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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 17-2.(원주시 : 김제갑. 충렬사. 충렬비. 충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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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25 06:03 조회1,8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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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사(역사편)/원주시사편찬위원회/2000년)







▣ 김제갑(金悌甲, 1525~1592) pp710~71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이다. 고



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김석(金錫)이다. 1553년(명



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병조 좌랑. 정언을 거쳐 1581년



(선조 14) 충청 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과



함께 이이. 박순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는데, 왜장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



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하였다. 원주 충렬사(忠烈



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711년(숙종 37) 문숙(文肅)이라



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부활위원회에 의하여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탑이 세워졌다. 이곳에 있는 1670년에 세워진 충렬비의 비문을



보면 “원주의 목사로서 의리에 분발하여 슬픔을 딛고 일어서 군병을 규합하는 한



편 군량미를 거두어 영원산성에 들어가서 결사 사수할 것을 계획하고 충성과 의



리로 이 고을 선비와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이 고을에 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날



쌔고 용맹스럽다는 소문이 있어 공이 이 선비에게 함께 고을을 지키자고 하였더



니 정씨가 대답하기를 ‘적세가 날카로우니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다시 기



회를 도모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고 하기에 공이 이를 크게 꾸짖고 이르기를



‘그대와 같은 사람과 함께 도모할 수 없다.’고 꾸짖고 하늘을 우러러 이르기를 ‘나



는 한번 죽기를 결심하였다.’고 다짐하였다. 전쟁의 준비를 힘써 갖추고 밤낮없이



성안을 몸소 순시하니 고을 백성들이 동요가 없었다.왜적이 쳐들어와 멀리서 지



키고 있는 성을 바라보고 사자 한사람을 보내어 항복하라는 적장의 뜻을 밝히니



사자의 목을 베어 군중들에게 보이자 군사들이 그 위세에 경탄하여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군중들이 이르기를 오늘 사자를 죽었으니 내일은 적이 몰려와 그



분풀이를 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기에 공이 ‘나라를 지키는 관



리가 피한다니 어디로 피한다는 말인가. 피하자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처형하



겠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싸우자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다음날 아침



적이 사방에서 밀려오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성을 지켜 죽을 힘을 다하



여 싸웠으나 한낮이 지나자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하여 마침내 성이 함락되기



에 이르자 힘이 장사인 군관 오항이라는 사람이 공을 업고 피하고자 하였다. 이



때 공이 ‘내 평생동안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왔는데 국난을 당하여 어찌 한



몸만 살겠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은 피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조



복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등에 화살을 맞았으나 미동도 하지 아니하였다. 적



이 쳐들어와 공을 붙잡고 절을 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공은 꼿꼿이 서서 적을 꾸짖



기를 그치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화를 당하였다. 작은 아들도 처음부터 공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다가 공과 함께 죽고 부인 이씨도 엎어져 자결하였는데 이때 부인



은 임신중이었다.고 한다.〔김호길(金鎬吉)〕







(원주시사(민속.문화재편)/원주시사편찬위원회/2000년)







▣ 충렬사지(忠烈祠址) pp924~925





--충렬사는 고려시대 원주 영원산성 전투에서 합단과 싸워 승전한 응양상호군 원



충갑(元冲甲)을 주향(主享)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역시 영원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원주목사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 여주목사 원호(元豪)를 배향한 사우



(祠宇)로 현종 10년(1669)에 건립하여 이듬해인 1670년에 사액되었다. 조선말 대



원군 집권시기에 서원. 사우가 폐철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한 시기



는 알 수 없다. 『여지도서』등의 기록에 의하면 총 건물 규모는 14칸이며, 관아



북쪽 1리에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모두 시가지로 개발되어 그 유지(遺址)를 찾



기 어렵다. 충북 괴산의 김시민 장군을 봉안한 충민사 경내에 사당을 복원하였는



데, 이곳에 원주 충렬사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 충렬비(忠烈碑) pp1061~1064





--조선국(朝鮮國)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



(領議政) 겸(兼)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



(觀象監) 세자사(世子師)에 증직(贈職)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충청도 관찰사(觀



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의재(毅齋) 김



제갑(金悌甲)의 충렬비(忠烈碑)이다.





