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부 송악당에 충렬공 영정이?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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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12 21:51 조회1,555회 댓글0건본문
김해부 송악당에 충렬공 영정이? 02
지난번 대종회관에서 서고정리하다가 보니 1937년(정축) 9월에 발행된 안동김씨화수록 권2에 충렬공 영정(고려시대 무관 귀마개와 왕방울 눈) 사진과 한문으로 간략히 기재된 설명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영정 그림은 1956년에 발간된 안동김씨보감에도 똑같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이참에 정확한 내력과 연원을 알고 싶어서 한문으로 소개된 간략한 설명문을 한국정신문화원연구원 홈페이지에 번역을 의뢰하여 그 결과를 받아서, 다시 김해부 송악당이 지금도 있는지? 에 대해서 김해시청 홈페이지에 문의한 결과 받은 답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충렬공 영정이 있었던 김해부 송악당은 현재 없습니다.
1937년 안동김씨 하수록 작성당시 송악당이 있었거나, 그 당시도 송악당이 없었다면 보관되어 온 충렬공 영정을 참고로 작성하였다고 생각되나
현재 송악당의 사진이나 영정의 소재 유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 문의내용
<김해시청 홈페이지 (http://www.gimhae.go.kr)>
김해부 송악당이 지금도 있는지요?
저희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 1937년(정축) 9월에 발행된 안동김씨화수록 권2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도 김해부 송악당이 있는지? 있다면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김해시에 몽고관련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면 아울러 알려 주세요. 저의 이메일은 kimjoohoee@cb21.net입니다.
또한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아울러 이에 대한 내용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충렬공 김방경(1212-1300)은 저의 24대조되시는 분으로 고려 원종 충렬왕조에 삼별초를 토벌하시고 2차에 걸쳐 여원연합군을 이끌고 일본정벌을 하신 분입니다.
<원문>
忠烈公 尊影
高麗國都元帥金方慶
忠烈公
高麗元宗朝에 金海府松岳堂은 公이 南征時에 留次金剛社하사 祀松岳之神立堂也러니 邑人이 設 忠烈公尊影하고 兼祀 故로 以傳于世라 事在文獻備考
<번역문>
고려국 도원수 충렬공 김방경 영정
고려 원종조에 김해부 송악당은 충렬공이 남정시(일본정벌시)에 이곳 금강사에 머무르면서 송악의 신위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고을 사람들이 여기에 공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은 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되어 있다.
<꽃전설> 홀아비-바람꽃
수필가- 박경용
모짜르트의 포근한 산들바람/꽃을 자세히볼려면 꽃에크릭
서젯골은 만장대의 서북기슭에 자리잡은 약수터로 김해의 역사와 더불어 애환을 같이 하고 있다. 고려때는 금상사(金剛砂)와 부전루(樓)가 있었으며 여몽연합군이 일시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 김방경(金方慶)將軍의 토왜재단(土倭齋壇)인 송악단(松嶽壇)과 장군차(將軍茶)로도 알려진다. 이곳에 흐른는 약수를 금령천(金鈴泉)이라 하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역사상 과거 제도가 정착되고 사회가 안정되었을 때 이곳 서젯골은 선비들의 과거 준비하는것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것은 여기서 나오는 약수를 마시면 머리가 영특해 지고 과거에 합격하는 율이 높다는 속설이 있었다. 거기에다 신혼초에 이 물을 마시면 머리좋은 수재를 낳는다는 얘기도 내려오는 것이었다.
---후 략---
▣ 답변내용 (우편으로 받음)
김주회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서 우리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문의하신 내용에 대해 간단히 답변드리겠습니다.
현재 송악단이 있던 곳은 김해 구산동 백운대고분 (경상남도 기념물 제223호) 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릉의 하단부입니다.
김해여고 뒤편과 산복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재골 약수터 가는 길 중간에 있습니다.
