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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 17-1.(원주시 : 임란 영원산성 전투와 김제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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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24 08:15 조회2,4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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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사(역사편)/원주시사편찬위원회/2000년)







▣ 영원산성(令+鳥原山城) 전투와 김제갑(金悌甲)의 항전. pp359~365





(1)영원산성 전투과정.



--우리나라의 경우 산지가 많은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산성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각 읍의 인근에 있는 산지에는 대개 1~2개 혹은 그 이상



의 산성이 있었는데 성안에는 우물이나 창고 혹은 임시 관아를 두어 유사시에 주



변의 주민을 이끌고 성에 웅거하여 적과 대응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산성은 당대



에 신축한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고대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많았다. 산성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200여년에 걸쳐 외침이 없었던 까닭에 정비. 관리를 소홀히 하여



대부분 폐철(廢撤)되거나 퇴락(頹落)하였다. 당사 조선왕조의 방비시설에 대한 관



심이 주로 북방의 변경지역과 남방의 연해지역, 특히 왜인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



과 왜적 방비에 요충지가 되는 곳에 집중되어 내륙지방의 방비는 상당히 해이해



졌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관방시설은 ‘내고외허(內固外虛)’의 방어실태를 보여 주



었고 왜란이 일어나자 그 단점이 쉽게 노출되었다. 왜군이 부산진성. 동래읍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읍성류(邑城類)를 무시하다시피 북상하



였던 것이다. 따라서 왜란을 겪는 동안 변경을 돌파하여 내지까지 깊숙이 침입한



적을 제압하는 방법으로는 역시 산성에 청야입보(淸野入保)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효과적임이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전란중에 수많은 고산성(古山城)들이 수축. 개



축되었다. 임진왜란시 강원도의 산성중 삼척 두타산성(頭陀山城), 평창 노성산성



(魯城山城), 영원산성에서는 직접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영원산성은 원주



동쪽 30리인 치악산 남록에 위치하며, 석축의 길이가 3,749척으로 사방이 모두 절



벽으며 전방에 통로가 하나 있어서 겨우 한사람씩 기어올라갈 수 있는 요새였다.



--김제갑 목사는 원주에서 정사(政事)한 지 1년이 채 안된 시기에 왜란을 만나게



되었다. 인근 충주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신립군(申砬軍)에게 정예병과 이기구



(利器驅) 모두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원주 자체 방어를 위한 무기나 인적자원



이 없었던 셈이다. 회양에 진을 친 왜군은 평창, 신림을 거쳐 원주로 쳐들어올 태



세였다. 목사 김제갑은 재계(齋戒)한 후 융상(戎床)에 나가 투구. 갑옷. 활. 융복



(戎服). 화살을 구비하고 “누가 능히 몸이 가볍고 날쌔게 적을 대적할 수 있느냐?



적의 강경한 것은 더하고 우리는 약한 것이 날로 심하여 겁이 나니 싸우면 피만



흘릴 것이요 사람으로 지키자니 꾀가 어렵다. 성은 첩지가 없고 밭도랑도 흐르지



않고 식량이 넉넉하지 않으며 기계가 다하여 우리 고을은 하나도 믿을 것이 없



다. 그렇다하여 어찌 속수(束手)하는 것이 편안할 까? 하늘이 원주에 준 것은 오



직 영원산성이 있어 가히 웅거할 만하다. 에전 사람이 여기를 얻어 공을 세웠다.



나는 비록 재주가 예전 사람만 못하지만 나의 뜻이야 어찌 예전 사람만 못하리



오. 지금에 버리고 지키지 않으면 다만 일이 기회를 잃을 뿐 아니라 하늘이 내몸



을 벌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사인(士人) 정사영이 “적의 강성함이 다른 적에 비할 것이 아니요 지금



때가 예전과 다르고 이 병졸로서 적을 대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나아가 피하였다



가 길고 짧은 것을 침착하게 살피고 이해를 강구함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간언



하였다. 그러나 김제갑은 “너와 더불어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며 목민관으로서



나라 지키는 직분을 다하고자 하며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사사로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말과 함께 성안으로 이동하였다.



