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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 20.(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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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29 06:20 조회1,8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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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사 一(안동의 역사)/ 안동시사편찬위원회/1999.





☞ 안동시사를 옮기면서 기록상 선안동김씨와 후안동김씨가 구별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어 본의아니게 누락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동지역 문중사



에 밝으신 종친의 후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옮기는 이의 한계를 절실히 느낍니다.





▣ 안동지방의 호족. pp95.



--(전략) 그리하여 지방세력이 형성된 군현에서는 그 고을의 유력한 호족들을 중심



으로 신라 왕성(王姓)에서 벗어나 고을 이름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새로운 성이 나



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을 소위 토성(土姓)이라 칭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나말여초



에 토성의 출현은 우리나라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국 성씨의 확대에 지대한 기여를 의미하는 동시에 성씨마저도 중앙의 지배에서 벗



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한 현상을 안동지방에서 찾아보



면 신라말 고려초에 안동 권씨(安東 權氏)와 안동 장씨(安東 張氏)는 신라 왕성인



경주 김씨(慶州 金氏)에서 전연 다른 성씨로 갈려나온 사례이다. 여기에 비하여 안



동 김씨(安東 金氏)는 신라 왕성에서 성은 그대로 같이 사용하면서 본관만 달리하는



동성이본(同姓異本)의 사례인데 이러한 현상도 위에서 언급한 시대적 변화에 수반된



것으로 짐작된다.







안동시사 二(안동의 학문과 사상)/ 안동시사편찬위원회/1999.





▣ 조선초기 신유학의 정착(류성용의 생애 중) pp321~324.



--류성용은 1542년(중종 37) 외가인 의성군 사촌에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부친



류중영과 모친 안동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략)



--서애 류성용의 8대 주손은 류상조이다. 그는 1763년에 출생하여 1838년에 타계



하였다. 그는 17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풍안군에 봉하여



졌다. 그는 가학의 전통을 이었으며, 삼소재 김영락은 그에게 수학하였다.



---삼소재 김영락은 김종락이라고도 하는데, 그의 『삼소재문집』에는 풍안군 류



상조를 애도하는 시가 있다.





---[백년 부자(류성용을 의미함) 집에



---우리 당의 유종이 나셨네.



---청빈은 선생의 참 훈업이요.



---겸손은 진실로 덕으로 포용했네.



---바다를 건너심은 사신을 따름이요.



---변방의 봉화는 서울을 지킴일네.



---영남의 쇠한 운이 어찌 됨인고?



---학서선생 이 겨울에 또한 가셨네.]





---이 시에 학서 류이좌의 죽음이 같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학서 류이좌가 죽은



후 풍안군 류상조가 또 타계하였던 사정을 반영한다.



---풍안군 류상조는 졸재 류원지의 학통을 이었다. 류성용 - 류진 - 류원지로 이



어나온 서애 류성용 가문의 가학이 다시 그 종손인 류상조에게 전하여 지는 것이다.



풍안군 류상조는 서애 류성용의 주손으로 졸재 류원지의 6대손이다. 그의 부친은 류



종춘으로 호가 외재이다. 외재 류종춘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이조판서가 증직으로



주어 졌으며, 풍은군에 봉하여 졌다.



---류이좌는 서애 류성용의 8대손으로 1763년에 나아서 1837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하회 북촌에 화경당을 창건한 사람이다. 그의 자는 시현이고, 호는 학서이다.



첨지 중추부사 류사춘과 연안 이씨를 부모로 하여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794



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로부터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 호조참판에



까지 이르는 벼슬아치로서의 생활을 30년 이상 계속하였다. 그는 예조참판을 역임한



다음에는 향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삼소재 김영락(김종락)과의 학문



적 인연은 그 때 맺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삼소재문집』에는 학서 류이좌가 쓴 「삼소재기」 한편이 전한다. 이 글 속



에서 그는 ‘삼소재’의 ‘소’를 해석하며 반고의 시, 태극에 대한 논의, 『논어』



『시경』『역경』 등을 종횡으로 누비며 ‘흰색’에 대한 의미를 찾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사례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식견이 넓고 깊음을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하겠



다.



