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25.(마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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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04 14:50 조회1,920회 댓글0건본문
마산시사/마산시사편찬위원회/1997.
▣ 원(元)의 간섭기 마산권. pp124~125.
--고려가 원(몽고는 1271년에 원이라 칭했다)과 강화를 맺은 이후 당한 첫 시련은
일본(日本) 원정이었다.
(중략)
--원이 일본정벌의 장정에 착수한 것은 고려 원종 15년(1274)의 일이다. 이 해는 원
종이 승하하고 충렬왕이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원 세조는 일본정벌의 첫 단계로서
봉주(鳳州, 봉산). 김주(金州, 김해) 등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병참기지를 만들기
시작하는 한편 전함의 건조와 군량의 확보를 서둘렀다.
(제1차 원정에 대한 기록은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으로 생략함)
--원 세조는 2차 동정에 필요한 전함의 신조와 군량의 확보를 고려에게 부담시키는
한편, 충렬왕 3년(1276)에는 탐라(耽羅, 제주도)에 목마장을, 충렬왕 6년(1279)에는 동
정의 전담기구를 합포에 개설하니 이것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다.
(제2차 원정에 대한 기록도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으로 생략함)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의 두 차례에 걸친 동정에 있어
우리 고장 합포는 발진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합포가 어떤 이
유로 동정의 발진기지가 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이곳은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
연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던 포구였다. 당시에는 인공적으로 방파제를 축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뿐만아니라 일찍부터 진(鎭)이 설
치되어 있었고, 일본과 직선거리도 짧았기 때문에 발진기지로서 활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고장 마산은 옛날부터 군사상으로는 남쪽 바다를 지키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옮긴이 주(註) : 위의 내용은 창원시사(上)/창원시사편찬위원회/1997. pp242~243
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창원시사에는 선안동김씨와 관련된 또다른 기록이
확인되지 아니하므로 생략하기로 합니다.
▣ 회원성 성지(도 지정기념물 제88호) pp1265~1266.
◎ 소재지 : 마산시 자산동. 추산동 뒷산(환주산)
--자산동 소재 무학초등학교 뒷산은 말발굽 모양으로 평지에서 정상부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북동(北東)은 추산동 뒷산으로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남(南)은 소규모
이나 자산천(玆山川)이 흘러 이를 자연참호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서편의
성벽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인데, 붕괴된 채로 길로 이용되고 있으며 성(城) 둘레는
약 2㎞ 정도다. 너비가 2~3m의 성벽을 따라 많은 와편(瓦片)이 수집된다. 동남성벽
(東南城壁) 바로 아래에 속칭 몽고정(蒙古井)이 있다. 와편과 축성방법으로 보아 고
려시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전언에 의하면 마산시 신포동 매축공사 때 이곳 성벽을 헐었다는 설이 있다. 서벽
은 비교적 많이 남아있고 서문지(西門址)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성
은 고려 때 몽고와 같이 일본을 정벌코자 증축한 정동행성지(征東行省址)이다. 고려
때 충렬왕이 병사들을 독려코자 이곳에 머물렀고 동남도(東南道) 병마절도영이 이곳
에 있다가 왜구와 삼별초에 의해 병영이 붙타자 고려 우왕 때 배극렴에 의해 합성동
으로 옮겼다. 1987년 중앙문화재위원 김철중. 한영희. 김원룡 박사 등이 와서 보고
고려시대에 중요한 유적이라며 국가지정 및 복원계획을 요구하였으나 이의익 마산시
장 때 산복도로 개설을 구실로 하루밤 사이에 없던 일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북벽
의 일부가 남아 있어 경남문화재위원회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몽고정(蒙古井) pp1270.