--관속과 노약자를 비롯한 원주민들 그리고 한성에서 피난온 자들이 포함되어 수



일내에 성안이 가득찼다. 성의 사면은 모두 절벽이며 앞에는 길 하나만 통하여



반드시 어관(魚貫)같이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깎고 파고 쌓으며, 안에는 양식



을 넓게 싸놓고 기계와 나무를 쌓고 샘을 파는 등 여러달 동안 생활할 준비를 하



였고 밖으로는 큰 수레를 거듭 난간을 하여 돌을 실어 공중에 달아놓고 왜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성첩(城堞) 사이에 활과 화살, 화총을 구비하고 낮과 밤이 없



이 몸소 순성(巡城)하였다.



--김제갑은 경장(京將) 박종남(朴宗男)에게 “적은 반드시 가리영(可里嶺)을 지나



서 원주로 향하여 북상할 것이다. 이 령은 매우 험하여 말 두필이 동시에 지나지



못할 만큼 길이 좁으니 이 령의 목을 눌러서 병력 천명으로만 지킨다면 비록 백



만의 적이라도 날개없이는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 령을 잃을 때에는 내



가 뒤에서 견고히 준비한 것으로 대책을 세우겠으니 힘써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박종남은 가리영까지 나간 후 병사 한 사람을 시켜 적이 근접하는 동정을 살펴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병사는 적을 바라볼 수 있는데 까지 가지 않고 도



중에서 그대로 돌아와 버리고서 거짓말로 보고하였다. 박종남은 병사의 거짓보고



를 그대로 믿고 말안장을 내려놓고 갑옷과 투구를 벗어 제치고 강가에 앉아서 물



을 적시며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이때에 왜군은 이미 아군의 복병이 있는 곳을



몰래 돌아 그 후방으로 나와 있었으며, 복병들은 별안간 왜군이 기습해 오자 도



망쳤고 박종남 역시 홀몸으로 겨우 빠져나왔던 것이다.



--이날에 왜군이 원주목에 이미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자 성중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김제갑은 간절한 말과 엄한 영으로 방수(防戍)에 힘쓸 것



을 맹세하면서 민들의 동요를 제지하였다. 원주에 들어온 적은 8월 24일 군사를



성중에 보ㅗ내어 장대 끝에 항복을 권하는 적장의 편지를 김제갑에게 전하였다.



이후 위엄으로 겁박하여 굴복하도록 하니 김제갑이 허리에서 칼을 빼어 그 사자



를 직접 베어 죽였다. 김제갑이 평상에 걸터 앉자 사람들은 다 두렵고 떨며 무서



워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한다.



--다음날에는 적이 크게 밀려올 것으로 예상하고 곧 부하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산성에서 5리쯤 떨어져 있는 5군데 산봉우리에 한사람씩 숨을 정도로 구멍을 파



고 척후병을 파견시키고 적의 내습시 적(笛)을 불도록 했다. 이튿날 25일 아침 5



군데의 적(笛)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창과 검이 산을 뒤덮고 북소리와 고함



소리가 땅을 울렸으나 외부에서는 전혀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성첩을 지키는 숫



자가 5천명에 이르지 않아 중과부적의 형세였다. 험준한 지형 및 인화가 넘치는



군율로 무장된 조선군은 저녁까지 왜군과 처절히 맞서 싸웠다. 이후 어둠을 틈타



적군은 수십명의 결사대를 뽑아 절벽의 틈 사이로 기어 올라와서 성벽에 구멍을



뚫고 불시에 고함을 치며 돌격해 오니 적의 본진이 이를 기화로 성으로 쳐들어



왔다. 성중에서 활과 돌을 동원하여 적과 대항하였으나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김



