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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 23-1.(연천군 : 숭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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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03 07:11 조회2,2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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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지(상)/연천군지편찬위원회/2000.





▣ (사진) 장남면 고랑포리의 경순왕릉(사적 제244호).



(사진) 경순왕릉 제례.





▣ 주요성씨현황. pp169.



(1)김씨 : - - - - -(전략) 1930년대 집성촌의 형태를 보였던 강릉 연안 울산 김씨는



점차 점유율이 낮아지면서 무의미해 졌고, 이에 반해 광산 안동 김씨 등이 새롭게



유입,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1995에 의한 안동 김씨 집성촌 위치는 미산면 유촌리 김



촌말(金村)과 장남면 고랑포리 갈매울(갈마동;渴馬洞)로 확인됩니다.





▣ 국가지정문화재. pp426.



◉ 숭의전(崇義殿) 사적 제223호 지정일자(1971.12.28) 미산면 아미리 7.



◉ 경순왕릉(敬順王陵) 사적 제244호 지정일자(1975. 6.25) 장남면 고랑포리 산18-1





▣ 숭의전(崇義殿). pp602~603.



○소 재 지 : 미산면 아미리 7.



○지정번호 : 사적 제223호



--조선시대 대표적인 묘전(廟殿)으로 1971년에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임진나루



터가 가까이 있으며 임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현재



의 숭의전이 위치한 곳에는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 있었던 앙암사가 있었는



데, 이곳에 1397년(태조 6)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지금 숭



의전의 시초이다. 그런데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조선왕조에서 이곳에 고려 왕조의 위



패를 모신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무척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배후에는 고려



조의 충신들을 아우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당 건립이후 1399년(정종 1)에는 왕명에 의해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



宗). 문종(文宗). 원종(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배향하였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1605년(선조 38), 1727(영조 3), 1789(정조 13), 1868(고종 5)



1908(순종 2) 등 5회에 걸쳐 개수와 중수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



소하였으므로 이를 사적으로 지정한 다음 해인 1972년에 복원. 건립하게 되어 오늘



에 이른다.



--현재의 숭의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정전(正殿)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



廳). 이안청(移安廳). 전사청(典祀廳). 앙암재(仰巖齋). 고직사(庫直舍) 등 6동의 부속



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



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



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진) : 숭의전 앙암재 (사진) : 숭의전 천수문(내신문)





▣ 숭의전 느티나무. pp681~682.



○소 재 지 : 미산면 아미2리 산7 숭의전앞.



○지정번호 : 군나무 5-20-3, 5-20-4.



--임진강변 벼랑위에 두그루가 있다. 수령은 약 500년, 높이는 20m, 둘레는 4.7m로



나뭇가지가 왕성하게 퍼져 있다.



--1452년(문종 2)에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하며, 철따라 이 나무가 웅웅 소리



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오고, 이 나무에 까지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



귀가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있다.







연천군지(하)/연천군지편찬위원회/2000.





▣ (사진) 고려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미산면 아미리의



숭의전(사적 제223호)



(사진) 숭의전 제향.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1995





▣ 아미리 숭의전관련 지명. pp257~259



○아미산(峨嵋山) : 숭의전 동북쪽에 있는 산. 임진강 수면 위에 솟아 있는 잠두봉과



숭의전, 아미사가 어우러지는 이 곳의 선경(仙境)이 중국 사천성 아미현 서남쪽에 있



는 아미산에 비견할 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조선 초에 창건된 아미사



(阿彌寺)와 연계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또한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는 마전리에 있던 소금창고 때문인지 ‘염창산(鹽倉山)’



으로도 기재되어 있다.



○작은골 : 어수정 동쪽에 있는 골짜기.



○어수정(御水井) : 숭위전 입구에 있는 우물.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과 철원을 왕래하면서 그 중간 지점이었던 이 곳 앙암사(仰巖寺, 뒤에 숭의전



이 건립됨)에서 쉬면서 마셨던 우물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도동박 : 숭의전 서쪽에 있는 개울. 조선 초 숭의전에서 각종 제기와 귀중품을 훔



쳐 달아나던 도둑이 온몸이 땀에 젖도록 밤새 도망했으나, 날이 밝고 보니 멀리도



못가고 이 곳에서 맴돌고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고 장물을 모두 되찾



은 곳이라 한다. 이수관의 <지봉유설>에도 이 고사(古事)가 실려 있다.



