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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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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6-18 06:47 조회1,5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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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21







1999년에 괴산군 문화원에서 펴낸 [괴산군 설화집]에 보면 김득신 묘와 관련한 설화가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 김득신 선생이 아니고 아버지이신 남봉 김치 묘 이야기 같습니다.



위 책자에 실린 남봉 김치 관련 설화 몇편을 몇차례에 걸쳐 연재 소개하고자 합니다.









<괴산군 설화집, 1999, 괴산군 문화원>

▣ 輓詞(만사)가 잡아준 김득신 묘



저기 가면 유명한 백곡 김득신의 모이가 있어. 율리, 밤티에 가면 그 모이가 있어. 숙종대 청백리를 했는데, 경상도 부사를 하다가 죽었거든.



그 사람이 인저, 부사면 지금 도지사쯤 되는데. 한양으로 상여를 메고 가는데, 저 분티재가 옛날에는 영남대로여. 경상도에서 보은, 미원 해서 한양을 가면 직방이거든.



6.25 때까지만 해도 영남에서 소를 끌고 서울로 가는 수장수들이 줄을 이었어. 그래 상여를 메고 가는데. 분티재를 넘어 오다가 잠시 쉬었는데. 옛날에는 유명한 사람은 상여 갈 때 輓詞를 수십개씩 들고 가잖아?









그래 상여를 땅에 내려 놓고 상여꾼이 쉬면 만사를 들고 가던 사람들도 상여에 기대 놓거나 나무 같은데 기대 놓고 쉬는 거여. 그런데 바람이 휙 불더니 만사 하나가 하늘로 날아 오르더니 밤티로 날아가는 거여.



만사가 꽤 크거든. 그 큰 만사가 바람에 날아서 밤티쪽으로 날아가는 겨. 그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앉아서 쉬던 사람들이 모두 놀래서 일어나 쳐다 보지.



그러니 그냥 둘 수 없어 사람들이 쫒아 갔는데 고개에서 한 3-4km는 될껴. 쫓아가니 그게 밤티 앞산에 내려 앉은겨. 이상하거든. 그래 상주한테 그 얘길하니까. 상주가 그 사람을 따라 가 본겨. 그랬더니 참말로 만사가 쫙 펴진 채 반듯하게 있는겨.









그래 지관 보고 "이곳 지리가 어떠냐?" 하니, 지관이 보더니 "자리가 좋다" 고. 그래서 상여를 한양으로 매고 가다가 만사가 날아가 앉은 자리에 모이를 쓰고, 그래 거기에 백곡의 자손이 살고 있어. 거기에도 있고 괴산에도 있어. <증평읍 남차리, 류근철-남 70세>















<증평출장소 홈페이지>



● 거북모양, 개 짖는 소리에서 유래



남봉 김치(金緻 : 1577~1625)는 1597년(선조30)에 알성문과 병과로 급제, 설서(設書 : 세자시강원의 정7품)를 거쳐 1608년에 조정 관리들의 휴가연수를 담당하는사가독서를 담당했다.



광해군 때 사북시정, 이조참의, 동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홍문관교리, 부제학등을 역임하고 정3품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됐다.



이이첨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돼서는 영창대군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충남 병천면 백전리에서 괴산 능촌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차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에 자기의 관상을 보니 그해에 죽게 됐는지라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변성을 만나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과 사전에 내통해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정세변화에 따라서 왕위를 위협할 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학정을일삼으므로 인헌황후(좌찬성 구사맹의 딸)의 아들인 종(倧, 인조 : 1595-1637)은 조정에 대북파와 견원지간인 서인 일파와 경기 · 충청지방의 관리들을 포섭해 반정을 일으킬 것을 모의한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기 전 어느 여름날 심기원이 그를 찾아와서 능양군(인조)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기에 이곳 율리의 물치폭포에서 목욕한 후 소반에 보를 놓고 점을 쳐 보니 임금이 될 쾌인지라 이를 극비로 하고 반정을 일으킬 날을 잡아 주는데 천파일로 잡아주고 심기원의 심복이 될 것을 다짐한다.



그가 밀담을 마치고 오랜 노독으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난데없이 한 밤중에 동편 산에서 개가 짓는 소리가 3번 들리므로 그는 잠에서 벌떡 일어나 "이 앞산이 무슨 산이냐?" 하고 물으니 그의 심복 하나가 대답하기를 "이 산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구산이라고 합니다"하니 점술을 연구해 천문에 밝고, 풍수에 조예가 있는 백곡 김치는 말하기를 "아니다 저곳에서 개가 3번 짖었으니 저 산은 좌구산이 틀림없다"하면서 "누가 염탐을 하러 오는 것이 틀림없으니, 이곳을 빨리 떠나자"하고 서둘러 모두 이곳을 떠나므로 난을 무사히 피했다고 한다.







그 후 인조는 1623년 3월 13일 밤에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의 병력 700여명과 능양군이 이끄는 친병과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여명이 합세해 인조 반정을 성공시킨다.



김치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다시 유배에서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3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됐으나 그 해에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을 괴산 능촌으로 모시려했으나 상여가 이곳 율리재를 넘을 때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의 그의 산소 자리에 앉으므로 그 곳에 안장했다고 그 후 후손들이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지낸 보천에서 율리에 이른 깊은 골짜기를 뜻하는 심곡을 그의호로 정했을 가능성과 유배를 당할 때는 근처에, 산소의 우연성으로 미루어 이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 김태서 -

▣ 태영/문 -

▣ 김재원 -

▣ 김정중 - 저의 중형은 진중(進中)입니다 詩를 쓰고요~ 혼동 없으시길.. 주회대부님^-^

▣ 김항용 -

▣ 김영환 -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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