승용차를 이용하실 경우, 동김해IC에서 활천고개를 지나 산복도로를 통해 삼계, 진영 쪽으로 가시다가 왼쪽편에 보이는 절개된 산봉우리 모양의 언덕 하단부에 백운대라는 비석이 있는 곳이 송악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주변환경은 동상대상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구획정리되었으며, 잔존한 유적 등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시에 남아 있는 몽고관련 여원연합군에 대한 전설은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김해문화원에서 발간된 책자중 관련부분을 보내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타 문의사항은 김해시 문화정비과 055)330-3924 담당자 송원영으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증보 김해지리지 (김해문화원, 1996)>
●松嶽壇(송악단)
옛날의 松嶽堂(송악당)으로 金剛社의 서북 약 200步許에 있는 작은 구릉으로서 神祠(신사)를 松嶽堂이라고 했다.
고려의 충렬왕 즉위년(1274) ★金方慶 장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金剛社에서 留宿(유숙)했는데, 그때 개경의 松嶽神을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戰勝을 빌었으므로 이 구릉을 松嶽堂이라 부르게 되고, 김해 사람도 城隍神과 함께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세종때 지리지를 보면 府北 3里에 있는 [盆山城隍護國之神](분산성황호국지신)에게 守令이 行祭한다고 나와 있다.
지금은 高麗葬터, 白雲臺라고도 부르고 있다.
●金剛川
盆山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로 西上洞과 大成洞의 경계가 되며, 지금은 대부분 복개되었다.
●金剛社址
송악산 아래에 있었던 큰 사찰이며, 그 때문에 이 마을을 大寺里라고 불렀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까지는 金剛社라고 했으며, ★충렬왕때(1274-1281) 東征하는 함선의 출발지점인 합포(마산)로 가기 위하여 왕이 금주(김해)로 내려왔을 때 이곳에 行宰(행재)하고, 社 앞의 한 茶나무를 보고 將軍茶(장군차)의 이름을 내렸다.
태종때 영의정 ★하륜이 지은 金剛社不毁樓記(금강사 불훼루 기)와 ★서거정의 金剛社詩가 邑誌에 나온다.
금강불훼는 불교에서 나오는 말이며, 도관찰사 ★안순이 김해부사 ★현맹인에게 명하여 승도의 힘으로 불훼루를 쌓고 남쪽에는 물을 끌어와서 연못을 만들고, 동쪽에는 토계를 쌓아 그 위에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세종21년 (1439) 관찰사 ★이선이 도절제사 ★이교와 함께 이 루상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루가 무너져 압사자가 8명이나 되었으므로 1명이 파직된 기록이 세종실록에 보인다.
<국역 김해읍지 (김해문화원, 1984)>
壇廟(단묘)
●松嶽壇(송악단)
府北 3里에 있음. 고려장군 ★金方慶이 일본을 토벌할 때 여기서 빌어 신령의 도움이 있었다. 지금 폐지됨
佛宇(불우)
●金剛社(금강사)
府北 大寺里에 있는데 고려 충렬왕때 합포에서 때때로 오는 사람들이 여기서 놀았다. 不毁樓(불훼루)가 있다.
영의정 ★하륜의 불훼루기에 왈 --- 후 략 ---
▣ 김재익 - 충렬공 영정에 설이 분분하나 현재 음수제에 있는것은 제작 연대가 얼마 되지않고 (대종회 근거있음) 옛 전해오는 구전에 제주도 돌 하루방이 충렬공의 모습을 보고 제작되었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제주도민이 난을 평정하고 도민을 편히 생업에 종사할수 있도록한 것에 감사 ,수호신 격으로 충렬공 모습의 돌 하루방을 세웠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 김재이 - 정신문화 연구원까지 의 고서번역에 온정성을 다해 여러사람이
▣ 솔내 영환 - 그간 노고에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충렬공할아버지에 대한 영정 추적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재익 종친님의 의견, 제주도 돌하루방과 1937년 화수록 게재 충렬공 영정을 비교해 보니 비슷한 것 (왕방울 두눈) 같습니다. 충렬공께서 제주도 삼별초 난을 토벌하신 바 있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
▣ 김주회 - 郡/태영 종친님 의견으로는 대마도에 충렬공 영정이 있다는 말을 옛날에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대마도에 충렬공 영정이 있다면 두차례에 걸쳐 일본정벌을 가실때 여원연합군이 거쳐간 대마도 어디에 있겠지요? 일본 사람들은 기록과 유물을 잘 보관한다고 하는데, 현재도 있을지 모르구요
▣ 김윤만 - 충렬공 영정과 윤관장군 영정이 비슷한 모습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영정 제작시기가 비슷하여 당시의 화풍이 그런 것을 아닐까요?
