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화림촌(花林村)_02 산기슭에 산재한 고려 고분 10여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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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 발용 작성일08-12-01 20:09 조회2,303회 댓글4건본문
아, 화림촌(花林村)
- 안김(安金) 최고(最古)의 선영(先塋)을 찾아서 / 02 산기슭에 산재한 고려 고분 10여 기
권헌규 씨 일행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우리 일행은 ‘화림들’ 뒤쪽 야산으로 향했다. 낙엽이 이미 졌건만 20~30년 된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서 안동대에서 발굴한 고려 고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세월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산길이 희미하다. 두툼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장딴지와 손등이 여기저기 긁혔다. 꽤 오래 산 속을 뒤졌지만 고려 고분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각기 흩어져 산기슭을 따라 봉분들을 살폈다.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이곳이라고 했는데…….
마음이 너무 성급했다. 뜻밖의 일이라 일행 모두 약간 흥분된 상태였던 것 같다. 권헌규 씨는 고려 고분과 화림사(花林寺)로 추정되는 절터를 각기 설명해 주었는데, 말을 잘못 알아듣고 먼저 절터로 향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약간 돌출된 산모롱이에 있는 근래 무덤(쌍분) 뒤쪽이 고려 고분이 있는 곳으로 들었다는 발용 종친의 말씀이 옳았다. 그 때문에 길도 없는 곳에서 한참을 헤맸다. 대신 우리가 찾던 고려 고분 외에 다른 고려 고분 두어 기를 보았다.
▲고려 고분으로 추정되는 고총. 20~30년생 소나무와 잡목으로 뒤덮여 있다.
▲낙엽 속에서도 봉분 주위를 돌로 쌓은 형태가 드러나 보인다.
얼마 후 발용 종친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우리 일행은 한곳으로 모였다. 산줄기를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지런하게 묘를 쓴 곳이었다. 맨 위에 권씨 무덤이 있고, 바로 그 아래 고려 고분이 있었다. 요즘 무덤과 달리 봉분 주위를 네모꼴[長方形]으로 둘러싼 봉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전형적인 고려시대 무덤 양식이었다. 고려 고분 밑에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무덤(상하분)이 있었다.
▲안동대에서 발굴한 고려 고분. 발굴 조사 후 성분(成墳)한 때문에 다른 고려 고분들보다 봉분이 훨씬 두드러져 보인다.
하지만 이 무덤이 안동대에서 발굴한 그 고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 인근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이 때문에 사진을 찍을 생각을 못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려 고분 아래쪽을 살피러 내려가면서 대수롭잖게 찍은 두 컷이 전부였다.
밭 근처까지 내려오는 동안 고려 고분을 몇 기 더 볼 수 있었고, 맨 아래쪽 봉분은 평토(平土)가 돼 있었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안동대에서 발굴할 당시 평토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산 중턱에서 아래쪽으로 이어진 고분들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가족 무덤 같다는 생각을 할 것 같았다.
우리가 산 중턱에서 본 고분이 안동대에서 발굴한 고려 고분인지 재확인하기 위해 발용 종친이 권헌규 씨가 일하는 밭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핸드폰이 울리고, 우리가 본 고분이 맞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일정이 빠듯하고, 배영동 교수와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또 산 속을 헤매느라 다들 지쳐 있어서 다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산줄기를 향해 사진을 찍고, 멀리서 목례를 하였다.
▲'화림들'에서 바라본 고려 고분 방향. 산기슭에서부터 비행구름 방향으로 산중턱까지 산줄기를 따라 묘역이 조성돼 있다.
아무런 기대도, 계획도 하지 않았기에 이번 답사는 모든 것이 미진했다. 예전 같으면 두툼한 자료집과 상세 지도까지 갖고 왔을 텐데……. 그런 점을 생각하면, 화림촌(花林村) 옛터에 와 있는 일이 꿈만 같다. 마치 산 아래를 지나가는 우리 일행을 조상님께서 부르신 것만 같다. 이제 남은 일은 좀더 자세한 답사와 이 고분군이 우리 선조님들의 유택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11:53분, 큰길로 나와 안동대 배영동 교수 연구실로 찾아뵙기로 하고, 태홍 종친에게 연락을 취했다. 12:31분 안동대에 도착했다. 안동대 캠퍼스 지리를 잘 모르는 우리 일행을 배려해 태홍 종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배 교수와 충렬공 실기 간행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 교수는 충렬공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우리 일행의 설명을 듣고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원고 청탁도 선선히 수락하면서 충렬공 기록이 집대성되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환담을 나누는 배영동 교수와 일행. 시계방향으로 가운데부터 배영동 교수(안동대), 태홍, 태영, 윤식.
환담 중에 고려 고분 이야기가 나왔다. 배 교수도 우리 설명을 듣고는 “안동김문의 선대 묘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고려 고분을 발굴한 당시 배 교수는 안동대 2학년에 재학 중이라 몇 차례 현장에서 발굴조사를 지켜보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 기회에 고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볼 수 있을까 해서 부탁했더니 배 교수가 박물관장이라고 한다. 허나 토요일이라 박물관이 문을 열지 않고, 박물관 측 사정으로 관람이 어렵다며 양해를 구한다.