◎ 소재지 : 마산시 자산동 118번지
--이 우물은 고려 충렬왕 7년(1281) 원나라가 고려와 합세하여 일본을 정벌하고자
이곳 합포에 정동행성을 설치할 때 군마의 음료수를 공급한 우물이라 전한다. 우물
옆에는 몽고군 전차의 수례바퀴로 불리는 직경 1.4m의 원형의 바퀴형 석물이 있는데
이는 수레바퀴가 아니라 옛날 대형 약연(大形 藥碾)의 일종이다. 몽고정이란 이름은
1932년 일본인이 붙였다고 전하며 원래는 고려정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옮긴이 주 : 선. 후안동 본관 확인이 어려운 김종신이란 분이 계신데 이분에 대하
---여 아시는 종친께선 의견란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김종신(金鍾信) pp1489.
--초대 마산 민선시장이다. 본관은 안동. 호는 매하(梅下). 마산시 오동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 전문부 경제과에 수학하다 22세가 되던해
에 귀국하였다. 1923년경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사회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특히 혹세무민을 일삼던 사이비 종교 보천교(普天敎)를 성토하는데 맨 앞장에 서기
도 하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에 현 경남신문 전신인 남선신문(南鮮新聞)의 사장을 거
쳐 마산상공회의소 회두가 되었다. 1952년 4월에는 초대 마산 민선시장으로 당선되
었다. 1954년에 제3대 민의원이 되었고 4년후에 자유당 경상남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 이후에도 1966년 마산대학장을 역임했고 69년 경남매일신문 제8대 사장과 마산
문화방송주식회사 제2대 사장을 맡았으며 72년에는 마산문화TV방송주식회사 제2대
사장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는 마산지역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 김재원 - 조카님..! 연일 시군지 순례 노고가 많으십니다. 안동 행사때 소주한잔 하십시다. 꼭 오세요!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이것이 <몽고정>을 <고려정>으로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솔내김영환 - 이 많은 자료 타자 하실려면 손가락 부르텄겠습니다. 그 열정과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씀만 전할 길 없어 죄송합니다. 윤만씨... 우리의 보물...
▣ 김태서 - 감사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
▣ 김재익 -
▣ 김항용 - 놀랍고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수고많으시고요. 덕분에 많은걸 알게 되었습니다
▣ 원(元)의 간섭기 마산권. pp124~125.
--고려가 원(몽고는 1271년에 원이라 칭했다)과 강화를 맺은 이후 당한 첫 시련은
일본(日本) 원정이었다.
(중략)
--원이 일본정벌의 장정에 착수한 것은 고려 원종 15년(1274)의 일이다. 이 해는 원
종이 승하하고 충렬왕이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원 세조는 일본정벌의 첫 단계로서
봉주(鳳州, 봉산). 김주(金州, 김해) 등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병참기지를 만들기
시작하는 한편 전함의 건조와 군량의 확보를 서둘렀다.
(제1차 원정에 대한 기록은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으로 생략함)
--원 세조는 2차 동정에 필요한 전함의 신조와 군량의 확보를 고려에게 부담시키는
한편, 충렬왕 3년(1276)에는 탐라(耽羅, 제주도)에 목마장을, 충렬왕 6년(1279)에는 동
정의 전담기구를 합포에 개설하니 이것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다.
(제2차 원정에 대한 기록도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으로 생략함)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의 두 차례에 걸친 동정에 있어
우리 고장 합포는 발진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합포가 어떤 이
유로 동정의 발진기지가 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이곳은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
연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던 포구였다. 당시에는 인공적으로 방파제를 축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뿐만아니라 일찍부터 진(鎭)이 설
치되어 있었고, 일본과 직선거리도 짧았기 때문에 발진기지로서 활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고장 마산은 옛날부터 군사상으로는 남쪽 바다를 지키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옮긴이 주(註) : 위의 내용은 창원시사(上)/창원시사편찬위원회/1997. pp242~243
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창원시사에는 선안동김씨와 관련된 또다른 기록이
확인되지 아니하므로 생략하기로 합니다.
▣ 회원성 성지(도 지정기념물 제88호) pp1265~1266.
