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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 26-1.(철원군 : 역사인물 김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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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06 07:42 조회1,6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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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군지(상)/철원군지증보편찬위원회/1992.







▣ 사진.



○ 遼東伯 金應河將軍 廟庭碑(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 1-1번지.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05호 1985년 9월 13일자.



○ 포충사(褒忠祠 : 충무공 김응하장군 배향)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 1-1번지]



○ 忠武公 金應河將軍 影幀(충무공 김응하장군 영정 : 1580년~1619년)







철원군지(하)/철원군지증보편찬위원회/1992.





▣ 金應河(김응하)





1. 사냥을 좋아한 소년.



--김응하의 본은 안동, 자는 景羲(경희)이며, 1580년(선조 13년) 3월 철원군 어운



면 갈운동(현 하갈리)에서 고려 僉議中贊 上將軍 忠烈公 金方慶(첨의중찬 상장군 충



렬공 김방경)의 10대손 地四(지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응하 소년은 숙성하여 어른스러웠으며,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다. 가난한 농가에



서 태어난 그에게는 사냥한 새나 짐승으로 부모님께 반찬거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는데, 응하의 나이 14세 때에 임진왜란 중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지



성껏 묘자리를 구하여 장군 두 사람이 난다는 명당을 얻어 안장하였다.



--응하는 아우 應海(응해)와 함께 사냥하러 다니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새사냥을



나갔다가 범을 만나 고두리살로 범의 정수리를 쏘았는데, 화살이 정수리를 뚫고 贓



腑(장부)까지 관통했다. 급소를 맞은 범은 꼼짝없이 앉은 채로 죽고 말았다. 그는 기



운이 세어 단검하나로 산돼지를 잡았고, 짐 실은 말을 도랑에서 올리기도 하였으며,



18세 때에는 덕령산에서 주먹으로 범을 때려잡는 일도 있어서 김장군이란 별호로 불



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2. 무과급제.



--청년 응하는 팔척 장신에 몸집도 우람했으며, 기상이 호걸스러웠다. 한번에 황소



다리 하나를 다 먹어치웠으며, 남달리 술을 좋아하여 두세말 술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시곤 했지만, 정신을 잃거나 쓰러지는 일이 없었다. 한 때는 야생마를 얻어 길들인



일도 있었고, 均田使(균전사) 밑에 量田監(양전감)으로 일하면서 농민들 편에 서서



정의로운 선행을 하여 칭송을 받았다.



--24세 때 여름, 강원도 관찰사 朴承宗(박승종)이 관내 순시차 왔을 때 무술대회를



열었는데, 응하는 뛰어난 무예로 박관찰사의 눈에 들었고 병서를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하라고 권고를 받았다. 그는 漢灘江(한탄강) 상류의 경승지 칠만바위를 중심으



로 심신의 수련을 계속하여 병서를 열심히 읽고 깨우쳤다.



--2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내 함경도 鍾城(종성)에 변경수비의 임무를 맡고



부임, 삭막한 국경지대에서의 처음 겪는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투철한 책임감



으로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 때 강원도 관찰사로 있었던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로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응하는 군관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 당시 선조의



국상중이어서 관리들의 주색 풍류를 금하고 근신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청년 응



하는 절제하며 근신하는 생활을 잘 하였으므로 박승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3. 서민적인 목민관.



--응하는 31세 때 都體察使 李恒福(도체찰사 이항복)의 추천으로 정 5품 문관인



함경도의 慶源府 判官(경원부 판관)에 발탁되었다. 후에 중앙관서인 五衛都摠府(오



위도총부)의 經歷(경력)을 거쳐, 동급 문관인 함경도 삼수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삼



수군은 갑산부와 함께 압록강 상류에 접하고 있어서 풍속과 습관조차 다를 만큼 교



통이 불편하여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깊은 산중인



데 삼동의 추위도 대단하며 대부분 주민들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가난하였다. 김응