○숭의전(崇義殿) : 지정문화재편 참고.



○숭의전 느티나무 : 숭의전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 고목. 수령은 약 450년, 높이는



20m, 둘레는 4.7m의 거목이다. 이 나무는 조선 문종 2년(1452) 고려 왕씨 후손이 심



었다고 전해 오는데,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지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까마귀가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현재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잠두봉(蠶頭峰) : 숭의전 동쪽 임진강에 수직으로 솟은 바위봉우리. 그 형태가 누



에의 머리와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잠두봉 절벽에는 조선 후기 마전군수를



역임했던 한문홍(韓文洪, 1787~1790 역임)의 칠언율시가 석각되어 있고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잠두봉 석각은 문화유적. 유물편 “암각문” 참고)



○종못(鐘淵) : 숭의전 앞, 임진강에 있는 깊은 소(沼).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



가는 깊이라 한다. 이 못은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숭의전 자리에 있었던 앙암사의 범



종이 이곳에 빠졌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자세한 유래는 아래와 같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상징이었던 종묘 사



직을 없애기 위해 송도의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고려 왕들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



에 띄워 보냈는데, 배는 물흐름과 반대로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역류하며 스스로 삭



녕 지역까지 올라가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동이리 썩은소(동이리편 참고)



에서 하루를 정박한 후에 3㎞ 아래에 있는 앙암사 석벽(잠두봉) 아래로 떠 내려와



머무르게 되었다 한다.



--당시 이 곳에 있던 앙암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철원과 개



성의 중간 지점이며(각각 90리 거리)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이 곳에 자주 머물며



기도하던 왕건의 원찰(願刹)로 고려 왕들의 위패를 실은 배가 앙암사 아래에 머무르



게 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닌 신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날밤 심한 폭우와



함께 천둥벼락이 앙암사를 때려 절은 형체도 알 수 없게 파괴되어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버렸다 한다. 당시 마전군수는 이러한 여러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 이듬해



인 조선 태조 6년(1399) 앙암사가 있던 그 자리에 배에 실려 있던 고려 왕들의 위패



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앙암사가 벼락에 파괴될 당시 경내에 있던 큰 범종이 임진강으로 굴러 물 속



에 잠겼는데 그 후 이 못에서 국난(國難)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져 미



리 예견했다고 하여 이 못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 문헌에 의하면 수면이 잔잔한 날 잠두봉 정상에서 임진강을 내려다 보면 그 때



강속으로 잠긴 범종을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참고문헌 : <동국여지지>, 다산 정약용<대동수경>, 신유한<청천집>



○용못(龍淵) : 종못 위에 있는 못. <동국여지지> 마전군 산천조와 미수 허목의 기



행문에는 이 곳에 대하여 “전설에 의하면 이 곳 수면 위로 용이 나타나면 가뭄이 든



다.” - 龍淵俗云有龍見則早 -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숭의전(崇義殿). pp477~481.



○소 재 지 : 미산면 아미리 7



○지정번호 : 사적 제223호



○지정년월일 : 1971. 12. 28.



--아미산 자락의 품안에 아늑히 자리잡아 검푸른 임진강을 바라보며 창건이래 수 많



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숭의전은 고려 태조를 비롯한 3왕과 고려조 16공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과 숭인전(崇



仁殿 기자), 경주의 숭덕전(崇德殿 신라 시조), 충남 직산의 숭렬전(崇烈殿 백재 온조



왕) 등과 같이 조선시대에 역대 왕조의 시조를 본향하던 곳이다. 더욱이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이었던 앙암사(仰巖寺) 터에 창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우리나



라의 대표적인 묘전(廟殿)이다.



--숭의전의 자세한 연혁은 아래와 같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앙암사터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다



○1399년(정종 1), 왕이 예종에 명하여 태조(太祖)와 함께 고려조에 많은 업적을 쌓



은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



왕(恭愍王) 등 8왕의 위패를 봉안하다.