제갑은 군관(軍官) 오항(吳杭)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나라에 두터운 은혜



를 입었는데 이제 이 격전의 마당에서 어찌 살겠다고 도망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조복을 꺼내어 갑옷위에 입고 호상(胡床)에 겇쳐 앉아 내려가지 않



고 활을 당기어 적을 쏘았다. 적의 화살이 공의 등에 멎추어도 내려가지 않고 다



시 명중되어도 내려가지 않자 적의 부장 중 한명이 그에게 호상에서 내려앉아 항



복의 뜻으로 무릅을 꿇리게 하였으나 끝내 거부하고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면서



도 꾸짖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때 김제갑의 나이 68세였다.



--부인 이씨는 그의 죽은 소식을 접하자 뱃속의 태아와 함께 칼을 입에 물고 엎



드려 자결하였다. 큰 아들 시헌(時獻)은 무자년(戊子年) 과거에 올라 이부랑(吏部



郞)이 되어 관서지방에서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있었으나 작은 아들 시백(時伯)



은 목사 옆을 떠나지 않고 부모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산성에 남아 최후까지 싸



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또한 김제갑이 거느린 아전(衙前)들과 가솔(家率) 백



여 식구 역시 끝까지 적과 싸우다가 산성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적이 물러간 후



조문벽(趙文璧)과 고현(高峴)은 성안에 들어가 목사 내외와 시백의 시체를 거두어



서 주천에 가매장하였다가 선조 27년(1594) 충주 홍복동(洪福洞)에 장사지냈고,



전란이 끝난 후 선조 35년(1602) 봄에 충주 복성동(福盛洞)에 이장했다. 원주관민



들은 영원산성의 사수를 듣고 모두 눈물로써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에 “공



과 그 부인 그리고 아들 등 세 사람은 충성과 정열(貞烈)과 효도로서 같은 날 같



은 장소에서 돌아가셨다니 일우고성(一偶孤城)에 만고삼강(萬古三綱)을 세우셨나



이다. 이에 고을 백성들이 이를 흠모하는 나머지 삼가 한잔의 술을 부어 치제를



올리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왜군은 원주를 완전히 함락하고 횡성을 거쳐



춘천을 점령하여 강원도 전역을 완전히 흽쓴 후 원주에 모리길성(毛利吉成), 금화



에 도진의홍(島津義弘). 도진충풍(島津忠豊), 철원에 윤동우병(尹東祐兵) 부대가



주둔하면서 숱한 분탕질 끝에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 4월 18일 왜군 전체가



한성을 철수할 때 강원도의 왜군들도 철수하였다.





(2)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의 생애와 정치활동.



--김제갑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진사 김석(金錫)의 아들이다. 1525년(중종 20) 5월17일



서울 반석방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부친이 별세한 후 고모부 묵재(黙齋) 이문건



(李文楗)과 장인인 서파(西坡) 윤상공(尹相公) 개(漑) 밑에서 수학하였다. 19세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 된 후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55



년(명종 10) 홍문관 정자가 되고 3년후 병조좌랑을 거쳐 1573년(선조 6) 정언,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9년(선조 22) 창성부사가 되고 다음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1591년 공



조참의로 배명된 후 이조에서 보좌하는데 아들 시헌 역시 정랑으로 있어, 거듭



외읍을 구하다가 원주목사에 부임하게 되었다. 공마관압사(貢馬管押使)로 서울과



연경을 오가며 공마 50필을 제대로 보존한 일과 진주에서 토호들을 잘 다스려 치



적을 쌓은 일은 유명하며 모친에게 효도하기 위해 부임지를 지방으로 정한 사례



도 거듭 나타났다. 원주목사로 임용된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임진왜란을 맞이하



게 되었다.



