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와 우리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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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6-12 03:28 조회1,561회 댓글0건본문
율곡 이이와 우리가문
조선조 성리학에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율곡 이이 선생과 관련한 우리 가문 선조분들의 기록을 찾아 보았습니다.
안렴사공파 김낙서와 그의 아들 김언, 익원공파 김자점은 율곡의 문인이고,
서운관정공파 하당공 김첨과 몽촌공 김수는 율곡과 정적 관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창지>
▣ 김낙서(金洛瑞) (1553-1623)
공은 진사 하서의 아우인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특별히 재랑(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아들 진과 언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자손의 귀함으로 인하여 승지에 추증되었다.
<청원군지 (1990.12)>
▣ 김언 (金 王+言) (1588-1637)
조선조의 충신 김언은 본관은 안동. 자는 沃潤,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에서 김낙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광해군1년 (1609)에 진사가 되었으며, 광해군7년(1615)에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인조반정으로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항복하라는 위협을 물리치고 항전하다가 전사하여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愍肅公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현종2년(1661)에 정문이 세워졌다.
묘소는 청원군 오창면 복현리에 있으며 송시열이 지은 묘갈이 있다.
문헌 : 청주시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金王+言(김언)
1588(선조21)-1636(인조14). 조선 인조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은 汝潤(여윤). 아버지는 진사 洛瑞(낙서)이다.
1609년(광해군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8년뒤 겨우 봉상시주부에 머물렀다.
인조반정후 부안현감, 예조정랑, 병조정랑, 성균관사예, 예빈시정. 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정렬하여 관찰사 홍명구에게 예속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때 허적이 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6)에 허적이 처형된뒤 아들 世輔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愍肅(민숙)이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현종실록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徐信錫>
<여주군지>
▣ pp1746 仁祖反正(인조반정)의 성공
그런 가운데 가장 심하게 박해받은 것은 서인들로서 광해군 말기 즉 1620년대에 들었을 때에는 조정에서 서인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서인 가운데서는 1620년대 초부터 역모의 혐의가 있었던 사람은 함흥판관을 지낸 李貴(이귀)와 儒生(유생) 金自點(김자점)이다.
이 두사람은 다같이 栗谷(●율곡 이이)과 牛溪(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들이요.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아우 김자겸의 부인이었으니까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먼저 양사에서 이귀. 김자점 두사람이 큰일을 꾸민다고 들고 일어나자 김자점은 재빨리 이귀의 딸인 弟嫂(제수)를 궁중에 들여보내 광해군이 가장 총애하는 상궁 김씨를 뇌물로 포섭하였다.
▣ 국역 석릉세적 (1996)
④ 荷堂공(휘瞻) 및 夢村공(휘수)의 기록과 필적
[癸甲日錄]에 의하면
선조16년 (1583) 교리 휘瞻이 庶 ?의 허통문제에 있어 ●이율곡을 탄핵하려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지례현감으로 특지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유학 신 ?(신립의 형)이 김응남, 우성전, 홍흔, 김첨, 김수 등이 조정에서 너무 권세를 부린다고 상소한 기록도 전한다.
또한 [율곡집]에 의하면
암행어사 순행문제에 대해 ●이율곡과 몽촌공이 의견을 달리하는 글이 엿보이는데 몽촌공은 암행어사 순행시 사전예고제를 주장한 것으로서 다소 융통성있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 김첨(金瞻){2}
1542(중종 3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첨(子瞻), 호는 하당(荷塘)·남강(南岡)·동강(東岡). 아버지는 전한 홍도(弘度)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9년 사가독서하였다.
그해에 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이이(李珥)가 올린 상소에 대해 옳지 않다고 탄핵하였으며, 1581년 이조좌랑으로서 박근원을 이조참판에 등용할 것을 주청하였다.
1582년 교리를 거쳐 고경명(高敬命)대신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재08傷敬差官)으로 나아갔다.
이듬해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뒤 이이를 탄핵하다가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좌천되고, 1584년 파직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죽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與地圖書. 〈朴翼煥〉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김재원 -
▣ 김영환 - 많은 공부 되었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중요한 부분을 명쾌하게 정리해 가고 계십니다.