---『삼소재문집』에는 김영락이 학서 류이좌에게 보낸 두 편의 편지글과 그의 죽



음을 슬퍼하는 한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추도시는 다음과 같다.





---[학서 옹이 우리를 버리시니



---병산의 많은 선비 문을 잃었네.



---마음의 요결은 이름난 조상에게서 이었고



---가정의 명성은 후손에 부치네.



---세곳 고을살이 동안에도 효성으로 부모를 모시었고



---4대 임금의 조정에 충성을 다하였네.



---우리 당의 대들보 부러진 슬픔



---상여잡고 저승에 눈물뿌리네.]





---김영락은 자가 기언이고, 호가 삼소재이며, 나중의 이름은 종락이다. 그는 안동



김씨(상락 김씨)로 아버지 김도언과 어머니 청주 정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김도언



의 호는 금산자로, 서애 류성용의 6대손인 임여재 류규의 제자이다. 임여재 류규는



천거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돈녕부 도정을 역임하였다.



---김영락은 정조 22년(1796)에 출생하였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8세에 아



버지를 잃었으므로 고독한 초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27세 경에 풍안군 류상조와



학서 류이좌의 문하에 들어 학문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집에 ‘삼소재’란 현판을



내걸고 소박하게 일생을 살았다. ‘삼소재’란 ‘세 가지 깨끗함’을 뜻하는 것으로



김영락이 용천거사 김기원에게 스스로 밝힌 ‘삼소’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소산에 사니 사는데 소박함이 그 하나요, 소찬을 먹으니 먹는데 소박함이 그



하나요, 소리를 행하니 행실의 소박함이 그 하나로, 합하여 ‘삼소’라고 이름함이



다.]





---위의 말은 이 세 가지의 소박함이 바로 인생의 좌우명임을 알려 준다. 이러한



생의 지표를 집약하여 그는 ‘삼소재’라는 당호를 지었고, 그것을 자신의 자호로



쓰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삼소재 김영락은 41세에 의흥의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문과 급제에는 이



르지 못하였다. 그는 정자와 주자의 글과 『심경』『근사록』을 즐겨 읽었다고 하며,



65세 때부터는 지곡서당을 지어 인근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그는 1875년, 80



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을해년 유월 사일 정침에서 졸하니 향년 팔십이다. . . . 그 해 4월 수직으로



통정에 올랐는데 직첩이 늦게 도착하였으므로 예조에 반납하였으나 임명은 이미 생



존시에 이루어졌으니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하므로 사당에 고유하고 분향하였으므로



귀신과 사람의 한이 조금은 풀렸으리라 여기지만 공의 본성에 맞지 않는 바이니 어



찌 족하다 하리오.]



---완산 류만식이 그의 「묘갈명」에서 적고 있는 말이다.



---그의 문집에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3정’의 폐단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성리학적 덕목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살펴진다. 말하고 행



동하는 것이나 손님을 맞는 법 등에 대해서 까지 가문의 생활규범을 만들어 두고 스



스로도 지키고, 집안 사람들에게도 지키도록 하였다는 것이나, 다른 사람보다 특히



‘열부’를 찬양하는 글을 많이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가 성리학적 덕목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증거하여 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에게 있어서 또 하나 특징적으로 살펴지는 것은 생업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성현들의 이치를 담고 있는 책 중, 특히 유학의 중심 경전인 ‘7서’ 중에 농



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책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주역』『상서』『대



학』『논어』『맹자』『시경』 등에서 일일이 농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을 하나



씩 찾아 적어 놓고는 ‘농업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찌 중요하고 큰 일이 아니겠는



가’하는 식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명문 거족이 성가를 유지해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생업의 토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데, 자신들의 가문은



생업을 도모하지 못하여 가문의 성가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생업의



문제에 유념하지 않으면 않되리라고 후손들을 경계하기도 했다. 이렇게 김영락의 삷



과 사상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생활 주변에서 도덕을 구현하고 삶의 소박한 품



격을 갖추어 내는 것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안동지역의 류성용 문파는 크게 현달한 사람이나 대 사상가를 배출하여 내지는



못하였다. 안동지역 류성용 문파의 중요한 자원들은 류성용의 가문에서 대대로 배출



되었고, 그 밖의 사람들로는 중요한 인물들을 많이 양성하여 낼 수 없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안동지역에서 배출된 사상사적 중요성을 띠는 인물들이



대개 김성일의 학맥과 연결된다는 점과도 무과할 수 없는 일이다.



