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31.(이천군 : 우암사, 자점보, 백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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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21 03:42 조회1,584회 댓글0건본문
이천군지/이천군지편찬위원회/1984.
▣ 본죽리(本竹里) 일실사효(一室四孝) 정문(旌門) pp748~749.
--율면 본죽리 김용진(金龍振)씨 집 문전에 세워져 있던 것을 우암사(寓菴祠) 개축
당시 그 정문(正門)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金銑)과 그의 동생인 김석(金
錫), 이들의 두 누이동생 등 4남매의 효행을 표한 정문(旌門)이다.
--김선은 안동인으로 문단공(文端公)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해지자 이들 4남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므로서 다시 소생, 7일간을
더 연명케 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영묘(英廟) 계유년(癸酉年, 서기
1753)에 조정에서 정려(旌閭)하고 영조대왕이 친히 일실사효(一室四孝)라 써서 사액
(賜額)하였다고 전한다.
▣ 본죽리(本竹里) 우암사(寓菴祠) pp755.
--율면 본죽리 밤골부락 상단에 있는데 퇴락(頹落)하여 정문(正門)과 담장은 무너
진지 오래고 남아있는 사당 건물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무너져 가고 있다. 명종 때
사람인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의 사당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
히 초서(草書)에 능했다고 한다. 김주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응림(應霖), 호를 우암
(寓菴)이라 했다.
--1539년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 등을 지내고,1563년 종
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서 명나라 연경에 갔다가 그 곳에서 별세하여 명의 황제가 관
(棺)과 수의를 하사하고 예조판서와 양관(兩館) 대제학을 추증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단공(文端公)이다.
▣ 오남리(梧南里) 자점보(自點洑) pp798.
--보(洑)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흐르는 냇물을 막아 둑을 쌓은 것을 말하는데, 자
점보(自點洑)는 경기도와 충청북도 음성군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淸渼川) 상류에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장호원읍 오남리 지역으로 백족산(白足山) 동남단 끝이 된다.
--인조반정 때의 공신(功臣)으로 왕실의 외척이 되어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권세를 마음껏 휘두르다가, 효종 2년(서기 1651) 역모사건이 탄로되어 주살된 김
자점(金自點)이 쌓았다고 하여 자점보라 불리우며, 인근에서는 자재미보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백족산 중에는 금반형(金盤形)이라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명당이 있는
데, 김자점이 일찍부터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득세하게 되자 그 부친의 묘를
그 곳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금반형에는 그 앞에 반드시 큰 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곳에는 단 한 가지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김자점은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묘
가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청미천을 막아 보를 쌓으므로서 부족한 수세를 보강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자점보가 생기게 된 유래이다.
--자점보는 결과적으로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 공급원이 되어 그 이후부터
이 지역은 가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오남리 일대에 물을 공급하
는 중요한 수원지 구실을 하고 있다.
--수백년을 내려오는 동안 하상(河床)의 변동과 개축으로 원래의 형태는 밝히기 어
려우나 현재 남아있는 보의 길이는 약 500m 가량이며, 폭은 넓은 곳이 약 6m, 좁은
곳은 2m 가량된다.
▣ 백족산(白足山) pp815.
--장호원읍에 있는 백족산은 해발 402.2m로 이천군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며
산 남쪽을 청미천(淸渼川)이 휘돌아 그 건너편은 충청북도 음성군이다.
--산정에는 백개의 발을 가진 지네가 살았다고 하는 전설이 깃든 지네굴이 있는데,
이 지네의 전설에서 백족이라는 산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
勝覽)」 음죽현(陰竹縣) 조(條)에 「백족산은 현(現) 남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산중
에는 석남사(石南寺)와 백족사(白足寺)가 있다.」고 나와 있어 예로부터 백족산이라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이 백족산에도 금반형지(金盤形地)의 전설이 있으니 산 남쪽 기슭에 있는 김자점
(金自點)의 부친의 묘(墓)로 알려지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조선 인조 때의 역
신인 김자점은 여기에 부친의 묘를 쓰고 묘 앞에 부족한 수세(水勢)를 보강하기 위
하여 청미천 상류를 막아 자점보(自點洑)를 만들었다고 하며, 그로 인해 득세하여 영
의정의 자리에 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촌로들에 의하면 이곳은 아무리 강풍이 휘몰아치는 날도 바람 한점 없이 평온하다
고 한다.
