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永煦와 상산관(경북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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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7-24 18:47 조회2,470회 댓글0건본문
김영후(金永煦) 할아버지는 생몰년 1292-1361(충렬왕18-공민왕10), 호 균헌(筠軒), 시호 정간(貞簡)으로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입니다.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는 상산관 (지방유행문화재 제157호)을 김영후 할아버지께서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확인하여 보았습니다. 그 결과를 게재합니다.
▣ 경순왕에서 김영후 할아버지까지의 世系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경순왕 김부 (金傅)
② 김은열 (金殷說) (4남)
③ 김숙승 (金叔承) (2남) ★구안동김씨 시조
④ 김일긍 (金日兢)
⑤ 김이청 (金利請)
⑥ 김의화 (金義和)
⑦ 김민성 (金敏成)
⑧ 김효인 (金孝印) (2남)
⑨ 김방경 (金方慶) ★구안동김씨 중시조
⑩ 김 순 (金恂) (3남)
⑪ 김영후 (金永煦) (2남)
▣ 상주시청 홈페이지 (http://www.sangju.kyongbuk.kr/)에 상주 상산관에 대한 설명 가운데 다음 기록이 있습니다.
위 치 : 만산동 699
지 정 : 지방유형문화재 제157호
수량 : 1동
소유주 : 상주시
현재 북천전적지 내에 소재한 상산관은 일명 객관으로도 불린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상산지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목사 김영후가 중수하였다 하니 그 이전 부터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후 1526년(중종 21)에 소실된 것을 목사 윤탕(尹宕)이 중전하였고 1592년 임란으로 완전 소실된 것을 1666(현종 7)에 목사 이송령(李松齡) 이 왕산남쪽(현 상주경찰서 자리)으로 옮겨 세웠다 1940년에 다시 남성동의 현 상주여자중학교 자리로 이전하였더가 1991년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이 객관의 기(記)는 근재(謹齋) 안유(安裕 1282∼1348)이 1343년 상주목사가 되어 썼는데 오직 객사만이 갗추어져 우렁차고 성대한 게 남방의 제일 이라 했으며 주(州)가 사통팔방 으로 통하는 요지에 있는데다 고도 웅주로서 빈번한 전령봉사자와 오가는 관원 선비 들을 맞기 위해 세워졌음을 밝혀 놓았다
이 객관은 조선시대에는 고을마다 세워 목사 가 부임하면 이곳에서 향궐망배의 의식 및 주로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되었으나 자연 이곳은 문회(文會)시회(詩會)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상산관에서 시를 읊은 이로 백운 이규보(1168∼1241)는 1196년9월2일 당시 공검지를 수축한 사록 최정빈의 초청 으로 목사를 비롯한 상산의 선비들과 성대한 주연(시회)을 베풀었다 상산관에는 정구 조준, 안성, 김종직, 윤탁연, 황준량, 오상, 이양원 등의 명관과 향토인으로서는 조원윤, 정상리 등의 시문이 걸려 명실공히 상산 제일의 시회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 상주시청에 질의한 질의답변한 내용입니다.
⊙ 질의내용
상주시 만산동 699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상산관(지방유형문화재 제157호)을 설명하는 내용중에 귀 상주시청 홍페이지와 문화재관리국에서 CD로 제작한 문화유적총람3편에 보면
현재 북천전적지 내에 소재한 상산관은 일명 객관으로도 불린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상산지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목사 김영후(金永煦)가 중수하였다 하니 그 이전 부터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후략> 참고문헌】상주문화원, 1997, <<상주문화유적>>, 262. 라는 기록이 있는데
김영후(金永煦)에 대하여 [디지털한국학] 인터넷을 검색해본 결과
"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몰년이 1292-1361(충렬왕18-공민왕10)으로 상산관을 중수한 1307년은 16세에 해당되어 연도에 오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귀 시에서 보유하고 있는 [상산지]나 상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상주문화유적]에 김영후(金永煦)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 있으면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답변내용
상주시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궁금하신 사항에 대하여 화일을 첨부하였사오니 참고하시기 바라며 상주시 문화공보담당관실 관광문화재담당(054)530-6063 담당자 권홍열 앞으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붙임 : 상산관과 김영후 목사 1건. 끝.
<상산관과 김영후 목사>
문의하신 『상산관과 김영후 목사』에 대하여 문헌자료룰 참고로 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산관은 귀하께서 알고 계신 것 처럼 상주시 홈페이지 문화재분야 상산관편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이는 상산지 등에 있는 기록을 참고로 하였지만 사실과 다르다고 의문이 가는 부분입니다.
상산관은 상산지2권에『本洪侯世周所創立......(이하생략)』라고 되어 있으나 상주의 역대 목민관을 기록한 "尙州牧先生案"에 홍세주란 기록이 없고,
다만 상산지1권에『在州衙東高麗金永煦爲牧使時改築......(이하생략)』이라고 되어 있어 김영후 목사가 취임하여 그전부터 있던 상산관을 개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상주목선생안"에는 김영후 목사는 본관이 안동, 1292년부터 1361년까지 살았으며 고려 충렬왕 (1274년~1308년)때 1307년 상주목사로 취임한 기록이 있으나 몇 년간 재임했으며 언제 이임했는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여기서 김목사의 생몰년을 대비해보면 16세에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그전부터 있던 상산관을 중수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또 다른 기록인 고려 충숙왕조편을 보면 김영후 목사는 충숙왕 14년 (1327년)에 상주목사로서 상주객관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충숙왕 때는 김영후란 목사는 재임기록이 없어 상산지 내용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바입니다.
이에 수긍이 가지 않는 부문이 있기는 하나 상산관의 기록은 상주 지방의 기록인 "商山誌"와 "尙州牧先生案"을 중시하여 적었음을 알려 드리오니 밝혀진 다른 기록이 있으면 문화공보담당관실 관광문화재담당 ( 054-530-6063 )로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http://www.koreandb.net/)에 실려있는 김영후(金永煦) 할아버지 기록입니다.
시대 고려
생몰년 1292-1361(충렬왕18-공민왕10)
본관 안동(安東)
자
호 균헌(筠軒)
시호 정간(貞簡)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34세) 1325년(충숙왕 12)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48세) 1339년(충숙왕 복위 8)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중서성에 올릴 때 이를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50세)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적42)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田)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51세)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52세)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있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53세)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55세)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61세) 1352년(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65세)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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