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발간사 04 (1739기미보 서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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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06 08:01 조회1,703회 댓글0건본문
족보 발간사 04 (1739기미보 서02)
대종회 서고정리를 하면서 문중의 족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구분이 잘 안돼서 이참에 족보도 공부할겸 족보간행 등 문중사에 헌신하신 선조님들의 행적을 찾아 정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중의 최초의 最古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422년전인 임진왜란 12년전, 선조13년, 1580년에 간행한 경진보입니다. 그로부터 160년이 지난 영조15년, 1739년에 기미보를 발간하게 됩니다.
▣ 족보 발간사
---기미보 (영조15, 1739)
3. 기미보 서
상지15년 1739 기미 추 ---충렬공 13세손 자현대부 지중추부사 90세 ★ (환) 근서
4. ●기미보 서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사간원 대사간 ★유( +維) 근서
5. 기미보 발
숭정 갑신후 96년 기미 중추상한(=팔월초순) ---후손 ★漢章(한장) 敬발
6. 기미보 기사
상지 15년 기미 추 ---예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 ★遇兌(우태) 근지
---기미보 (영조15, 1739)
4. ●기미보 서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사간원 대사간 ★유 근서
우리 김씨는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나와서 고려 상락 충렬공에 이르러 비로소 안동으로 분적되었다.
전대에는 始林(시림=경주)에서 8,9백년 동안에 王者의 포상이 相承相繼하였고 후대에는 고려때부터 이조에 이르기까지 문장과 勳業의 인사들이 줄을 이어 내려온지 이제 또 수천년이 되었으니 그 근원이 멀고 흐름이 길며 줄기가 茂盛하고 가지가 번창하여 후손들이 경향각지에 총총히 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보는 오직 만력 경진(1580)에 휘★ (오)가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발간한 한책 뿐이다.
그것이 매우 소략함을 알지만 지금으로부터 만력 경진년은 이미 백여년이 경과되었으니 後生들이 족보에 빠져서 보이지 않는 것도 또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이에 우리 ★先親(=김유 선친)께서 이를 개탄하시어 수보를 자기의 책임으로 생각하사 사방으로 순회하시면서 자료를 수집하여 箱子에 넣어 잠겨둔 것이 모두 7편이었다.
재향 일파는 거리끼는 일이 있어 완성을 보지 못하고 버려 두었고, 여러 弟兄과 不肖輩(불초배)는 분주하게 경향각지로 돌아 다니며 사방의 遊宦(유환)이 빈번히 秩遷(질천)함이 많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成冊하지 못하고 어언간 우금 수십년이 흘렀다.
지나간 辛亥년에(= ? ) 종인들이 비로소 발의하여 구보를 완성코저 각파의 收單을 다시 해오게 하여 간사 5,6명으로 하여금 원고를 협력 수정케 하는데, 도정공 ★聖游와 지평공 ★權이 그 일을 주관하였다.
그런데 ★지평공이 돌연 별세하고 3년이 지난 乙卯년에 책이 비로소 인쇄에 들어가자 ★도정공께서 또 이어 돌아가시니 일은 마침내 중단되고 다시 거론하는 사람도 없더니
금년 봄에 와서 通文 온 것을 보니 전 첨추 ★遇兌가 또 가옥을 팔아 그 돈을 희사하여 공사를 계속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첨추는 戊申역란에 隻手(척수)로써 賊魁(적괴) 13명을 참수하고 물러 나와도 자기의 공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마음 속으로 스스로 치하해 말하되 "이제부터는 우리 족보가 꼭 성취될 줄 안다. 대절이 있는 자는 반듯이 大事를 이룬다는 것은 고인의 말이 아닌가?" 하고서
드디어 우리 근족들에게 상의하여 각기 힘에 따라 出財하여 출판비에 보조하여 책을 발간하니 모두 9권으로 되었다.
상락공으로 중시조를 삼은 것은 安東으로 貫籍을 하였기 때문에 상락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외파는 손자까지만 제한한 것은 내외의 경중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傍系와 지파를 별보로 부친 것은 선계가 혹 난상한데가 있기 때문이다.