--산중에는 보타사(寶陀寺)가 있으나 창건년대는 그리 오래지 않으며, 백족산 서쪽에
있는 어석리(於石里) 부락 가운데에 지방지정문화재 107호인 높이 5m의 입상석불(立
像石佛)이 있다.
▣ 자점보(自點洑)의 유래(由來). pp899.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 402m의 우뚝 솟은 백족산(白足山)이 있고 이 백족산 남
단(南端)을 휘돌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淸渼川)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만들어진 보(洑)가 자점보(自點洑)인데 조선
인조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마음껏 휘두
르다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金自點)이 쌓았다하여 그렇게 불리워
지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金盤形)이라는 묘(墓)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에서는 금반형을
묘자리의 으뜸으로 쳤다. 이 금반형 자리를 김자점이 젊어서부터 눈독을 들이다가
임금의 외척(外戚)으로 득세하여 조정을 휘어잡게 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부친의 묘
를 그 곳에다가 썼다.
--그런데 백족산의 금반형 자리에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
려다 보이는 곳에 큰 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청미천 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은 점
이 었다. 김자점은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청미천을 막음으로써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 사철 푸른 물이 고여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
의 명당(名堂)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덕(德)으로 가뭄이 들 때에는 근처 농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 뽑아써서 인근 일
대가 흉작으로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자점보의 물로 농사를 지으면 밥맛이 좋고 그
쌀을 먹은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어 김자점이 그 쌀을 가져다 먹고는 임금
의 외척이 되어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도 생겨났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보의 길이는 약 500m, 폭이 넓은 곳이 약 6m, 좁은 곳은 약 2m 가
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 공급지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충신 임경업 장군을 모함하여 죽이고 청나라와 반역을 꾸미는 등 악행을 일삼았던
김자점도 우리 고장을 위해서는 한가지 좋은 일을 남김 셈이라 하겠다.
▣ 김주(金澍). pp923.
--이조 명종 때의 충신(忠臣)이다. 고려 때 안렴사를 지낸 김사렴(金士廉)의 7대 손
이며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이다.
--서기 1539년(중종 3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힌 후 경상도 관찰사를 거
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서기 1563년(명종 18) 선계변무(璿系辨誣) 문제로 명나라에
들어가 사명(使命)을 완수하였으나 병들어 연경의 객사에서 별세하였는데, 서기 1590
년(선조 23) 나라를 빛낸 공훈으로 화산군(花山君)에 피봉(皮封)되었다. 퇴계 이황
(退溪 李滉),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금호 임형수(錦湖 林亨秀) 등과 가까이 사귀
었다.
--공(公)의 자(字)는 응림(應霖), 호(號)는 우암(寓菴), 저서로는 우암유집(寓菴遺集)
이 있다. 공의 사당 우암사(寓菴祠)가 율면 본죽리에 있으며, 공은 또한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초서에 능했다 한다.
▣ 김선(金銑). pp956
--본관은 안동, 율면 본죽리에 살았다. 어려서 급제하여 안렴사를 지낸 후 이조에 벼
슬하지 아니하고 청주에 은둔한 김사렴(金士廉)의 11대 손(孫), 광국공신(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이다.
--공은 부모께 효도함이 지효(至孝)라고 세상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과 증지평의
벼슬을 받았다.