--만력 임진년(1592)의 난리는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로 없었던 것이다. 왜적들이



가는 곳마다 여러 고을이 그 기세만 바라보고도 달아나서 모두 무너져 이것을 막



아낼 자가 없었다. 대세가 이러한 때에 김공이 원주 목사로 있었는데 의리로 분



발하여 슬픔을 딛고 일어나 군사를 규합하는 한편 군량미를 모아 영원산성에 들



어가서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을 계획하고 충성과 의리로 이 고을 선비와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이 고을에 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날세고 용맹스럽다는 소문이 있어



김공이 이 선비에게 함께 고을을 지키자고 하였더니 정씨가 말하기를 “적의 형세



가 매우 날카로우니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다시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여



도 늦지 않다.”고 하기에 김공이 이를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와 같은 사람과는 이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다.”고 하고 군사를 지휘하여 나가면서 하늘을 우러러 탄



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한번 죽기를 결심하였다.”고 다짐하였다. 이에 전쟁의 준



비를 힘써 갖추고 밤낮없이 성(城)안을 몸소 순찰하니 고을 백성들이 믿고 두려



워 함이 없었다. 왜적이 멀리서도 김공이 굳게 지키는 것을 알고 먼저 한사람의



사자(使者)를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고 또한 협박하였다. 김공은 즉시 사자의 목을



베어 군중들에게 보이니 군사들이 그 위세에 경탄하여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



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오늘 사자를 죽었으니 내일은 반드시 왜적이 몰



려와 그 분풀이를 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김공이 “나라



를 지키는 관리가 피한다니 어디로 피한다는 말인가. 피하자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처형하겠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드디어 싸우자는 방향으로 굳



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과연 왜적이 사방에서 밀려들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성



을 지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한낮이 지나자 화살이 떨어지고 힘도 다하여



마침내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힘이 장사인 군관 오항(吳杭)이라는 사람이 김



공을 업고 피하고자 하였으나 이때 김공이 “내 평생동안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



어 왔는데 국난을 당하여 어찌 한 몸만을 살겠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



희들은 피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등에 화



살을 맞았으나 미동도 하지 아니하였다. 적이 쳐들어와 김공을 붙잡고 절을 하라



고 협박하였으나 김공은 꼿꼿이 서서 굽히지 않고 왜적을 꾸짖기를 그치지 아니



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작은 아들 시백(時伯)도 처음부터 끝까지 김공을 모시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아



니하다가 김공과 함께 죽었고 부인 이씨도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는데 이때 부인



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밤을 틈타 오항(吳杭) 등이 성안에 들어가 세



분의 시신을 거두어 가지고 고현(高峴)이라는 선비와 함께 주천현(酒泉縣)에 임시



로 장사(葬事)를 지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여주(驪州)에 다시 장사를 지냈다



(옮긴이 주(註) : 선조 27년(1594) 충주 홍복동(洪福洞)에 장사지냈다는 기록과는



다른 기록으로 확인을 요함)가 뒤에 충주 복성동(福城盛)으로 이장하였다. 성이



함락되기 20일전에 큰 아들 시헌(時獻)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내가 이제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다만 커다란 절개를 잃지 아니하면 그 뿐이다.”라고 하더니 그



글과 같이 김공은 대의에 순응하였다.



