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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간의 믿음-백곡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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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8-12-30 09:17 조회1,6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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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어난 고전번역원의 활동력에 놀랬습니다. 수많은 문집들이 새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백곡(휘 득신)선조님 관련 새 글을 찾아 보았습니다.

1. 출전 : 고전번역원. 임하필기(林下筆記). 이유원(李裕元) 저. 제28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친구 간의 믿음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과 문효공(文孝公) 박장원(朴長遠)은 우의가 매우 친밀하였다. 김공이 친상(親喪)을 당하였는데 집안이 가난해 제수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박공이 방백(方伯)이 되어 가는 길이었는데 이별할 적에 말하기를, “대상(大祥)의 제수는 내가 다 마련해서 보내겠네.” 하였다. 박공은 평소 약속을 어기거나 남을 저버린 적이 없기에 김공은 그의 말을 믿고 대상의 기일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도 물품 하나 마련하지 않았다. 한편 박공은 고을에 도착하여 제수를 마련해 보냈는데 마침 장맛비를 만나 길이 막혔다. 김공의 집안에서는 온 식구들이 날마다 고대하고 있었는데, 상일(祥日) 저녁이 되어도 도무지 소식이 없었으므로 모두 박공이 신의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김공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남을 속이는 박장원이 있겠는가?” 하였다. 한밤중이 되어 어떤 사람이 과연 문을 두드리니, 제수가 온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니, 야박한 세상 풍속에서 친구 간 도리에 경계가 될 수 있겠다.



이유원 [李裕元, 1814~1888] 


본관 경주(慶州). 자 경춘(景春). 호 귤산(橘山) ·묵농(墨農). 시호 충문(忠文).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의주부윤(義州府尹)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1865년(고종 2)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좌천되었다가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임되어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 총재관(摠裁官)이 되고,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1875년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인천(仁川)의 개항을 주장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공격을 받고 중추부영사로 물러앉아 1880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882년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귤산문고》 《가오고략(嘉梧藁略)》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이 있다.

 

 

2. 출전 : 고전번역원. 포저집(浦渚集.2005년 국역). 조익(趙翼) 저. 포저 연보 제4권. 부록(附錄)

     

김득신(金得臣)


선생은 월정공에게 수업하였나니 / 先生受業月汀公

문장이 옛사람과 자웅을 다투었네 / 文章與古爭其雄

그럼에도 소기는 할 것이 못 된다면서 / 乃謂小技不足爲

유가의 의리를 궁구하리라 하였다네 / 儒家義理吾當窮

육경의 은미한 말을 모두 저작하였고 / 六經微辭盡咀嚼

사서의 심오한 뜻을 죄다 갈고닦았다네 / 四書奧旨皆磨礱

훈의에 침잠하여 꿰뚫어 통달하였나니 / 沈潛訓義能通透

강하가 트이듯 막힘없이 사리를 밝혔다오 / 卞析若決江河走

본문의 난해한 부분을 명쾌하게 해설하면서 / 箋註以解肯綮處

눈먼 속인들이 시비해도 그냥 놔두었다네 / 任他盲俗爭相詬

긴요한 대목을 궁구하여 철저히 파헤쳤나니 / 窮硏識破大頭腦

이는 일찍이 학문의 힘을 성취했기 때문일세 / 蓋緣學力曾成就

옛날 광해의 정사가 어지럽던 날에는 / 昔在光海政亂日

독선기신하며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네 / 獨善其身隱不出

그러다가 우리 인조 때에 근신이 되어서는 / 逮我仁祖爲近臣

이폐에 오를 때마다 경술을 진달하였다네 / 每登螭陛陳經術

있는 힘껏 충성을 바쳐 부족한 점을 보충하며 / 竭力輸忠補闕漏

우리 임금이 요순처럼 되기를 기대하였다오 / 望以吾君堯舜匹

들어가선 정성하고 나갈 때는 아뢰었나니 / 入則定省出告行

어버이 섬기는 효심이 참에서 우러나왔어라 / 事親孝思由其誠

직분에 따라 효성과 충성이 극진했는지라 / 旣忠旣孝各盡職

제자가 본받아 언제나 법도로 삼았다오 / 諸子則之常爲程

이 때문에 하느님이 흠 없는 복을 내려 / 以玆天公降純嘏

지란 같은 후손들이 가문에 꽃을 피웠다네 / 門闌衆孫芝蘭榮

청요의 직책을 삼십 년이나 역임했건만 / 歷敭淸要三十載

생활이 담박하여 문에는 뇌물이 없었다오 / 生涯泊如門無賄

지난번에 임금님이 선생을 재상으로 삼고 / 頃者我后相先生

정치를 친히 도모하며 도움을 받으려 하였어라 / 臨政圖治欲亮采

경세제민의 책임이 노성한 분에게 달렸는지라 / 經濟實係老成人

조야가 모두 정내의 조화를 기대하였었네 / 朝野皆思調鼎鼐

하지만 시골에 은퇴하여 끝내 엄체되었나니 / 斂蹤田畝終淹滯

곧은 도가 말세에는 용납될 수 없었음이라 / 直道難容衰季世

미천한 소자는 영윤(令胤)과 친할 뿐만이 아니요 / 賤子不啻與胤善

선생이 나를 대할 적에도 빗자루 잡게 해 주셨네 / 先生待我亦擁篲

삼월에 입경하여 듣게 된 역책의 소식 / 三月入京聞易簀

천 줄기로 흐르는 눈물 걷잡을 수가 없네 / 有淚千行不能制

애석해라 우리의 도 다시 황무해졌구나 / 惜哉吾道更荒蕪

암흑에 휩싸인 인간 세상 탄식만 나올 뿐 / 人間長夜徒嗚呼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에게 물어볼까 / 前經迷惑孰從問