---안동지역에서 살펴 볼 수 있는 류성용 문파의 사람들은 퇴계 이황의 입장과 학



설, 서애 류성용의 입장과 학설을 성실히 이어 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특별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자학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활과 행위를 통하여 주자학적 세계



를 펼쳐내는 기본적 원칙에 충실하며,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 주목하는 현실주의



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 점에서 그들은 이황 학설의 특징을 이론적으로 심화시켜



내는 학술적 태도를 만들어 나갔던 김성일 일파의 사람들과는 어느 만큼 다른 자리



에 놓여질 수 있을 것이라 하겠다.







안동시사 三(안동의 민속과 문화)/ 안동시사편찬위원회/1999.





▣ 태몽치마와 서애대감. pp198



--서애대감 엄마가 딸만 많이 낳았어. 하루는 친정에 와서 쉬는데



아들을 많이 낳은 형이 태몽 꿈을 꿨다고 하면서



“먹을 것은 없는데, 용 두 마리가 마구 치마에 담기더라.”



그래거든. 이 말을 들은 서애대감 엄마가



“그 치마를 날 벗어다고, 내 비단 치마를 주께.”



하고는 형하고 치마를 바꿔 입었어요.



그리고 “꿈도 내 가지고 간다.”



하고 말하고는 다 떨어진 치마를 입고 집으로 왔는기라.



그러고 치매를 바꿔 입은 그 형은 시댁에 가서 치마를 바꿔 입은 이야기를 하니,



시어른이 성을 내면서 다시 친정을 쫒아 보내 버렸어.



이혼을 당한거지.



그리고 하회에 돌아온 서애 대감 엄마는 그 후에 태기가 있었는데



그래서 낳은 것이 서애대감이래.<풍천면 구담리/1998/김해수, 여, 86>







안동시사 四(안동의 현황)/ 안동시사편찬위원회/1999.





◉민속자료 지정번호 66. 삼소재(三素齋) 1동. 소유자(김석교 ; 金奭敎) 소재지 -



풍산읍 소산리 257. 1985.12.30.지정.







안동시사 五(안동의 인물)/안동시사편찬위원회/1999.





◉김이청(金利請) : 생몰년 미상. 본관 안동(安東). 고려조인. 경순왕(敬順王)의 후



예(後裔). 안동태수(安東太守) 역임. 상락군(上洛君)에 봉해 짐. 『여지승람(輿地勝



覽』안동부(安東府) 인물기(人物記)에 ‘대대(代代)로 명망이 높은 집안이어서 안동



(安東)으로 적(籍)을 받음이 공(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음.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민성(金敏成) : 생몰년 미상. 본관 안동(安東). 이청(利請)의 손자. 문과(文科)



급제. 한림직사관겸장야서령(翰林直史館兼掌冶暑令) 역임. 풍산(豊山) 회곡(檜谷)에



거주.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이 그 슬하에서 배우고 자람.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창(金敞) : 생몰년 미상. 본관 안동(安東). 초명은 효공(孝恭). 민성(敏成)의 자



(子). 고려 희종때 문과(文科) 급제.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무신정권 집권자인 최



이(崔怡)의 정방(政房)에서 일할 때 한 번 본 사람은 잊지 않을 만큼 총명이 뛰어났



음. 태사문하시랑판리부사(太師門下侍郞判吏部事) 역임. 시호 : 문간(文簡)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효인(金孝印) : ? ~1253(고종 40, 계축). 본관 안동(安東). 창(敞)의 제(弟).