☞ 이천군지를 옮기면서 김주 선조의 사당 우암사가 18년전에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
--하였는데 과연 지금 우암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암사지라도 알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자점보의 역할이 천편일률적으로 역신임을 매도하기 위한 전설 일변
--도 보다는 그래도 농용수 공급원으로서 이 지역사회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평가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 이제 시군지순례는 이천군지(율면), 부여군지(부여읍), 고흥군지(도양읍)를 끝으로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천안.천원지(병천면)를 찿
--지 못하여 순례를 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향후 천안.천원지(병천
--면)를 비롯하여 김해시사. 밀양지. 제천지. 익산지. 남원지. 나주지. 영암지를 한번
--살펴보고 싶고, 나머지는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시군지순례를 통해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김발용 - 감사 감사 또 감사할 다름입니다.
▣ 김항용 - 그동안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님의 크신 연구 업적은 길이 우리 문중사에 남으리라 믿습니다.
▣ 영환 - 힘든 작업이시었리라 짐작 됩니다. 그 많은 자료를 일일히 타자하시고, 정리하시느로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훌륭한 업적은 후세에 귀감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와아! 대단한 자료입니다. 오랫만에 안렴사공파 자료를 보아 더욱 좋습니다.
▣ 김주회 - 윤만 형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시군지 수집- 타이핑- 연재에 들이신 정성과 노력과 열의에 고개숙여 감사 드립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1차사료를 수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 복사하여 자료화하였습니다. 앞으로 두루두루 연구하고 활용하겠습니다. 시군지 순례를 일차 마무리하신다 하니 약간은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앞으로의 또다른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동안 너무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 본죽리(本竹里) 일실사효(一室四孝) 정문(旌門) pp748~749.
--율면 본죽리 김용진(金龍振)씨 집 문전에 세워져 있던 것을 우암사(寓菴祠) 개축
당시 그 정문(正門)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金銑)과 그의 동생인 김석(金
錫), 이들의 두 누이동생 등 4남매의 효행을 표한 정문(旌門)이다.
--김선은 안동인으로 문단공(文端公)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해지자 이들 4남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므로서 다시 소생, 7일간을
더 연명케 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영묘(英廟) 계유년(癸酉年, 서기
1753)에 조정에서 정려(旌閭)하고 영조대왕이 친히 일실사효(一室四孝)라 써서 사액
(賜額)하였다고 전한다.
▣ 본죽리(本竹里) 우암사(寓菴祠) pp755.
--율면 본죽리 밤골부락 상단에 있는데 퇴락(頹落)하여 정문(正門)과 담장은 무너
진지 오래고 남아있는 사당 건물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무너져 가고 있다. 명종 때
사람인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의 사당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
히 초서(草書)에 능했다고 한다. 김주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응림(應霖), 호를 우암
(寓菴)이라 했다.
--1539년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 등을 지내고,1563년 종
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서 명나라 연경에 갔다가 그 곳에서 별세하여 명의 황제가 관
(棺)과 수의를 하사하고 예조판서와 양관(兩館) 대제학을 추증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단공(文端公)이다.
▣ 오남리(梧南里) 자점보(自點洑) pp798.
--보(洑)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흐르는 냇물을 막아 둑을 쌓은 것을 말하는데, 자
점보(自點洑)는 경기도와 충청북도 음성군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淸渼川) 상류에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장호원읍 오남리 지역으로 백족산(白足山) 동남단 끝이 된다.
--인조반정 때의 공신(功臣)으로 왕실의 외척이 되어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권세를 마음껏 휘두르다가, 효종 2년(서기 1651) 역모사건이 탄로되어 주살된 김
자점(金自點)이 쌓았다고 하여 자점보라 불리우며, 인근에서는 자재미보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백족산 중에는 금반형(金盤形)이라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명당이 있는
데, 김자점이 일찍부터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득세하게 되자 그 부친의 묘를
그 곳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금반형에는 그 앞에 반드시 큰 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곳에는 단 한 가지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김자점은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묘
가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청미천을 막아 보를 쌓으므로서 부족한 수세를 보강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자점보가 생기게 된 유래이다.