사문이 이제는 없어졌으니 그만이로다 / 已矣斯文今則無

한 번 만가를 짓노라니 왜 이리 서글퍼지는지 / 一爲挽歌最愴神

수레를 몰던 당시 문하의 객의 눈물이여 / 得御當時門下賓



[주D-001]선생은 …… 다투었네 : 월정(月汀)은 당시에 고문(古文)의 대가로 이름이 높던 윤근수(尹根壽)의 호로, 그는 포저에게 외종조(外從祖)가 된다. 포저가 17세에 그에게 가서 수학한 뒤로 문사(文辭)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월정도 그의 글을 보고는 양한(兩漢) 시대의 수법을 구사한 기문(奇文)이라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주D-002]그럼에도 …… 하였다네 : 포저가 문장 공부 대신 성리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을 말한다. 월정이 이를 매우 애석해하여 “어찌하여 앞으로 몇 년 동안만이라도 먼저 문장가가 되는 공부에 종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세간에 없는 문자를 볼 수 있게 하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누차 권고하였으나 포저가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이 포저의 연보에 보인다. 문장을 짓는 것은 성인의 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작은 기예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조충소기(雕蟲小技)’라는 말을 흔히 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문장은 하나의 작은 기예일 뿐, 도에 비교하면 귀할 것이 하나도 없다.〔文章一小技 於道未爲尊〕”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5 貽華陽柳少府》

[주D-003]독선기신(獨善其身)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이폐(螭陛) : 용을 새긴 대궐의 층계를 말한다.

[주D-005]들어가선 …… 아뢰었나니 : 포저의 효성이 지극했다는 말이다. 정성(定省)은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자식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는 말에서 나왔다. 또 “외출할 때는 반드시 어버이에게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뵈어야 한다.〔出必告 反必面〕”라는 말도 곡례 상에 함께 나온다.

[주D-006]지란(芝蘭) : 지란옥수(芝蘭玉樹)의 준말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들을 예찬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비유하자면 지란옥수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게 하겠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庭階耳〕”라고 자신의 소망을 밝힌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79 謝安傳》

[주D-007]정내(鼎鼐)의 조화 : 정내는 재상을 의미한다. 양념을 잘 섞어서 음식 맛을 좋게 하듯이 재상의 지위에서 나라를 이상적으로 잘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은 고종(殷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이르기를 “내가 술이나 단술을 빚으려고 할 때에는 그대가 누룩이 되어 주고, 내가 양념을 섞어서 국을 끓이려 할 때에는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若作酒醴 爾惟麴蘖 若作和羹 爾惟鹽梅〕”라는 말이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나온다.

[주D-008]선생이 …… 주셨네 : 포저가 제자의 예로 대우해 주었다는 말이다. 《사기》 권74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추자(騶子)가 연(燕)나라로 가자 소왕(昭王)이 빗자루를 쥐고 앞에서 달리며, 제자의 자리에 앉아서 수업 받기를 청하였다.〔昭王擁彗先驅 請列弟子之座而受業〕”라는 기록이 보인다.

[주D-009]역책(易簀) : 포저가 죽으면서 그 몸에 모였던 산악의 정기도 본래의 자리로 환원되었다는 말이다.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할 때에 자기가 깔고 누운 대자리가 너무 화려해서 예제(禮制)에 합당하지 못함을 알고는 자기 아들에게 다른 것으로 교체하게 하였다가 대자리를 바꾸는 동안에 숨을 거두었다는 역책(易簀)의 고사가 전하는데, 보통 현인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禮記 檀弓上》

[주D-010]수레를 …… 눈물이여 : 포저의 환대를 받은 추억을 회상하며 비감에 젖는다는 말이다. 어리(御李)의 고사는 《논어》 술이(述而)에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고 예의 세계에서 노닌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또 후한(後漢) 때 이응(李膺)의 풍도를 사모한 사대부들이 그의 접견을 받기만 해도 용문(龍門)에 올랐다면서 기뻐했는데, 순상(荀爽)이 그를 위해 수레를 몰고는 집에 돌아와서 “오늘 내가 비로소 이 선생님의 수레를 몰 수 있었다.〔今日乃得御李君矣〕”라고 자랑했다고 전한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李膺》




*조익[趙翼, 1579~1655] 

본관 풍양(豊壤). 자 비경(飛卿). 호 포저(浦渚)·존재(存齋). 시호 문효(文孝). 음보(蔭補)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고, 1598년(선조 31) 압운관(押運官)으로 미곡 23만 석을 잘 운반하여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16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11년(광해군 3)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고, 1625년(인조 3) 부호군(副護軍)·형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달아난 죄로 처벌받은 뒤 1643년 재기용되어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이조·예조의 판서, 대사헌이 되고, 1648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으로 인조의 행장찬집청찬집관(行狀纂輯廳纂輯官)을 겸한 후 좌의정에 올랐다.


그 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김육(金堉)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음률·병법·복서(卜筮)에도 능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에 《포저집(浦渚集)》 《서경천설(書經淺說)》 《역상개략(易象槪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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