금의(琴儀) 문인. 고려 희종 4년(1208) 문과(文科) 급제.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



知制誥) 역임. 성품이 엄해서 굳세며 글씨(예서(隸書))에도 능함.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방경(金方慶) : 1212(강종 1, 임신)~1300(충렬왕 26, 경자). 본관 안동(安



東). 자는 본연(本然). 효인(孝印)의 자(子). 1227년(고종 14) 음보(蔭補)로 벼슬길



에 나아감. 1270년(원종 11)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군(三別抄軍)을 이끌고 반란



을 일으키자 추토사(追討使)로 진도(珍島)까지 후퇴하여 숨은 적도(賊徒)를 토벌.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제주도에 숨은 적도(賊



徒)를 모두 토벌하고 괴수를 처형하여‘삼별초의 난’을 완전히 진압.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에는 몽고연합군(蒙古聯合軍)의 고려측 총사령관으로 일본



정벌에 참가. 분전하였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 1283년(충렬왕 9) 사직(辭職).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 : 上洛郡開國公의 오기임)에 봉해짐. 추증 : 선충협모 정



난정국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宣忠協謀 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 시호 : 충렬



(忠烈).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흔(金忻) : 1251(고종 38, 신해)~ ? . 본관 안동(安東). 초명은 수(綏) 방경



(方慶)의 자(子). 음보(蔭補)로 출사(出仕). 장군으로 부친을 따라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 일본 정벌에 공을 세워 원에서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에 오름. 1290년



(충렬왕 16)에 합단(哈丹)의 침입을 격퇴. 도첨의사사. 삼중대광(都僉議使司. 三重大



匡)에 이름. 아버지의 호두금패(虎豆金牌)를 물려받아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짐.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순(金恂) : 1258(고종 45, 무오)~1321(충숙왕 8, 신유). 본관 안동(安東). 자



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자(子). 충렬왕 때 문과 급제. 부친의 일본 정벌시 몰



래 승선(乘船)하여 종군(從軍)의 공(功)을 세움. 판삼사사(判三司事) 역임. 중대광



(重大匡)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짐. 예서(隸書)에 능하고(대구 동화사(桐華寺)의 홍



진국사비(弘眞國師碑)는 그의 서체임). 음악에 조예가 깊었음. 시호 : 문영(文英).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영돈(金永旽) : 1285(충렬왕 11, 을유)~1348(충목왕 4, 무자). 본관 안동(安



東). 자는 휘곡(暉谷). 순(恂)의 자(子). 문과 급제. 조적(曺頔)(충숙왕 복위 8년, 심



양왕 고(暠)와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됨)의 난에 임금을 시종(侍從)한 공(功)으



로 추성병의익찬공신(推誠秉議翊贊功臣)이 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습봉(襲



封)됨. 좌정승(左政丞)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로 폐정(弊政)을 바로 잡는데 힘



씀. 시호 : 문숙(文肅)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영후(金永煦) : 1292(충렬왕 18, 임진)~1361(공민왕 10, 신축). 본관 안동



(安東). 호는 균헌(筠軒). 순(恂)의 자(子). 음사(蔭仕)로 출사(出仕). 삼사좌윤(三



司左尹)에 이름. 조적(曺頔)의 난’때 공(功)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



德翊贊功臣)이 되고 삼사좌사(三司左事)를 지냄. 1343년(충혜왕 4) 임금이 원나라



에 잡혀 갈 때 홀로 목숨을 걸고 호위. 1356년(공민왕 5) 상락후(上洛侯)에 봉해



짐. 시호 : 정간(貞簡)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구용(金九容) : 1338(충숙왕 복위 7, 무인)~1384(우왕 10, 갑자). 본관 안동



(安東).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묘(昴 ; 上洛君)



의 자(子). 공민왕 때 문과 급제.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정주학(程朱學)을 일으키고 척불양유(斥佛揚儒)의 선봉이 됨. 친명파로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 재임시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권근



(權近) 등과 북원 사신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됨. 저서 : 『척약재집



(惕若齋集)』



○참고 : 『영가지(永嘉誌)』○집필 : 김태안





◉김제안(金齊顔) : ? ~1368(공민왕 17, 무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중현(仲