하 군수는 훗날 淸白吏(청백리)가 된 金時讓(김시양 : 옮긴이 주-하담할아버지로 추



정됨)이란 막역한 친구가 보내준 한지를 솜대신 넣어 지어 입고 찬 바람을 면하였



다. 그후 그는 정 3품 무관인 兵馬虞候(병마우후)를 제수 받고 함경도 鏡城(경성)에



있는 北兵營(북병영)에 근무하였다. 그 때 병마절도사 金景瑞(김경서)의 지시를 따



라 府城(부성)의 동문과 남문의 문루와 망대를 修築(수축)하게 되었는데, 士卒(사



졸)들이 힘드는 일을 할 때에는 김응하 우후도 같이 일하면서 밤낮으로 감독하였으



므로 그 큰 공사를 한 달만에 훌륭하게 마쳤다.



--39세 되던 1619년 여름 편안도 助防將(조방장)겸 선천군수로 가게 되었다. 효성



과 우애와 의리가 있는 사람들은 薦擧(천거)하게 하여 예를 다하여 대접하였고 재주



있는 사람들을 수습하여 그 앞길을 열어주었다. 또 지혜롭고 용맹스런 사람을 불러



신임하니 백성들은 모두 김군수를 존경하였다. 사생활에 있어서는 근엄하고 청렴하



였으며 10여년 공직에 머물며 상관에게 아첨하거나 부하에게 교만하지 않았고 백성



을 대할 때는 체통을 차리는 일이 없이 늘 서민적인 사람이었다.





4. 구원군 좌영장으로 출정하다.



--1616년에 後金(후금)을 세운 여진족 建州衛(건주위)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吟赤



; 노아음적)는 차츰 그 세력을 확장하여 만주 땅을 차지한 후 1618년에는 撫順(무



순), 淸河(청하) 등지를 점령하고 쇠약해 가는 명나라의 동부지방을 침략하는 것이



었는데 명나라는 이에 대항하여 요동군 經略使(경략사) 곧 총사령관에 楊鎬(양호)를



임명하고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좌. 우. 중. 남의 네길로 나누어 진군하게 하고, 우



리 조선에 대하여 원병을 청하는 재촉이 심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와 명나라는 임진



왜란 때문에 7년동안이나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입어 국력이 매우 피폐하였고,



명나라는 새로 일어난 후금의 세력을 막아낼 도리가 없어서 구원군을 청하여 온 것



이었다. 광해군은 이 국제정세의 변환기에 처하여 밖으로는 형세관망의 태도를 취하



여, 명나라를 저버리지도 후금의 노여움을 사지도 않는 용의주도한 양단정책을 쓰는



동시에 안으로는 임진왜란에 파괴된 城池(성지)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국방경비를 튼튼히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흥국 후금을 깔보고 문화가 발달된 명



나라를 계속 대국으로 섬겨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어서 광해군의 양단정책은 반



대에 부딪쳤다. 원병을 거부하던 광해군은 드디어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것에 대



한 의리때문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도원수에 姜弘立(강홍립). 부원수에 金景瑞(김경



서)를 임명하고 1만 3천의 평안도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



선천군수 김응하는 병력 3천을 맡은 좌영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中軍



(중군)에 車載重(차재중), 千摠(천총)에 申忠業(신충업). 金堯卿(김요경). 桂如杠(계



여강)을 임명하였는데 평소에 모두 김응하를 흠모하던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때는 2월 중순이라 1만 3천의 대군이 압록강 얼음위를 건너가게 되었는데 응하



는 주민들에게 싸리바지를 엮게 해 이를 밟고 지나가게 하니 압록강 이편에서 저편



까지 바자를 밟고가는 군사들로 장사진을 이루게 되었다.





5. 조선 원군의 항전.