親弟(=김유 동생)인 직장 ★湜이 또한 일찍부터 이 일에 참여하여서 끝까지 수고하였고 필역에 수고하기는 종인 ★漢章과 진사 ★禾+集(집)이다.
아! 기쁘도다! 한번 책을 펼쳐만 보면 어느 파는 어느 대에서 갈려 나간 것과 누구는 우리와 몇촌간이 되며 누가 멀고 누구는 가까움을 알게 되니 그 처음에는 모두 한 사람의 근본에서 태어난 것이라.
각자 조상을 追慕하고 종족과 화목한 誼(의)를 다해야 하니 이것이 예전에 성인이 인도를 세워서 민덕을 후이 하려는 뜻이다.
무릇 천지만파가 면면무궁하여 명신과 거공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니 누가 우리 조상의 遺德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나의 ★선친(=김유 선친)께서 30여년간을 심력을 소비하자 ★도정공 이외 여러분을 거쳐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일조에 완벽하게 만드셨으니 9泉에 계신 영혼들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며 不肖(불초)들의 감행이 더욱 어떠하다고 할까?
고인이 말하기를 "효는 충의 근본이라" 하였으니 그 충에서 바로 효를 알 수 있음은 곧 ★첨추 이분이라 하겠다.
또 재력도 넉넉지 못하면서 박중한 대사를 성취하였으니 어찌 충효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또한 종인들도 본받을 일이므로 아울러 말해 두노라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 (유) 근서
●김유
●김유 선친 =김중화 (생부 김중우)
●김유 동생 =김식
부사) 김익련-김세귀-김중우-김유,김식
<사마방목>
★부사) 김유(金) / 肅宗 28 式年 生員
【시험년도】 숙종(肅宗) 28 (1702) 식년(式年)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70
【본인성명】 김유(金)
【본인 자】 여즙(汝楫)
【본인생년】 을축(乙丑) 1685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구경하(具慶下)
【본인문과】 경인(庚寅) 1710 증(增)*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중우(金重禹)
【부친품계】 통훈대부(通訓大夫)
【부친관직】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행판관(行判官)
【부친관직】 대구진관(大邱鎭管)/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안항(제)】 김호(金浩), 김숙(金潚), 김완(金浣), 김정(金淨), 김항(金沆), 김회(金澮), 김영(金渶)
<조선조방목>
★부사) 김유(金<유0x6DA1>)
숙종(肅宗)36년(171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9(丙科29)
>>> 인적사항
생년(生年) 1685년, 을축
자(字) 여즙(汝楫)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중우(金重禹)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세귀(金世龜)
증조부(曾祖父) 김익련(金益鍊)
외조부(外祖父) 이강(李綱)
처부(妻父) 정형익(鄭亨益)
제(弟) 김호(金浩)
숙(叔) 김중희(金重熙)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702(임오)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우윤&(右尹&), 대사간&(大司諫&)
부사) 김호(金浩) / 肅宗 43 式年 生員
【시험년도】 숙종(肅宗) 43 (1717) 식년(式年)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73
【본인성명】 김호(金浩)
【본인 자】 양직(養直)
【본인생년】 무진(戊辰) 1688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문과】 임인(壬寅) 1722 알(謁)*
【본인양시】 양시(兩試)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중화(金重華)
【부친품계】 통덕랑(通德郞)
【생부성명】 ★김중우(金重禹)
【생부품계】 통훈대부(通訓大夫)
【생부관직】 금산(金山)/행군수(行郡守)
【생부관직】 상주진관(尙州鎭管)/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생부구존】 자시하(慈侍下)
【안항(형)】 ★김유(金)
【안항(제)】 김숙(金潚), 김순(金淳), 김협(金浹),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서(金)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족보를 통하여 잠시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하나하나의 고리로서 시공을 초월한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인격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각자 사랑해야 겠지요.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솔내 영환 -
▣ 김정중 - !!!