--조선왕조는 민들의 생존조건을 개선하여 민심수습에 나서는 한편으로 민에 대



한 포장책(襃獎策)을 강구하기에 이르른다. 즉 전시의 충신. 효자. 열녀에 해당하



는 사례를 꾸준히 발굴하여 왔던 것이다. 포장작업의 진행과정을 정리하면 그 지



방 사족이 지방관에게 선행사례를 상신(上申)하면 지방관이 이를 접수하여 관찰



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예조에 실적을 올리고 포상을 의뢰한다.



--예조는 예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정표(旌表). 상직(賞職). 복호(復戶)하며 상물



(賞物)은 그 고하에 따라 선별하여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는 다시 검토하여



왕에게 보고하므로서 확정짓는 형식이었다.



--특히 ‘충신’으로 선별된 사례를 보면 전쟁기간 중 유공자였음에도 기왕의 포장



에서 누락된 의병장과 그 지역 지방관으로서 전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



왕조는 그들의 충성심을 강조함으로서 지방민의 충성심을 견인시키고자 하였다.



--조선왕조는 김제갑을 선조 39년(1606)에 선무원훈(宣武原勳)으로 녹하였다.



1711년(속종 37)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의재는 문숙(文肅)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의재의 형제는 모두 5인이었는데 그 중 3인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2인은 진사



에 올랐다. 참판을 역임한 시헌은 그의 맏아들인데 후사가 없고 영월군수를 역임



한 상중(尙重)은 둘째 시백의 손자이다. 좌의정을 역임한 허적(許積)과 목사 허질



(許秩)은 외손이다. 허질 또한 원주목사가 되어 그가 끼친 교화를 이어갔다고 한



다. 1670년(현종 11)원주의 생원 정○형(鄭○衡)에 의해 쓰여진 기록에 따르면 ‘죽



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곳에서 죽기가 어렵도다. 오직 군자라야 생명



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수 있으며 위급함을 당하여도 보통으로 보며 충성심을 가



다듬기를 시종 옮기지 않나니 신하는 충성에 죽고 부인은 정절에 죽고 아들은 효



에 죽어 만고에 삼강과 오륜을 심었도다.“라고 하였다.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수련



으로 자질을 갖춘 선비가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체득하여 실천함을 본연의 모습



으로 삼고, 이를 통한 인격의 성취에 목표를 두는 것은 우리가 그려 볼 수 있는



선비상을 집약한 것이라 하겠다. 과거 지난한 역사 속에서 선비는 우리 사회의



양심이자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이었다. 그리고 각 시대의 과제에 대해 책임있게



행동으로 대응했다.



--의재는 지조와 절개를 중히 여긴 선비상의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선비의



입지가 확고하면 정의를 위하여 두려울 것이 없고 공론을 그르칠 염려가 없게 된



다. 여기에서 “위급을 당하면 목숨도 바치며 득을 보면 의를 먼저 생각한다.”는



선비정신이 발휘될 수 있으며 의리의 명분은 생명보다 중시된다. 선비는 무엇보



다 생명보다 의를 더욱 소중히 여겼으며, 죽음을 택하는 것은 후대에 그러한 사



실이 알려져서 이름을 빛날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이 함락되기 20



일 전에 아들 시헌에게 부친 글에서 의재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겠나. 다만 절



개를 잃지 않기를 기약할 뿐이다.”라고 하여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처음 영원산성을 지킬 때에 판서 이기(李墍)가 호소사(號召使)로서 원주의 서



쪽 지경에 있으면서 공에게 보낸 글에 말하기를 “비록 땅을 지키면서 죽기로서



직분을 다하고자 하나 성은 외롭고 일은 급한데 어찌하겠는가. 모름지기 이리로



나와서 나와 더불어 함께 일하고 여주와 원주의 지경에서 형세를 보아서 나아가



고 물러가는 것이 옳다.”라고 하자 의재는 답서에서 대의(大義)를 말하며 죽더라



도 두 마음이 없음을 보였다는 것이다.(2002. 6.23)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정중 - !!!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태영/문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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