○1425년(세종 7), 조선의 종묘에는 5실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8왕을 제사함은 합당



치 않다는 유사(有司)의 헌의(獻議)에 의해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왕 만을 춘추



로 봉향하다.



○1451년(문종 1), 전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 4왕과 고려조의 충신



복지겸(卜智謙) 등 16공신을 배향하다.(이 때에 고려 현종의 원손(遠孫) 왕우지(王牛



知)를 찾아 숭의전 부사(副使)로 삼고 순례(循禮)라 이름지어 주어 왕씨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함)



○1566년(선조 9), 왕이 예종에 명하여 풍기 용천사(龍泉寺)에 있던 고려 태조의 화



상(畵像)을 숭의전에 이안하여 봉안하다.



○1605년(선조38), 경기감사 이정귀(李廷龜)가 숭의전을 중수하다.



○1727년(영조 3), 왕의 특명으로 숭의전을 개수하다.



○1789년(정조13), 12월 마전군수 한문홍(韓文洪)이 숭의전을 중건하다.



○1868년(고종 5), 왕의 전교(傳敎)로 개성부유수 서형순(徐衡淳)이 숭의전을 중수하다.



○1908년(순종 2), 마전군수 왕우순(王羽淳), 숭의전 참봉 왕재형(王在衡), 마전군 주



사 정용한(鄭容漢) 등의 논의로 숭의전을 중수하다.



○1950년, 6.25로 인하여 숭의전이 전소되다.



○1971년 12월 28일,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숭의전지(崇義殿址)가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다.



○1972년~1973년까지 왕씨 후손들의 노력과 국비, 지방비의 보조로 숭의전이 현재



의 규모로 복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다.





□ 기 록



○「숭의전기(崇義殿記)」마전군수 박세무(朴世茂) 지음(1543. 중종 38)



○「숭의전중작상량문(崇義殿重作上梁文)」마전군수 한문홍 지음



○「중수숭의전기(重修崇義殿記)」개성유수 서형순 지음



○「중수숭의전기(重修崇義殿記)」마전군수 왕우순 지음





□ 건 물



○정전(正殿, 50평) ○이안청(移安廳, 8.7평)



○배신청(陪臣廳, 13평) ○전사청(典祀廳, 8.17평)



○앙암재(仰巖齋, 13.98평) ○고직사(庫直舍, 15.64평)



○내신문(內神門=天授門, 3칸)



○외신문(外神門, 1칸) ○협문(夾門, 3동 3칸)



○운조문(雲鳥門, 1동)





□ 정전 봉안 4왕



○태조(太祖) : 877(헌강왕 3)~943(태조 26), 재위 918~943. 성은 왕(王). 자는 약천



(若天). 휘는 건(建)



○현종(顯宗) : 992(성종 11)~1031(현종 22), 고려 제8대 왕. 휘는 순(詢). 자는 안세



(安世). 시호는 원문(元文)



○문종(文宗) : 1019(현종 10)~1083(문종 37), 고려 제11대 왕. 제위 1046~1083. 휘



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현종의 3자. 시호는 인효(仁孝)



○원종(元宗) : 1219(고종 6)~1274(원종 15), 고려 제24대 왕. 제위 1259~1274. 휘는



식(植). 자는 일신(日新). 고종의 장자. 시호는 순효(順孝)





□ 배신청 봉안 16공신



○복지겸(卜智謙) : 고려 개국공신. 본관은 오천(汚川, 면천-沔川?). 배현경, 신숭겸,



홍유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태사(太師)의 추증을 받았으



며 시호는 무공(武恭)이다.



○홍 유(洪 儒) : ? ~936(태조 19). 고려 초기의 무장이며 개국공신. 의성홍씨(義



城洪氏)의 시조. 시호는 충렬(忠烈).



○신숭겸(申崇謙) : ? ~927(태조 10). 고려 개국공신. 본관은 평산(平山). 시호는 장



절(壯節).



○유금필(庾금弼) : ? ~941(태조 24). 고려 초기의 무장이며 개국공신. 본관은 평주



(平州). 시호는 충절(忠節).



○배현경(裵玄慶) : ? ~936(태조 19). 고려 초기의 무장이며 개국공신. 본관은 경주



(慶州). 시호는 무열(武烈).