▣ 김은회 - 감사합니다.
지난번 대종회관에서 서고정리하다가 보니 1937년(정축) 9월에 발행된 안동김씨화수록 권2에 충렬공 영정(고려시대 무관 귀마개와 왕방울 눈) 사진과 한문으로 간략히 기재된 설명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영정 그림은 1956년에 발간된 안동김씨보감에도 똑같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이참에 정확한 내력과 연원을 알고 싶어서 한문으로 소개된 간략한 설명문을 한국정신문화원연구원 홈페이지에 번역을 의뢰하여 그 결과를 받아서, 다시 김해부 송악당이 지금도 있는지? 에 대해서 김해시청 홈페이지에 문의한 결과 받은 답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충렬공 영정이 있었던 김해부 송악당은 현재 없습니다.
1937년 안동김씨 하수록 작성당시 송악당이 있었거나, 그 당시도 송악당이 없었다면 보관되어 온 충렬공 영정을 참고로 작성하였다고 생각되나
현재 송악당의 사진이나 영정의 소재 유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 문의내용
<김해시청 홈페이지 (http://www.gimhae.go.kr)>
김해부 송악당이 지금도 있는지요?
저희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 1937년(정축) 9월에 발행된 안동김씨화수록 권2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도 김해부 송악당이 있는지? 있다면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김해시에 몽고관련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면 아울러 알려 주세요. 저의 이메일은 kimjoohoee@cb21.net입니다.
또한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아울러 이에 대한 내용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충렬공 김방경(1212-1300)은 저의 24대조되시는 분으로 고려 원종 충렬왕조에 삼별초를 토벌하시고 2차에 걸쳐 여원연합군을 이끌고 일본정벌을 하신 분입니다.
<원문>
忠烈公 尊影
高麗國都元帥金方慶
忠烈公
高麗元宗朝에 金海府松岳堂은 公이 南征時에 留次金剛社하사 祀松岳之神立堂也러니 邑人이 設 忠烈公尊影하고 兼祀 故로 以傳于世라 事在文獻備考
<번역문>
고려국 도원수 충렬공 김방경 영정
고려 원종조에 김해부 송악당은 충렬공이 남정시(일본정벌시)에 이곳 금강사에 머무르면서 송악의 신위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고을 사람들이 여기에 공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은 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되어 있다.
<꽃전설> 홀아비-바람꽃
수필가- 박경용
모짜르트의 포근한 산들바람/꽃을 자세히볼려면 꽃에크릭
서젯골은 만장대의 서북기슭에 자리잡은 약수터로 김해의 역사와 더불어 애환을 같이 하고 있다. 고려때는 금상사(金剛砂)와 부전루(樓)가 있었으며 여몽연합군이 일시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 김방경(金方慶)將軍의 토왜재단(土倭齋壇)인 송악단(松嶽壇)과 장군차(將軍茶)로도 알려진다. 이곳에 흐른는 약수를 금령천(金鈴泉)이라 하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역사상 과거 제도가 정착되고 사회가 안정되었을 때 이곳 서젯골은 선비들의 과거 준비하는것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것은 여기서 나오는 약수를 마시면 머리가 영특해 지고 과거에 합격하는 율이 높다는 속설이 있었다. 거기에다 신혼초에 이 물을 마시면 머리좋은 수재를 낳는다는 얘기도 내려오는 것이었다.
---후 략---
▣ 답변내용 (우편으로 받음)
김주회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서 우리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문의하신 내용에 대해 간단히 답변드리겠습니다.
현재 송악단이 있던 곳은 김해 구산동 백운대고분 (경상남도 기념물 제223호) 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릉의 하단부입니다.
김해여고 뒤편과 산복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재골 약수터 가는 길 중간에 있습니다.
승용차를 이용하실 경우, 동김해IC에서 활천고개를 지나 산복도로를 통해 삼계, 진영 쪽으로 가시다가 왼쪽편에 보이는 절개된 산봉우리 모양의 언덕 하단부에 백운대라는 비석이 있는 곳이 송악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주변환경은 동상대상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구획정리되었으며, 잔존한 유적 등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시에 남아 있는 몽고관련 여원연합군에 대한 전설은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김해문화원에서 발간된 책자중 관련부분을 보내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타 문의사항은 김해시 문화정비과 055)330-3924 담당자 송원영으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증보 김해지리지 (김해문화원, 1996)>
●松嶽壇(송악단)
옛날의 松嶽堂(송악당)으로 金剛社의 서북 약 200步許에 있는 작은 구릉으로서 神祠(신사)를 松嶽堂이라고 했다.