--좌. 우. 중. 남 네길로 나누어 진군했던 명나라의 십만 대군이 모두 패망하는 안



타까운 전황과, 명. 청 두 큰 세력의 운명을 결정한 싸루후산 전투에서 후금의 막강



한 세력 앞에 참패해 버린 상황은 접어 두더라도 기울어 가는 명의 국운과, 이 국면



에 처한 조선 원병의 설 자리를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원군의 선발대는 1618년 2월25일 일찌감치 명나라 전략기지인 경마전에



도착하였으며 김응하 장군은 먼저와 있던 남로군의 유정 도독과 만났다. 유정 도독



은 조선군 총사령관인 강홍립 장군의 진군이 더딘 것에 불평을 하였으나, 김장군은



보병이 먼길을 빨리 걸을 수 없었으므로 다소 늦을 것이 예상되지만 강 도원수는 중



영군과 함께 곧 당도할 것이라고 두둔하였다.



--이 날 늦게 조선 원군이 모두 기지에 도착하였으므로 밤에 작전회의를 열어, 남



로군이 일선에 나가고 구원부대가 이선에 가다가 적의 대부대를 만나면 앞뒤에서 서



로 응하여 나아가 공격하는 椅角進功(의각진공)의 작전을 쓰기로 하였다.



--경마전을 떠난 구원부대는 식량보급이 않되는 와중에도 험로를 무릅쓰고 말의 배



에 차는 鴨兒河(압아하)의 깊은 강물을 건너기도 하는 등 많은 고생을 하면서 3월 1



일 馬家寨(마가채)에 도착하였다.



--김응하 장군은 예하 부대원들에게 “전시의 식량과 병기는 적을 쳐서 빼앗아 얻는



법인데, 지금 되놈의 군사가 많아 보이니 용기를 내라.”하고 사기를 북 돋우니 부대



원들은 모두 기운을 내는 것이었다. 선봉에 선 좌영군은 마가채에서 진군하니 20㎞,



그 사이에 후금의 군대가 수백명 혹은 천여기가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좌영군



은 10여개의 堡(보)를 격파하고 많은 적을 베어버리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



다. 그리고 땅속에 숨겨 놓았던 적의 곡식을 찾아내어 돌절구에 찧어 죽을 쑤어 먹



기도 하면서 고생스럽게 진군하였던 것이다. 한편, 뒤에 떨어져 따라오던 중영군과



우영군은 도원수 강홍립의 통제를 받아 적과의 접전을 피하고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 광해군은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는 밀지를 도원수 강홍립에게 주었다고 한다.





6. 深河(심하)에서의 혈전.



--김응하 장군은 자기가 생명을 걸고 부대의 전투능력을 최고로 발휘하여 조선 원



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후금으로 하여금 조



선 원군을 얕보지 않도록 과시해야 하는 막다른 처지에 있음을 인식하였다.



--3월 3일 부차령을 넘은 좌영군은 다음날 심하마을이 앞에 보이는 언덕에 진을



쳤다. 한편, 중영군과 우영군은 고개 위에 머물러 있었다. 김응하 장군은 진격하지



않고 적을 유인하여 치는 방어전략을 폈다. 앞 줄에는 포병을, 뒷줄에는 궁노수를 배



치하고 진 앞에는 나무를 얽어 가로질러서 적군이 말을 달려 좌영군의 진에 덤비지



못하도록 장애물(拒馬木;거마목)을 쳐 놓았다. 장군기를 휘날리며 선두에서 지휘하던



김장군은 위엄있게 전군에 호령하였다. “듣거라. 총을 든 군사는 화약을 재고, 활을



든 군사는 살을 메우고 있다가 나의 북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끝까



지 힘껏 싸워라. 군졸 한 명이 길목을 굳게 지키면 천명의 적군도 두렵지 않다는 병



법의 말은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必生則死(필생즉사)’요 ‘必死則生(필사즉



생)’이니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필사의 각오로 전투에 임하라. 명령을 어기는 자는



엄한 군법에 처하겠다.” 잠시 뒤 철갑을 두른 적의 기마병들이 돌격하여 왔다. 백여



미터 안에 다가오자 김장군은 ‘사격개시’의 북을 울렸다. 많은 적들이 가로막이에 걸



려 넘어지고, 총에 맞아 죽고, ‘푸르륵 푸르륵’ 화살소리가 나는대로 적군들이 말에서



두 팔을 벌리며 땅에 떨어지니, 빈 안장을 업은 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였다.



