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암,대통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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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군) 작성일02-06-17 21:53 조회1,663회 댓글0건본문

조종암은 가평군 함녀 대보리에 소재한 바위위에 문자를 조각하고 비석을 세우고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때는 병자호란 당시 서울 남한산성에서 40여일간을 청국 오랑캐와 대항하며 싸우던 인조 대왕이하 관리와 군인들이 전세가 크게 불리하게 되자 그래도 끝까지 죽음으로 싸워야 된다고 하는 청음 김상헌 선생의 주장과 죄없는 백성을 더이상 흉악한 오랑캐의 말발굽이래 짓 밝히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청나라에 항복하자는 최명길의 주장이 맞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인조대왕은 한때의 분함을 참고 나라를 이어 나가겠다는 결의로 항복하게 되었는데 저 흉악무도한 오랑캐들은 만고에 없는 굴욕적 항복조건을 요구하였으니 즉 임금으로 하여금 오랑캐 추장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도록 시켰을 뿐만 아니라 두 왕자와 척화파 대신의 자제등을 인질로 무고한 남녀 약100만명을 포로로 잡아가고 또 삼학사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항상 있을 전쟁에서 국제법을 어긴 것이요, 우리 민족의 긍지에 먹칠을 하고, 그 정기를 꺾어 버리려는 악랄한 폭행이었던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임을 자랑했던 우리 민족은 이때부터 오로지 복수만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씻어 버릴 수 있음을 알고 그들을 쳐부수려는 기회를 엿보던 가운데 오히려 청나라가 우리의 우방국인 명나라를 쳐서 1644년3월19일 명나라를 멸망케 하고 거대한 나라가 되어 버림으로 인하여 그 복수의 길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것이 인조대왕의 북벌정책이라고 이른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 나라를 위하여 7년동안이나 걸쳐 약40만의 큰 군사를 파견하여 도와 주었던 우방국이었으니 더욱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효종대왕이 심양에서 9년동안 인질에서 풀려 돌아올 때 심양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명나라 구의사를 함께 데리고 서울로 왔으니 이는 장차 북쪽 청나라 오랑캐를 칠 때 안내를 맡은 향도관으로써 한민족의 협조를 받고져 함이었다.
효종이 임금이 되어 우암 송시열 선생과 이완 대장을 주축으로 북벌의 큰 사업을 추진하던 중 김자점의 밀고로 인하여 청나라가 미리 알고 대군을 이끌고 압박하니 부득이 중지하게 되었으나 은밀히 매년 국가세입의 3분의 1을 군자금으로 왕실에 저축하여 감추어 두고 군량미는 절의 창고에다 숨기고 군대는 중으로 위장하여 훈련하는등 준비를 계속하며 언제인가 때가 오면 복수를 하겠다는 굳은 결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효종이 일찍 돌아가게 되니 우암 송시열 선생은 초야에 물러나 살게 되었지만 효종의 큰 사업인 북벌계획이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숙종10년인 서기1684년에 가평군 하면 대보리 대보산 절벽 바위위에 심양 옥중에서 청음 김상헌 선생이 구하여 온 의종 황제 어필인 사무사[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세자를 본뜨고 효종이 대신에게 내려준 일모도원 지통재심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을 써서 그 당시 가평 군수이던 이제사에게 부탁하여 보내니 이군수가 허격,백해명등 여러선비들과 힘을 합하여 이를 선조대왕 어필인 만절필동 재조심방(일만번 꺾여도 반드시 동녘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 과 낭선군이 쓴 조종암(임금을 뵈이는 바위)등을 함께 조각하고, 의종황제가 순국한 날인 3월19일에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와 주었던 신종황제의 은혜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면서 부터 유래가 되었다.
순조31년인 서기 1831년에 구의사의 후손이 옮겨와 대통행문와 구의행사를 시작하고, 화서 이항노선생과 그의 문인 유중교,최익현,유인석,이직신 같은 당대 충신들이 적극 참여 하여 매년 음력1월4일 제사를 받들다가 일제의 침략을 당하게 되어 진리의 불멸과 정의의 승리를 더욱 굳게 다짐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됨과 아울러 서울 비원에 있던 대보단과 충복 화양 동에 있던 만동묘등이 폐지되고, 조종암의 대통묘마저 1934년부터 폐지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1911년 오랑캐 청국은 신해혁명으로 멸망되고 1945년 우리나라도 일제로부터 해방 되었으니 300년의 원한이 이에서 풀리고, 35년의 압박을 여기에서 벗어났다.
그후 1958년 가평 관민유지들의 발기로 대통묘제향을 다시 지내기 시작하였고, 1975년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으며 1977년 전국유림600여명의 성금으로 조종재를 중건하고, 이듬해에 다시 대통행묘를 창건하여 중앙에 태조, 신종, 의종 세황제를 모시고 동쪽에는 김상선선생, 홍익한학사, 윤집학사, 오달제학사, 김응하장군, 임경업장군, 이항노 선생, 유인석, 왕이문, 류계산대장등 아홉분을 모시고, 그 서쪽에는 명나라 왕미승, 마삼임, 황공, 정선갑, 양복길, 배삼생, 왕문양 등 아홉 의사를 모시고 매년 음력3월19일 제향을 받들게 되었다.
여기 이 조종암 바위에 뭉쳐진 정의로운 정신만은 우리나라 주체성에 커다란 교훈이 될 것이고, 이은의를 잊지 아니하는 예의동방이 찬란한 정신이 전세계의 퍼져 나갈때 천하는 길이 화평할 것이니 이곳이야 말로 의로운 역사의 살아있는 표상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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