賢). 구용(九容)의 제(弟). 공민왕 초 문과 급제. 1366년(공민왕 15) 군부좌랑(軍簿



佐郞)으로 전녹생(田祿生)을 따라 하남왕(河南王 ;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에게 사



신으로 가다가 연경(燕京)에 이르러 두나라 수교를 반대하던 원나라 황태자에 의해



제지를 당함. 녹생(祿生)은 바로 환국했으나 홀로 연경에 남아 끝내 국서(國書)를



하남왕에게 전달함. 그 공으로 귀국후 공민왕이 대언(代言)에 임명하여 했으나 신돈



(辛旽)의 저지로 전교부령(典校副令)에 좌천됨. 그후 신돈을 주살(誅殺)하려고 도모



했다가 일이 누설되어 죽임을 당함.



○참고 : 『영가지(永嘉誌)』○집필 : 김태안





◉김구덕(金九德) : ? ~1428(세종 10, 무신). 본관 안동(安東). 제안(齊顔)의 제



(弟). 음보(蔭補)로 숭정판돈령부사에 오름. 여러차례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떠난



후 고을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적을 칭송했다고 함.



○참고 : 『영가지(永嘉誌)』○집필 : 김태안





◉김사형(金士衡) : 1341(충혜왕 복위 2, 신사)~1407(태종 7, 정해). 본관 안동



(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영후(永煦)의 손. 음보(蔭補)로 출사(出



仕).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우왕(禑王) 때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臺諫)으로



있다가 1392년(태조 1) 여러 장상(將相)들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개국공신



1등으로 상락백(上洛伯)에 봉해 짐. 1396년(태조 5) 문하우정승 오도병마도총처치



사(門下右政丞 五道兵馬都總處置使)로 왜구의 본거지인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對



馬島)를 정벌. 1400년(정종 2)에는 권근(權近). 이무(李茂). 이회(李薈) 등과 더불



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歷代帝王混一彊理圖(역대제왕혼일강리도)]를 제작.



시호 : 익원(翼元).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익정(金益精) : 여말~선초년간. 본관 안동(安東). 호는 운암(雲庵). 방경(方慶)



의 후예. 조선 태조 때 문과에 급제. 영월군수(寧月郡守)로 학문 진흥에 힘씀. 부상



(父喪)에 3년을 여막에서 시묘(侍墓)한 효자(孝子). 정려(旌閭)가 내려짐. 이조참판



역임.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돈(金墩) : 1385(우왕 11, 을축)~1440(세종 22, 경신). 본관 안동(安東). 방



경(方慶)의 현손(玄孫). 사형(士衡)의 자(子).(주 : 김돈은 군사공파가 아니신지 ?)



문과 급제. 세종의 총애를 입어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경연관(經筵官)을 겸직. 세



종의 명으로 김조(金銚)와 함께 간의대(簡儀臺). 보루각(報漏閣)을 제작. 이조판서에



이름.



○참고 : 『영가지(永嘉誌)』○집필 : 김태안





◉김뉴(金紐) : 1420(세종 2, 경자)~ ? ). 본관 안동(安東).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구덕(九德)의 증손. 1464



년(세조 10) 문과 급제.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이전(吏典)



을 수교(讎校). 충청도관찰사. 대사헌. 이조참판 역임. 시(詩). 서(書). 금(琴)에 뛰



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 짐.



○참고 : 『용재총화(慵齋叢話)』 『교남지(嶠南誌)』○집필 : 김태안





◉김질(金礩) : 1422(세종 4, 임인)~1478(성종 9, 무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종숙(宗淑)의 자(子). 1450년(세종 32) 문과 급제. 집



현전 수찬(集賢殿 修撰)에 뽑혀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



음. 1456년(세조 2) 성삼문과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위해 거사를 꾀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놓치자 모의의 발각이 두려워 배신하고 고변(告變)하여 사육신(死六臣)의



참변(慘變)을 일으킴. 좌의정에 오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짐. 시호 : 문정(文靖).





