지 않다가 끝내 나라를 위해 죽었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정려문을 세우고 여러번 추증하여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를 민숙공이라 하였다.
묘갈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짓고 학사 김공 鎭商이 썼으며 죽천 김공 鎭圭가 두전을 하였다.
<증평문화 창간호, 1997>
김득신의 逸話
---류근철 (증평읍 남차리 575, 청안향교 장의)
일화2)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일찍이 북벌론이 일자, 김득신과 의논하고자 찾아왔다. 마침 득신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일어나서 맞이하고는 글 읽기를 계속하자 이에 우암은 말 한마디도 못 꺼내고 돌아갔다고 한다.
<청주시지>
▣ (53) 김성진(金聲振)
본관은 안동, 벼슬은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품성이 질실(質實)하여 허교(虛嬌)함이 없었다.
4세에 모친을 여의고 농사를 지어 정성껏 부친을 모시어 조금도 뜻을 거슬림이 없었다. 일찍 당한 모상(母喪)이 한이 되어 부상(父喪) 때에 병설(竝設)하여 삼년상을 복상(服喪)하였다.
●송시열이 글을 짓고 쓴 묘갈이 있다.
(문헌 : 청주지)
<오창지>
▣ 김봉채(金鳳彩)
공은 현감 진의 증손인데,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우암은 손수 "군자는 마음을 두기를 청천백일과 같이하여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게 한다" 는 십삼 자를 써서 주었으니, 스승의 인정하고 기약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손자 동수는 재예가 뛰어나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문장이 깨끗하였으나 여러번 응시하여도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죽으니 원통하다고 말하였다.
<老隱亭 (1997, 노은정 문화재추진위원회)>
▣ 노은정은 어떤 정자인가?
1. 노은정의 유래
노은정은 서기 1689년경에 통덕랑 金相器 공이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김공의 호 老隱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상기 공의 자는 鼎甫(정보)요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고종 원종 충렬왕의 3조에 걸친 出將入相으로 외우내환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벼슬이 僉議令(첨의령)에 이르렀으며 上洛郡開國公(상락군개국공)의 勳爵(훈작)을 받고, 여원현합군을 지휘하여 일본을 2차례나 정벌한 고려의 명장 金方慶 공의 후손이며,
不事二君의 굳은 절개로 고려에 충절을 바쳐 두문동 忠賢의 반열에 올려 表節祠의 抗節班에 配享되었고, 충청도의 선비들이 충혼과 학덕을 기려 송천서원에 제향된 안렴사 金士廉 공의 11대손이다.
김상기 공은 서기 1639년에 아버지 志亮 공과 어머니 행주기씨의 2남4녀중 2남으로 청주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숙부 봉직랑 志奭공과 숙모 죽산박씨에게 입양되었다.
김상기 공은 忠勳世家의 명문 집안에서 학문을 닦아 영조의 스승 경한재 곽시징 공, 우암 ●송시열 선생 등과 함께 詩文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김상기 공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물욕에 젖지 않아 자기를 위한 학문과 후진의 양성에 전념키 위해 조상대대로 살아온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로 은거하는
▣ 안렴사공 김사렴
후세인들이 공의 학덕과 충절을 추앙하고 흠모하였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은 공에 대해서
"충성이 밝기로는 일월과 같고, 절개가 굳굳하기로는 산악과 같다. (忠昞日月 節高山岳)" 고 칭송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의 고충대절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공의 충절은 백이숙제를 뛰어넘고, 만고에 변치않을 강목과 상도를 더욱 굳건히 심어 놓았다. (其孤忠大節 不讓於夷齊 樹萬古之綱常) "고 늘 일컬어 오기도 하고
또한 "공의 절개와 충성은 일월과 같이 밝고, 도산 기슭에 어린 충절은 백이숙제와 같이 드높도다. (貞忠與日月幷明 陶山一丘與首陽齊高)" 고 하였다.
<문화유적총람>
▣§ 대전 송여해 묘비(宋汝諧墓碑)
분류번호: 300-310-191-098
주소지: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묘비(묘표)
유적내용:
송여해(문종 2년;1452-중종 5년;1510)는 송유의 증손,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던 중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옥천으로 귀양갔다.
중종 반정 후 안동 부사로 근무중 순직했다. 후에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이다.
[前面] 有明朝鮮國 通訓大夫安東大都護府事兼安東鎭兵僉節制使 宋公之墓 淑人延城李氏之墓附左.
정광필이 짓고 ★(서운관정공파)김희수 씀.
크기: 높이 111cm, 폭 60cm, 두께 14cm
참고문헌: 《대전시사》
<청주시지>
▣ (124) 김진장(金震長)
안동사람이며 상락군(上洛君) 방경의 후예, 규암 송인수의 문하에 있었는데 규암이 그의 모습이 장량과 같다하여 자방)子房이라 자(字)를 했다 한다.
1552년(명종 7년) 도사를 지내다가 돌아와 학문에 전심했다. 동네 아래에 반곡(盤谷)을 쌓았으므로 반곡이라 자호(自號)하고 제영(題詠)이 있었다고 한다.
<청주를 노래한 한시 淸州吟 (임동철, 청주문화원 1998)>
▣ 金震長 (? - ?)
조선문인. 자를 子房이라 했고 안동인이며 상락군 방경의 후예이다. 圭庵 宋麟壽의 문하에서 수업했는데 규암이 그의 모습이 張良과 같다하여 자방이라 자를 했다 한다.
1552년(명종7)에 都事를 지내다가 버리고 돌아와 학문에 전심했다. 동네 아래에 盤谷을 쌓았으므로 반곡이라 自號하고 위의 제영이 있다.
盤谷池亭 반곡지정
孤山孤住漢水濱 고산고주한수빈 ---외로운 산 한수가에 외로이 거하는데
雲霧倂軒節點鹿 운무병헌절점록 ---구름과 안개 동헌을 가려 한 점의 티끌도 없네
斜日斷橋僧獨渡 사일단교승독도 ---끊어진 다리로 해지는데 중 혼자 건너고
平沙秋渚?初賓 평사추저?초빈 ---가을 물가 평평한 모래톱에 기러기 첫 손님이네
雨如水墨圖新就 우여수묵도신취 ---비 내리니 수묵화 새로 그린 듯
晴似蛾眉?粉均 청사아미?분균 ---맑게 개이니 미인이 방금 분단장 한 듯하네
淮擬西湖形勝是 회의서호형승시 ---서호의 승경과 견줄 만하여
不知人有看梅人 부지인유간매인 --- 사람 있는 줄도 모르고 매화만 바라보네
[淸州誌]
▣ 김재원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발용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정중 - 모든면에 감사 드립니다
▣ 김윤만 -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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