▣ 김정중 - 장 읽었습니다
▣ 태영/문 -
조선조 성리학에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율곡 이이 선생과 관련한 우리 가문 선조분들의 기록을 찾아 보았습니다.
안렴사공파 김낙서와 그의 아들 김언, 익원공파 김자점은 율곡의 문인이고,
서운관정공파 하당공 김첨과 몽촌공 김수는 율곡과 정적 관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창지>
▣ 김낙서(金洛瑞) (1553-1623)
공은 진사 하서의 아우인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특별히 재랑(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아들 진과 언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자손의 귀함으로 인하여 승지에 추증되었다.
<청원군지 (1990.12)>
▣ 김언 (金 王+言) (1588-1637)
조선조의 충신 김언은 본관은 안동. 자는 沃潤,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에서 김낙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광해군1년 (1609)에 진사가 되었으며, 광해군7년(1615)에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인조반정으로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항복하라는 위협을 물리치고 항전하다가 전사하여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愍肅公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현종2년(1661)에 정문이 세워졌다.
묘소는 청원군 오창면 복현리에 있으며 송시열이 지은 묘갈이 있다.
문헌 : 청주시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金王+言(김언)
1588(선조21)-1636(인조14). 조선 인조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은 汝潤(여윤). 아버지는 진사 洛瑞(낙서)이다.
1609년(광해군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8년뒤 겨우 봉상시주부에 머물렀다.
인조반정후 부안현감, 예조정랑, 병조정랑, 성균관사예, 예빈시정. 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정렬하여 관찰사 홍명구에게 예속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때 허적이 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6)에 허적이 처형된뒤 아들 世輔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愍肅(민숙)이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현종실록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徐信錫>
<여주군지>
▣ pp1746 仁祖反正(인조반정)의 성공
그런 가운데 가장 심하게 박해받은 것은 서인들로서 광해군 말기 즉 1620년대에 들었을 때에는 조정에서 서인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서인 가운데서는 1620년대 초부터 역모의 혐의가 있었던 사람은 함흥판관을 지낸 李貴(이귀)와 儒生(유생) 金自點(김자점)이다.
이 두사람은 다같이 栗谷(●율곡 이이)과 牛溪(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들이요.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아우 김자겸의 부인이었으니까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먼저 양사에서 이귀. 김자점 두사람이 큰일을 꾸민다고 들고 일어나자 김자점은 재빨리 이귀의 딸인 弟嫂(제수)를 궁중에 들여보내 광해군이 가장 총애하는 상궁 김씨를 뇌물로 포섭하였다.
▣ 국역 석릉세적 (1996)
④ 荷堂공(휘瞻) 및 夢村공(휘수)의 기록과 필적
[癸甲日錄]에 의하면
선조16년 (1583) 교리 휘瞻이 庶 ?의 허통문제에 있어 ●이율곡을 탄핵하려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지례현감으로 특지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유학 신 ?(신립의 형)이 김응남, 우성전, 홍흔, 김첨, 김수 등이 조정에서 너무 권세를 부린다고 상소한 기록도 전한다.
또한 [율곡집]에 의하면
암행어사 순행문제에 대해 ●이율곡과 몽촌공이 의견을 달리하는 글이 엿보이는데 몽촌공은 암행어사 순행시 사전예고제를 주장한 것으로서 다소 융통성있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 김첨(金瞻){2}
1542(중종 3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첨(子瞻), 호는 하당(荷塘)·남강(南岡)·동강(東岡). 아버지는 전한 홍도(弘度)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9년 사가독서하였다.
그해에 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이이(李珥)가 올린 상소에 대해 옳지 않다고 탄핵하였으며, 1581년 이조좌랑으로서 박근원을 이조참판에 등용할 것을 주청하였다.
1582년 교리를 거쳐 고경명(高敬命)대신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재08傷敬差官)으로 나아갔다.
이듬해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뒤 이이를 탄핵하다가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좌천되고, 1584년 파직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죽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與地圖書. 〈朴翼煥〉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김재원 -
▣ 김영환 - 많은 공부 되었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중요한 부분을 명쾌하게 정리해 가고 계십니다.
▣ 김정중 - 장 읽었습니다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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