누루하치의 둘째 아들이 앞장서서 큰 소리를 지르며 공격하여 오다가 김장군의 화살



에 맞아 땅에 떨어졌다. 장수를 잃은 적군이 사기를 잃고 퇴각하자 좌영군의 사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첫 접전을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잠시 후 병력을 보충한 적군은



누루하치의 장남 貴盈哥(귀영가)의 결사대 백여기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하여 왔다.



파상공격이다. 김장군은 계속 북을 울리며 독전한다. 사기가 충천한 좌영군은 결사적



으로 총탄과 화살을 퍼부어 또 적을 격퇴시켰다. 이러한 접전이 세차례, 번번이 아군



이 승리하였고, 적군은 베어 넘기는 삼대처럼 쓰러졌으며 살아남은 이는 도망쳐 버



렸다. 그런데 갑자기 맹렬한 회오리 바람이 일더니 황사강풍을 몰아와 티끌이 사방



으로 날리어서 좌영군을 에워싸며 얼글을 때리고 햇빛을 가리어 총과 활을 쏠 수 없



게 되었다.



--후금은 “이 때다.“하고 힘을 모아 공격하여 좌영군의 측면으로 총과 화살을 비오



듯 퍼부어 댔다. 그러나 김응하 장군은 최후까지 싸워 옥쇄하겠다는 각오로 말에서



내려 큰 버드나무를 의지하며 활을 당겼다. 김장군은 필사의 결의를 보이므로 군사



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되도록 김장군을 따라 싸우며 항복치 아니하였다. 김장군은



활을 쏘는데 유명한 그의 활솜씨는 다른 장군들의 화살보다 갑절이나 멀리 나가고,



빠르며, 한 대도 빗맞힘이 없어 한 화살에 적병을 셋(一矢三殺;일시삼살)이나 꿰 뚫



었다. 한 낮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김장군은 계속하여 활을 쏘아 삼백여개의 화살이



다 떨어져 버렸다. 김장군은 허리에 찼던 장검을 빼어 적을 쳤다. 목이 잘려 구르는



소리가 ‘뜨르르 뜨르르’ 산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김장군은 운이 다하였는지



장검이 부러졌으나 젊은 시절에 호랑이를 때려잡던 굳센 맨주먹을 불끈 쥐고 더욱



분발하였다. 이 때 창을 든 적병이 버드나무 뒤에 숨어서 김장군을 기습하였다. 마침



내 김장군은 적병의 창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용맹스럽게 항전하던 김장군을 잃자 조선 원군의 사기는 떨어져 버리고 사상자



수는 늘어만 갔다. 이에 도원수 강홍립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스스로 무방을 풀어



적장에 항복하였다.





7. 최고의 영예.



--조정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김장군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그가 전사한 다음달에



병조판서를 추증하였고, 5월에는 旌忠祠(정충사)를 용만강가에 짓고 충혼비를 세워



충의의 혼을 위로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忠武公 (충무공)의 시호를 내렸고 명나라



의 신종황제는 요동백(遼東伯)을 追封(추봉)하였다.



--1620년 조정에서는 김장군에게 다시 영의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처럼 빠른 기간



에 전직 군수에게 영의정을 추증함은 파격적인 대우요, 최고의 영예였다.



--1621년 9월에 訓練都監(훈련도감)을 시켜 김장군의 사적을 적은 忠烈錄(충렬록)



을 출판 간행하였다. 전에는 김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이 네 군데나 있었는데 고향인



철원에 있는 포충사(褒忠祠)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2월 8월의 中丁日(중정일)에



철원향교 주관으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다음은 遼東伯 金應河將軍 廟庭碑(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에 대한 기록입니다>







▣ 태영/문 - 대부님,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윤만아저씨 연일 자료 올리시느라 수고 많습니다.

▣ 김항용 - 이 많은 글을 직접 쓰시는 노고, 참으로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자료 감사합니다

▣ 솔내 영환 - 생생한 전투를 보았습니다.

▣ 김정중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김주회 - 김응하 장군의 자세한 자료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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