고려의 충렬왕 즉위년(1274) ★金方慶 장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金剛社에서 留宿(유숙)했는데, 그때 개경의 松嶽神을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戰勝을 빌었으므로 이 구릉을 松嶽堂이라 부르게 되고, 김해 사람도 城隍神과 함께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세종때 지리지를 보면 府北 3里에 있는 [盆山城隍護國之神](분산성황호국지신)에게 守令이 行祭한다고 나와 있다.
지금은 高麗葬터, 白雲臺라고도 부르고 있다.
●金剛川
盆山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로 西上洞과 大成洞의 경계가 되며, 지금은 대부분 복개되었다.
●金剛社址
송악산 아래에 있었던 큰 사찰이며, 그 때문에 이 마을을 大寺里라고 불렀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까지는 金剛社라고 했으며, ★충렬왕때(1274-1281) 東征하는 함선의 출발지점인 합포(마산)로 가기 위하여 왕이 금주(김해)로 내려왔을 때 이곳에 行宰(행재)하고, 社 앞의 한 茶나무를 보고 將軍茶(장군차)의 이름을 내렸다.
태종때 영의정 ★하륜이 지은 金剛社不毁樓記(금강사 불훼루 기)와 ★서거정의 金剛社詩가 邑誌에 나온다.
금강불훼는 불교에서 나오는 말이며, 도관찰사 ★안순이 김해부사 ★현맹인에게 명하여 승도의 힘으로 불훼루를 쌓고 남쪽에는 물을 끌어와서 연못을 만들고, 동쪽에는 토계를 쌓아 그 위에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세종21년 (1439) 관찰사 ★이선이 도절제사 ★이교와 함께 이 루상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루가 무너져 압사자가 8명이나 되었으므로 1명이 파직된 기록이 세종실록에 보인다.
<국역 김해읍지 (김해문화원, 1984)>
壇廟(단묘)
●松嶽壇(송악단)
府北 3里에 있음. 고려장군 ★金方慶이 일본을 토벌할 때 여기서 빌어 신령의 도움이 있었다. 지금 폐지됨
佛宇(불우)
●金剛社(금강사)
府北 大寺里에 있는데 고려 충렬왕때 합포에서 때때로 오는 사람들이 여기서 놀았다. 不毁樓(불훼루)가 있다.
영의정 ★하륜의 불훼루기에 왈 --- 후 략 ---
▣ 김재익 - 충렬공 영정에 설이 분분하나 현재 음수제에 있는것은 제작 연대가 얼마 되지않고 (대종회 근거있음) 옛 전해오는 구전에 제주도 돌 하루방이 충렬공의 모습을 보고 제작되었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제주도민이 난을 평정하고 도민을 편히 생업에 종사할수 있도록한 것에 감사 ,수호신 격으로 충렬공 모습의 돌 하루방을 세웠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 김재이 - 정신문화 연구원까지 의 고서번역에 온정성을 다해 여러사람이
▣ 솔내 영환 - 그간 노고에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충렬공할아버지에 대한 영정 추적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재익 종친님의 의견, 제주도 돌하루방과 1937년 화수록 게재 충렬공 영정을 비교해 보니 비슷한 것 (왕방울 두눈) 같습니다. 충렬공께서 제주도 삼별초 난을 토벌하신 바 있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
▣ 김주회 - 郡/태영 종친님 의견으로는 대마도에 충렬공 영정이 있다는 말을 옛날에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대마도에 충렬공 영정이 있다면 두차례에 걸쳐 일본정벌을 가실때 여원연합군이 거쳐간 대마도 어디에 있겠지요? 일본 사람들은 기록과 유물을 잘 보관한다고 하는데, 현재도 있을지 모르구요
▣ 김윤만 - 충렬공 영정과 윤관장군 영정이 비슷한 모습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영정 제작시기가 비슷하여 당시의 화풍이 그런 것을 아닐까요?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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