--처음에 영원산성을 지킬 때에 판서(判書) 이기(李墍)가 호소사(號召使)로서 원



주의 서쪽 지경에 있으면서 공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비록 나라를 위해 죽



음으로써 지켜 직분을 다하고자 하나 성은 외롭고 형세는 급하니 어떻게 하겠는



가. 모름지기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나와 같이 함께 협력하다가 여주와 원주 지



경의 왜적의 형세를 보아 나가던지 물러서던지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김



공이 다시 답서를 보내어 말하고 반드시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겠다는 뜻



을 밝혔다. 이 글을 본 이공(李公)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충성심



과 왜적에 대한 분노가 이와 같으니 타인이 어찌 그 충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아깝구나. 그 죽음이여.”라고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이



원주 목사로 와서 관찰사에게 아뢰기를 “생각컨대 왜란이 일어난 뒤로 죽음으로



써 국토를 지킨 자가 없는데 전에 목사로 있던 김공이 홀로 죽음으로써 성을 지



키다가 온 집안이 망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으나 그 뜻을 바꾸지 아니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가상하게 여겨서 이미 정경(正卿)의 직첨을 주었으니 장사



지낼 때에 있어서도 그것에 합당한 대접이 있어야 하겠기에 이 일을 임금께 이뢰



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아. 슬프다. 김공이 스스로 지키려는 의지는 아들에게 부친 편지에서 볼 수 있



고, 김공이 다른 사람에게 보인 신뢰는 이공에게 한 말로서 알 수 있다. 김공의



절의가 높은 것은 서평 함준겸의 보고에 증험할 수 있다. 한 성안에서 하룻동안



에 아버지는 충성으로 죽고, 아들은 효도에 죽고, 부인은 절의로 죽었으니 이것은



중국 송나라 조묘발(趙昴發) 부부의 쌍절개와 중국 진나라 변곤 부자가 함께 죽



은 것을 겸하였다 하겠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뜻을 굽히지 아니하여 만세토록 삼



강(三綱)의 표준이 되었으니 아마 이른바 큰 절개에 임해서 빼앗을 수 없는 자가



아닌가. 아마도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일가를 다스리는 자가 아닌가. 사람들이 영



광스러운 이름을 남기는데 어찌 다함이 있으랴.



--만력 무신년(1608)에 옛 정승 완평(完平). 백사(白沙). 일송(一松)이 김공이 출



생한 마을에 정표문려(旌表門閭)를 세우도록 건의를 하여 이제 그 마을에 충신.



효자. 열녀의 정문이 서있고, 원주 사람들이 또 김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



를 지내니 이제 나라에서 ‘충렬사(忠烈祠)’라는 액호(額號)를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공의 이름은 제갑(悌甲)이요, 자는 순초(順初), 성은 김(金)씨니 안동(安東)사람



이다. 사람됨이 뛰어나고 절개가 굳고 말이 적고 과묵하며 책읽기를 좋아하며 스



스로 의재(毅齋)라고 호(號)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역임하고, 세 번씩



이나 두 도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고 원주 목사가 된 것은 스스로 외직(外職)을



구하였던데서 연유한 것이다. 참판인 시헌(時獻)은 그의 맏아들로 후사(後嗣)가



없고, 현재 영월군수 상중(尙重)은 시백(時伯)의 손자이니 김공의 둘째 아들의



맏이다. 지금 좌의정 허적(許積)과 목사 허질(許秩)은 모두 김공의 외손으로 허질



또한 원주목사가 되어 김공이 끼친 교화를 이었다. 선비와 백성들이 김공을 기려



명(銘)하였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



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



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



에 삼강과 오륜을 남겼도다. 치악산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





--원주 사람 생원 정석형(鄭錫衡)은 삼가 옛 어른들이 전하는 바를 모아서 그 전



말(顚末)을 기록하여 경건하게 쓴다. 숭정 병자년 뒤 35년(1670)인 경술년 3월 일



에 세우다.



* 문숙공 김제갑 충렬비와 충렬탑 사진은 추후 보완할 것을 양해 바랍니다.



(2002. 6.24)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 - 조상님께 누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김주회 - 요즘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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