▣ 김재익 -
▣ 김재이 -
대종회 서고정리를 하면서 문중의 족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구분이 잘 안돼서 이참에 족보도 공부할겸 족보간행 등 문중사에 헌신하신 선조님들의 행적을 찾아 정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중의 최초의 最古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422년전인 임진왜란 12년전, 선조13년, 1580년에 간행한 경진보입니다. 그로부터 160년이 지난 영조15년, 1739년에 기미보를 발간하게 됩니다.
▣ 족보 발간사
---기미보 (영조15, 1739)
3. 기미보 서
상지15년 1739 기미 추 ---충렬공 13세손 자현대부 지중추부사 90세 ★ (환) 근서
4. ●기미보 서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사간원 대사간 ★유( +維) 근서
5. 기미보 발
숭정 갑신후 96년 기미 중추상한(=팔월초순) ---후손 ★漢章(한장) 敬발
6. 기미보 기사
상지 15년 기미 추 ---예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 ★遇兌(우태) 근지
---기미보 (영조15, 1739)
4. ●기미보 서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사간원 대사간 ★유 근서
우리 김씨는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나와서 고려 상락 충렬공에 이르러 비로소 안동으로 분적되었다.
전대에는 始林(시림=경주)에서 8,9백년 동안에 王者의 포상이 相承相繼하였고 후대에는 고려때부터 이조에 이르기까지 문장과 勳業의 인사들이 줄을 이어 내려온지 이제 또 수천년이 되었으니 그 근원이 멀고 흐름이 길며 줄기가 茂盛하고 가지가 번창하여 후손들이 경향각지에 총총히 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보는 오직 만력 경진(1580)에 휘★ (오)가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발간한 한책 뿐이다.
그것이 매우 소략함을 알지만 지금으로부터 만력 경진년은 이미 백여년이 경과되었으니 後生들이 족보에 빠져서 보이지 않는 것도 또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이에 우리 ★先親(=김유 선친)께서 이를 개탄하시어 수보를 자기의 책임으로 생각하사 사방으로 순회하시면서 자료를 수집하여 箱子에 넣어 잠겨둔 것이 모두 7편이었다.
재향 일파는 거리끼는 일이 있어 완성을 보지 못하고 버려 두었고, 여러 弟兄과 不肖輩(불초배)는 분주하게 경향각지로 돌아 다니며 사방의 遊宦(유환)이 빈번히 秩遷(질천)함이 많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成冊하지 못하고 어언간 우금 수십년이 흘렀다.
지나간 辛亥년에(= ? ) 종인들이 비로소 발의하여 구보를 완성코저 각파의 收單을 다시 해오게 하여 간사 5,6명으로 하여금 원고를 협력 수정케 하는데, 도정공 ★聖游와 지평공 ★權이 그 일을 주관하였다.
그런데 ★지평공이 돌연 별세하고 3년이 지난 乙卯년에 책이 비로소 인쇄에 들어가자 ★도정공께서 또 이어 돌아가시니 일은 마침내 중단되고 다시 거론하는 사람도 없더니
금년 봄에 와서 通文 온 것을 보니 전 첨추 ★遇兌가 또 가옥을 팔아 그 돈을 희사하여 공사를 계속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첨추는 戊申역란에 隻手(척수)로써 賊魁(적괴) 13명을 참수하고 물러 나와도 자기의 공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마음 속으로 스스로 치하해 말하되 "이제부터는 우리 족보가 꼭 성취될 줄 안다. 대절이 있는 자는 반듯이 大事를 이룬다는 것은 고인의 말이 아닌가?" 하고서
드디어 우리 근족들에게 상의하여 각기 힘에 따라 出財하여 출판비에 보조하여 책을 발간하니 모두 9권으로 되었다.
상락공으로 중시조를 삼은 것은 安東으로 貫籍을 하였기 때문에 상락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외파는 손자까지만 제한한 것은 내외의 경중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傍系와 지파를 별보로 부친 것은 선계가 혹 난상한데가 있기 때문이다.