다시 충렬공 실기 간행에 관해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 우리가 원하는 내용을 전공한 학자들을 몇 분 소개받고,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14:00시경 연구실을 나와 태홍 종친과 인사를 나누고, 안동 시내로 들어갔다. 영호루 건너편에 있는 ‘영호루 유허비’를 찍기 위해서다. ‘영호루 유허비’에 충렬공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어 반가웠다. 영호루의 본래 위치는 유허비 앞 20m, 4차선 도로 한복판이라고 한다.
▲영호루 유허비
▲영호루 유허비에 새겨진 충렬공 관련 글귀
▲유허비 앞 영호루 옛터. 도로 중앙 화단이 본래 영호루 자리이다. 철길 너머로 영호루가 보인다.
다시 길을 재촉해 15:40분 권태사(權幸) 묘소와 그 아래 유성룡 선생의 어머니이신 안동김씨부인 묘소를 찾았다.
권태사 묘역은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태영 종친의 설명을 들으니 권태사의 후손들은 안동부사로 부임하면 건물이나 시설물을 반드시 하나씩 권태사 묘역에 남겼다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니 부럽고 배울 점이었다.
▲권태사 묘역의 고색창연한 추원루(追遠樓)
▲권태사(휘 幸) 묘소
▲권태사 묘소 앞의 안동김씨 묘소. 송은(휘 광수) 할아버지의 따님으로 서애 유성룡 선생의 모부인이시다.
▲안동김씨 신도비
이제 회곡으로 향해야 한다. 금계(검재) 학봉종택을 스쳐가면서 여러 해 전에 들렀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 새 세월이 흘러 정성을 다해 우리를 맞아 주셨던 김시인 어른도 유명을 달리 하셨건만, 종택 대문은 예전 그대로 정갈하다.
상락대를 지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올해 시제에 참예했던 종친들 말씀처럼 상락대 인근에 큰 건물이 들어섰다. 상락재에 들어가 사정을 알아보니 안동시에서 생태공원을 짓는다는 것이다. 생태공원 뜻은 옳다고 해도, 저처럼 아름다운 곳에, 안동시가 자랑하는 충렬공 유적지 바로 곁에 콘크리트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처사였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상락대를 들러 자세히 살피지 못하는 게 한탄스럽다.
▲강가의 깎아지른 절벽 중 가장 높은 곳이 마암(馬巖)이다. 그 옆으로 안동시에서 생태공원을 짓고 있다. 상락대는 마암과 생태공원 건물 사이에 있다.
충렬공 유허비와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 할머니 단묘에 인사를 드리고, 예천으로 향했다. 다음 날 물계서원 옛터와 물계서당을 촬영하고 대구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느라 점심은 건너뛰고 17:00시경 예천군청 인근에서 허기를 달랬다.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 할머니 단묘
▲충렬공 유허비와 비각
▲상락재
일정 마지막 날인 11월 23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단히 요기를 하고, 예천군 감천면의 물계서원 터로 향했다. 유명한 석송령(石松靈)을 둘러보고, 건너편 물계서원 터와 광현1리의 물계서당을 카메라에 담았다. 물계서원 터에는 대나무만 무성하고, 물계서당은 퇴락할 대로 퇴락했다.
▲세금 내는 소나무로 널리 알려진 예천의 석송령
▲물계서원 터. 대나무가 울창한 곳이다.
▲물계서당. 석송령으로 가기 전에 고갯길에서 광현1리 표지석 바로 못미처 좌회전, 좁은 마을길을 따라 조금 올라간다.
이제 대구로 갈 차례다. 약속장소를 정하기 위해 태영 종친이 장동익 교수와 연락을 취했다. 뜻밖에 장 교수가 급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약속이 취소되었다. 그 동안 태영 종친이 여러 차례 장 교수에게 충렬공 실기 간행 취지와 함께 원고청탁을 한 덕분에 이메일로 대신하기로 했다.
조금 시간 여유가 생겨 올라오는 길에 제천 의림지를 촬영하기로 했다. 해가 짧은 계절이라 서둘러야 했다. 겨울철이라 의림지 촬영은 여건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귀로에 화림촌과 고려 고분에 관한 이야기를 좀더 나누었다.
▲제천 의림지
<계속>
댓글목록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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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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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놀라운 일들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잘보고 있습니다 위 설명중
"이제 회곡으로 향해야 한다. 내앞 학봉종택을 스쳐가면서 여러 해 전에 들렀던 추억을 떠올린다 " 에서
내앞 학봉종택이 아니고 금계(검재)학봉종택 입니다 꾸우벅
윤식, 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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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 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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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응답자가 두 사람으로 나오죠.
발용 대부님께서 이렇게 등록을 해 놓으셔서...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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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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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흥분되어 한달음에 달려 가시는 일행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리 문중사에 경천동지할 소식이 전해질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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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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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큰 고생하셨습니다.
날씨가 좋아 선명한 사진들을 만족하게 촬영하고 배교수와의 성공적인 면담이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충렬공 실기>의 그림이 점점 뚜렷해져 갑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서삼리의 고려 고분에 대한 발굴 및 연구는 우리 모두 총 집중해야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선조님의 고총들일 것이라는 높은 가능성을 전제하고 우리와 학계 전문가들이 함께 접근해 간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궁금했던 서삼리 고려고분군이었는데 먼저 고생으로 첫길을 내어 주시고 사진으로나마 근황을 보여 주시어 편히 앉아서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행 여러분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