○서 희(徐 熙) : 942(태조 25)~998(목종 1). 고려 초기의 외교가. 본관은 이천(利



川). 압록강 이남의 영토 회복에 큰 공을 세움. 시호는 장위(章威).



○강감찬(姜邯贊) : 948(정종 3)~1031(현종 22). 고려 초기의 명장. 본관은 금주(衿州



: 시흥). 귀주대첩에서 거란족을 섬멸하여 큰 공을 세움. 시호는 인헌(仁憲).



○윤 관(尹 瓘) : ? ~1111(예종 6). 고려 중기의 명신. 본관은 파평(坡平). 여진족



을 정벌하고 북진개척에 큰 공을 세움. 시호는 문숙(文肅).



○김부식(金富軾) : 1075(문종 29)~1151(의종 5). 문신.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묘



청의 난을 평정하였고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



○김취려(金就礪) : ? ~1234(고종 21). 무신. 본관은 언양(彦陽). 고종조에 여러차례



침입한 거란족 섬멸에 큰 공을 세움. 시호는 위열(威烈).



○조 충(趙 沖) : 1171(명종 1)~1220(고종 7). 문신. 본관은 횡천(橫川 : 횡성). 거



란족 섬멸의 용장이며 현명한 재상으로 이름 높았다. 시호는 문정(文正).



○김방경(金方慶) : 1212(강종 1)~1300(충렬왕 26).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삼별초



의 난을 평정하였고 두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



○안 우(安 祐) : ? ~1362(공민왕 11). 무신. 탐진안씨(耽津安氏)의 시조. 공민왕



때 침입한 홍건적 섬멸에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평장사(平章事) 에 이르렀다.



○이방실(李芳實) : 1298(충렬왕 24)~1362(공민왕 12). 무신. 함안이씨의 시조. 공민



왕 때 침입한 홍건적 섬멸에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



렀다.



○김득배(金得培) : 1312(충선왕 4)~1362(공민왕 11).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공민



왕 때 침입한 홍건적 섬멸에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 :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 충신. 학자. 본관은 연일



(延日).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으려 했던 충신이자 성리학자로서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 잠두봉 암각문(蠶頭峰 巖刻文) pp612~613.



○소 재 지 : 미산면 아미2리 잠두봉



--숭의전 동쪽 깍아지른 잠두봉 수직 절벽의 정상부 바로 아래에 있는 석각으로, 가



로 약 300㎝, 세로 250㎝ 넓이의 변성퇴적암. 수직 평면에 조선 후기 마전군수를 역



임했던 한문홍(韓文洪, 1787~1790년 역임)의 작품인 <숭의전을 중수하고, 중작숭의



전(重作崇義殿)>라는 제목으로 된 칠언절구의 한시 2수가 새겨져 있다. 모두 76자이



며 해서체로 되어 있고 뒤에 간지 연도로 보아 1789년(정조 13)의 작품임을 알 수



있는 큰 규모의 암각문이지만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지점에 있어 글자의 정확한



크기를 실측하기 어렵다.



--원문과 해석은 아래와 같다.



重作崇義殿(중작숭의전) 숭의전을 중수하고



麗祖祠宮四百秋(려조사궁사백추) : 숭의전을 지은지 4백년이 되었는데



誰敎木石更新修(수교목석갱신수) :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江山豈識興亡恨(강산기식흥망한) :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요



依舊蠶頭出碧流(의구잠두출벽류) :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 있구나.



往歲傷心滿月秋(왕세상심만월추) : 지나간 세월 만월추(고려의 멸망을 뜻함)에 마음

- - - - - - - - - - - - - - - -슬퍼 하였거늘



如今爲郡廟宮修(여금위군묘궁수) :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중수하였네.



聖朝更乞麗牲石(성조갱걸여생석) : 성조(조선)는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 - - - - - - - - - - - - - - -하였으니



留與澄波萬古流(유여징파만고류) :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호)과 더불어

- - - - - - - - - - - - - - - -길이 이어지리라.



今上十三季乙酉仲秋郡守韓文洪題(금상십삼계을유중추군수한문홍제)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정말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언제 이 많은 양을 타이핑하시는지? 감사 감사

▣ 김영환 -

▣ 김재익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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