親弟(=김유 동생)인 직장 ★湜이 또한 일찍부터 이 일에 참여하여서 끝까지 수고하였고 필역에 수고하기는 종인 ★漢章과 진사 ★禾+集(집)이다.
아! 기쁘도다! 한번 책을 펼쳐만 보면 어느 파는 어느 대에서 갈려 나간 것과 누구는 우리와 몇촌간이 되며 누가 멀고 누구는 가까움을 알게 되니 그 처음에는 모두 한 사람의 근본에서 태어난 것이라.
각자 조상을 追慕하고 종족과 화목한 誼(의)를 다해야 하니 이것이 예전에 성인이 인도를 세워서 민덕을 후이 하려는 뜻이다.
무릇 천지만파가 면면무궁하여 명신과 거공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니 누가 우리 조상의 遺德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나의 ★선친(=김유 선친)께서 30여년간을 심력을 소비하자 ★도정공 이외 여러분을 거쳐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일조에 완벽하게 만드셨으니 9泉에 계신 영혼들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며 不肖(불초)들의 감행이 더욱 어떠하다고 할까?
고인이 말하기를 "효는 충의 근본이라" 하였으니 그 충에서 바로 효를 알 수 있음은 곧 ★첨추 이분이라 하겠다.
또 재력도 넉넉지 못하면서 박중한 대사를 성취하였으니 어찌 충효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또한 종인들도 본받을 일이므로 아울러 말해 두노라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 (유) 근서
●김유
●김유 선친 =김중화 (생부 김중우)
●김유 동생 =김식
부사) 김익련-김세귀-김중우-김유,김식
<사마방목>
★부사) 김유(金) / 肅宗 28 式年 生員
【시험년도】 숙종(肅宗) 28 (1702) 식년(式年)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70
【본인성명】 김유(金)
【본인 자】 여즙(汝楫)
【본인생년】 을축(乙丑) 1685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구경하(具慶下)
【본인문과】 경인(庚寅) 1710 증(增)*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중우(金重禹)
【부친품계】 통훈대부(通訓大夫)
【부친관직】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행판관(行判官)
【부친관직】 대구진관(大邱鎭管)/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안항(제)】 김호(金浩), 김숙(金潚), 김완(金浣), 김정(金淨), 김항(金沆), 김회(金澮), 김영(金渶)
<조선조방목>
★부사) 김유(金<유0x6DA1>)
숙종(肅宗)36년(171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9(丙科29)
>>> 인적사항
생년(生年) 1685년, 을축
자(字) 여즙(汝楫)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중우(金重禹)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세귀(金世龜)
증조부(曾祖父) 김익련(金益鍊)
외조부(外祖父) 이강(李綱)
처부(妻父) 정형익(鄭亨益)
제(弟) 김호(金浩)
숙(叔) 김중희(金重熙)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702(임오)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우윤&(右尹&), 대사간&(大司諫&)
부사) 김호(金浩) / 肅宗 43 式年 生員
【시험년도】 숙종(肅宗) 43 (1717) 식년(式年)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73
【본인성명】 김호(金浩)
【본인 자】 양직(養直)
【본인생년】 무진(戊辰) 1688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문과】 임인(壬寅) 1722 알(謁)*
【본인양시】 양시(兩試)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중화(金重華)
【부친품계】 통덕랑(通德郞)
【생부성명】 ★김중우(金重禹)
【생부품계】 통훈대부(通訓大夫)
【생부관직】 금산(金山)/행군수(行郡守)
【생부관직】 상주진관(尙州鎭管)/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생부구존】 자시하(慈侍下)
【안항(형)】 ★김유(金)
【안항(제)】 김숙(金潚), 김순(金淳), 김협(金浹),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서(金)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족보를 통하여 잠시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하나하나의 고리로서 시공을 초월한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인격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각자 사랑해야 겠지요.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솔내 영환 -
▣ 김정중 - !!!
▣ 김재익 -
▣ 김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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