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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 18.(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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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27 07:17 조회1,6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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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지/예천군지편찬위원회/1988.







▣ 소천서원(蘇川書院) pp770~771





--용궁면(龍宮面) 무이리(武夷里) 금천변(錦川邊)에 있으며 국파(菊坡) 전원발(全元



發)을 제향(祭享) 했다. 숙종(肅宗)은 그의 공을 기리고 향리(鄕里)의 성화천(省火川)



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왕(王) 22년(1696)에 소천(蘇川)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5년 뒤인



숙종 27년(1701) 2월 19일에 소천서원(蘇川書院)을 세웠다.



--당시 숭덕사(崇德祠)와 전교당(典敎堂)을 세워 후학을 양성해 왔으나 서원 철폐령



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1918년 향의(鄕議)에 따라 서원의 서편에서 공(公)이 강의하던



자리에 청원정(淸遠亭)을 재건했고 1966년 서원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전교당(典敎堂)은 정면 4칸, 측면 15칸(1.5칸의 오기로 추정됨) 팔작지붕이며 숭덕



사(崇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5칸 맞배지붕으로 진사 김해(金楷)가 상량문(上樑文)



을 찬(撰)하였다.







▣ 청원정(淸遠亭) pp788





--용궁면(龍宮面) 무이리(武夷里) 소천(蘇川)마을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5칸 목



조와가(木造瓦家) 팔작지붕으로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의 유덕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1918년에 재건된 정자이다. 초창연대(初創年代)는 조선 초기로 알려지고 있는



데 퇴계(退溪)의 시와 의성(義城) 김소락(金紹洛)의 중수기(重修記)가 있고 뒷 편에



있는 바위에는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청원정(淸遠亭)」삼자(三字)를 전서



(篆書)로 음각(陰刻)해 놓았다.





☞ 청원정 중수기[역문] (출전 : 문온공파 임신세보 권1)



--산이 있어 천장(千丈)을 우뚝 솟아 소백(小白)에서 옮아 오니 무이(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삼강(三江)에서 회합(會合)하니 낙동강(洛東江) 상류(上流)를 성화(省火)라



하고 정자(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청원(淸



遠)이라(예기의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온 준말로『맑지 않음이 세속인지라』이



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하는 곳이라) 실로 축산군(竺山



君)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선생이 만년(晩年)에 휴노(休老)하실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청원정(淸遠亭)이라 3자(三字)를 세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惕若齋) 김



구용(金九容)의 평필(平筆)이니라. (이하 생략)(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



천서원 역내) ※ 소재지가 군지는 무이리, 파보는 가야리로 상이한 이유 확인 요.





☞ 주(註) (출전 : 문온공파 임신세보 권1)



--수안김씨의 관(貫)은 충렬공 휘 방경(方慶)의 제1자인 휘 선(愃)을 시조로 하고 있



으니, 안동김씨의 종문(宗門)이라 볼 수 있다. 공민왕 17년 서기1368년 10월에 신돈



(辛旽)의 폭정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척약재(惕若齋)의 아우인 제안(齊顔)과 김정(金



精, 양간공 휘 승택(承澤)의 장형인 도첨의사사 휘 자(資)의 독자인 휘 위(爲, 일명



위(渭))의 손인 휘 득남(得男)의 제3자 밀직부사 정(精))은 조사공(趙思恭), 유사의(愈



思義) 등과 더불어 신돈(辛旽)을 없애기로 모의하였었는데 이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두 역살(逆殺)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김정계(金精系)는 수안김씨로 제안계(齊顔



系)는 사천김씨로 후손들이 분관(分貫)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김정(金精)의 어머니되



시는 휘 득남(得男)의 배위(拜位)는 축산군부인(竺山君夫人) 용궁전씨(龍宮全氏)로서



그의 부(父)가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이다.(수안김씨 족보) 이로 보아 국파(菊坡)



의 본댁은 개경이었으니 척약재(惕若齋)와는 교분이 두터웠던 사돈지간(査頓之間)의



인척관계(姻戚關係)에 있었다. 척약제(惕若齋)께서는 위에 보이는 바 명필(名筆)이었



으니 국파(菊坡)선생이 편액제(扁額題) 3자(字)의 부탁함은 극히 자연스러웠던 일이



라 추리(推理)할 수 있다.







▣ 물계서당(勿溪書堂) pp773



--감천면(甘泉面) 관현동(官峴洞) 홍고개 마을에 있으며 정면 3칸, 부연팔작(附椽八



作)집으로 누각식(樓閣式) 건조물(建造物)이다. 이 서당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학



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물한동(勿閑洞 ; 現 水閑洞)에 세우고 충렬공(忠烈公) 김



방경(金方慶)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1670년에 다시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를 봉향



(奉享)하였으며 1672년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과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



揚震)을 추향(追享)하여 4위를 모셨다가 천전(泉田 ; 샘밭)으로 이건(移建)했다.



--그 뒤 창건(創建) 208년만에 훼철(毁撤)되고 1962년에 면내(面內)의 유림(儒林) 등



에 의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2002. 6.24)





▣ 김태서 -

▣ 김항용 - 쉼없는 전국 여행과 조사 발표에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윤만종친님! 쉼없는 수집 조사 발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두 복사해서 제 나름대로 시군지 폴더를 만들어서 자료화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환 - 용궁에 간 듯 반갑습니다.

▣ 김재익 -

▣ 김은회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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