○참고 : 『교남지(嶠南誌)』『성종실록(成宗實錄)』『소대기년(昭代紀年)』



○집필 : 김태안





◉김작(金碏) : 1427(세종 9, 정미)~1488(성종 19, 무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위경(衛卿). 호는 동곡(桐谷) 사형(士衡)의 증손(曾孫). 문음(門蔭)으로 통례원봉례



랑(通禮院奉禮郞). 경차관(敬差官) 역임. 1477년(성종 8) 문과 급제. 대사간. 형조



판서 역임. 시호 : 효소(孝昭)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수녕(金壽寧) : 1435(세종 17, 을묘)~ ? . 본관 안동(安東). 호는 노촌(老村)



18세 때 문과 장원급제.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산관 대



제학(三館 大提學)과 호조참판을 지냄. 문명(文名)이 높아 호당(湖當)에 뽑혔으나



일찍 죽음.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짐. 시호 : 문도(文悼)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수동(金壽童) : 1457(세조 3, 정축)~1512(중종 7, 임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미수(眉叟). 호는 만보당(晩保堂). 사형(士衡)의 현손(玄孫). 성종조에 문과 급



제. 사헌부장령.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역임.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



등에 책훈(冊勳)되고, 1510년(중종 5) 영의정(領議政)에 이름. 영가부원군(永嘉府



院君)에 봉해짐. 시호 : 문경(文敬).



○참고 : 『안동김씨보(安東金氏譜)』○집필 : 김태안





◉김광수(金光粹) : 1468(세조 14, 무자)~1563(명종 18, 계해). 본관 안동(安東).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극해(克諧)의 자(子).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볼 뜻이 없어 고향 의성에서 시가(詩歌)를 읊으며 생애를 보



냄. 제향 : 장대서원(藏待書院, 의성). 저서 : 송은집(松隱集).



○참고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집필 : 김태안





◉김희수(金希壽) : 1475(성종 6, 을미)~1527(중종 22, 정해). 본관 안동(安東).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 자행(自行)의 손자. 1507년(중종 2) 문과



급제. 여러 청현직(淸顯職)을 거쳐 대사헌. 관찰사 역임. 김종직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린 바 있으며, 해서(楷書). 예서(隸書)에 능함.



○참고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집필 : 김태안





◉김종락(金宗洛) : 1796(정조 20, 병진)~1875(고종 12, 을해). 본관 안동(安東).



자는 기언(耆彦). 호는 삼소재(三素齋). 도언(道言)의 자. 류상조. 류이좌의 문인. 근



사록. 주자서. 퇴계집 등을 열람하며 서사(書史) 위주로 독서함. 지곡서당을 지어 후



진을 양성함. 저서 : 『삼소재집(三素齋集)』.



○참고 : 『묘갈명(墓碣銘)』○집필 : 이원걸





◉열녀김씨(烈女金氏) : 1872(고종 9, 임신)~1898(광무 2, 무술). 본관 안동(安



東). 사원(士元)의 후손. 곤유(昆裕)의 여(女). 17세에 마암(馬巖)에 사는 정찬동(鄭



燦東, 본관 청주)에게 시집감. 1892년(고종 29, 임진) 남편이 죽음. 남편을 따라 죽



으려고 하였으나 배속의 자식과 시어머니 봉양 때문에 죽음을 참고 견딤. 1898년



그믐날 밤에 문을 부수고 쳐들어 온 완악한 자들에게 손발이 묶이어 끌려나감. 소식



을 듣고 달려온 시고모부인 류능식(柳能植)에 의해 구출됨. 그 뒤 범인들은 죄를 받



게 되었으나 집안 사람들이 잠자는 틈을 타서 목매어 죽음. 사림에서 회장(會葬)함.



1899년 정려가 내려짐.



○참고 : 『와룡면지(臥龍面誌)』.『서울신문』(1991년 2월22일자)○집필 : 이원걸



(2002. 6.28)







▣ 김태서 - 감사드립니다.

▣ 郡/김태영 - 자료 잘보았습니다

▣ 태영/문 -

▣ 김영환 - 편히 앉아서 잘 보고 있습니다만, 그 노고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 김항용 - 정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드디어 우리 문중의 고향 안동에 입성하셨군요. 대단한 자료입니다.

▣ 김재익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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