◎ 소재지 : 마산시 자산동. 추산동 뒷산(환주산)
--자산동 소재 무학초등학교 뒷산은 말발굽 모양으로 평지에서 정상부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북동(北東)은 추산동 뒷산으로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남(南)은 소규모
이나 자산천(玆山川)이 흘러 이를 자연참호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서편의
성벽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인데, 붕괴된 채로 길로 이용되고 있으며 성(城) 둘레는
약 2㎞ 정도다. 너비가 2~3m의 성벽을 따라 많은 와편(瓦片)이 수집된다. 동남성벽
(東南城壁) 바로 아래에 속칭 몽고정(蒙古井)이 있다. 와편과 축성방법으로 보아 고
려시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전언에 의하면 마산시 신포동 매축공사 때 이곳 성벽을 헐었다는 설이 있다. 서벽
은 비교적 많이 남아있고 서문지(西門址)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성
은 고려 때 몽고와 같이 일본을 정벌코자 증축한 정동행성지(征東行省址)이다. 고려
때 충렬왕이 병사들을 독려코자 이곳에 머물렀고 동남도(東南道) 병마절도영이 이곳
에 있다가 왜구와 삼별초에 의해 병영이 붙타자 고려 우왕 때 배극렴에 의해 합성동
으로 옮겼다. 1987년 중앙문화재위원 김철중. 한영희. 김원룡 박사 등이 와서 보고
고려시대에 중요한 유적이라며 국가지정 및 복원계획을 요구하였으나 이의익 마산시
장 때 산복도로 개설을 구실로 하루밤 사이에 없던 일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북벽
의 일부가 남아 있어 경남문화재위원회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몽고정(蒙古井) pp1270.
◎ 소재지 : 마산시 자산동 118번지
--이 우물은 고려 충렬왕 7년(1281) 원나라가 고려와 합세하여 일본을 정벌하고자
이곳 합포에 정동행성을 설치할 때 군마의 음료수를 공급한 우물이라 전한다. 우물
옆에는 몽고군 전차의 수례바퀴로 불리는 직경 1.4m의 원형의 바퀴형 석물이 있는데
이는 수레바퀴가 아니라 옛날 대형 약연(大形 藥碾)의 일종이다. 몽고정이란 이름은
1932년 일본인이 붙였다고 전하며 원래는 고려정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옮긴이 주 : 선. 후안동 본관 확인이 어려운 김종신이란 분이 계신데 이분에 대하
---여 아시는 종친께선 의견란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김종신(金鍾信) pp1489.
--초대 마산 민선시장이다. 본관은 안동. 호는 매하(梅下). 마산시 오동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 전문부 경제과에 수학하다 22세가 되던해
에 귀국하였다. 1923년경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사회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특히 혹세무민을 일삼던 사이비 종교 보천교(普天敎)를 성토하는데 맨 앞장에 서기
도 하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에 현 경남신문 전신인 남선신문(南鮮新聞)의 사장을 거
쳐 마산상공회의소 회두가 되었다. 1952년 4월에는 초대 마산 민선시장으로 당선되
었다. 1954년에 제3대 민의원이 되었고 4년후에 자유당 경상남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 이후에도 1966년 마산대학장을 역임했고 69년 경남매일신문 제8대 사장과 마산
문화방송주식회사 제2대 사장을 맡았으며 72년에는 마산문화TV방송주식회사 제2대
사장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는 마산지역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 김재원 - 조카님..! 연일 시군지 순례 노고가 많으십니다. 안동 행사때 소주한잔 하십시다. 꼭 오세요!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이것이 <몽고정>을 <고려정>으로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솔내김영환 - 이 많은 자료 타자 하실려면 손가락 부르텄겠습니다. 그 열정과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씀만 전할 길 없어 죄송합니다. 윤만씨... 우리의 보물...
▣ 김태서 - 감사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
▣ 김재익 -
▣ 김항용 - 놀랍고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수고많으시고요. 덕분에 많은걸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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