--자점보는 결과적으로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 공급원이 되어 그 이후부터
이 지역은 가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오남리 일대에 물을 공급하
는 중요한 수원지 구실을 하고 있다.
--수백년을 내려오는 동안 하상(河床)의 변동과 개축으로 원래의 형태는 밝히기 어
려우나 현재 남아있는 보의 길이는 약 500m 가량이며, 폭은 넓은 곳이 약 6m, 좁은
곳은 2m 가량된다.
▣ 백족산(白足山) pp815.
--장호원읍에 있는 백족산은 해발 402.2m로 이천군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며
산 남쪽을 청미천(淸渼川)이 휘돌아 그 건너편은 충청북도 음성군이다.
--산정에는 백개의 발을 가진 지네가 살았다고 하는 전설이 깃든 지네굴이 있는데,
이 지네의 전설에서 백족이라는 산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
勝覽)」 음죽현(陰竹縣) 조(條)에 「백족산은 현(現) 남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산중
에는 석남사(石南寺)와 백족사(白足寺)가 있다.」고 나와 있어 예로부터 백족산이라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이 백족산에도 금반형지(金盤形地)의 전설이 있으니 산 남쪽 기슭에 있는 김자점
(金自點)의 부친의 묘(墓)로 알려지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조선 인조 때의 역
신인 김자점은 여기에 부친의 묘를 쓰고 묘 앞에 부족한 수세(水勢)를 보강하기 위
하여 청미천 상류를 막아 자점보(自點洑)를 만들었다고 하며, 그로 인해 득세하여 영
의정의 자리에 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촌로들에 의하면 이곳은 아무리 강풍이 휘몰아치는 날도 바람 한점 없이 평온하다
고 한다.
--산중에는 보타사(寶陀寺)가 있으나 창건년대는 그리 오래지 않으며, 백족산 서쪽에
있는 어석리(於石里) 부락 가운데에 지방지정문화재 107호인 높이 5m의 입상석불(立
像石佛)이 있다.
▣ 자점보(自點洑)의 유래(由來). pp899.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 402m의 우뚝 솟은 백족산(白足山)이 있고 이 백족산 남
단(南端)을 휘돌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淸渼川)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만들어진 보(洑)가 자점보(自點洑)인데 조선
인조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마음껏 휘두
르다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金自點)이 쌓았다하여 그렇게 불리워
지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金盤形)이라는 묘(墓)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에서는 금반형을
묘자리의 으뜸으로 쳤다. 이 금반형 자리를 김자점이 젊어서부터 눈독을 들이다가
임금의 외척(外戚)으로 득세하여 조정을 휘어잡게 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부친의 묘
를 그 곳에다가 썼다.
--그런데 백족산의 금반형 자리에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
려다 보이는 곳에 큰 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청미천 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은 점
이 었다. 김자점은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청미천을 막음으로써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 사철 푸른 물이 고여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
의 명당(名堂)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덕(德)으로 가뭄이 들 때에는 근처 농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 뽑아써서 인근 일
대가 흉작으로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자점보의 물로 농사를 지으면 밥맛이 좋고 그
쌀을 먹은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어 김자점이 그 쌀을 가져다 먹고는 임금
의 외척이 되어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도 생겨났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보의 길이는 약 500m, 폭이 넓은 곳이 약 6m, 좁은 곳은 약 2m 가
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 공급지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충신 임경업 장군을 모함하여 죽이고 청나라와 반역을 꾸미는 등 악행을 일삼았던
김자점도 우리 고장을 위해서는 한가지 좋은 일을 남김 셈이라 하겠다.
▣ 김주(金澍). pp923.
--이조 명종 때의 충신(忠臣)이다. 고려 때 안렴사를 지낸 김사렴(金士廉)의 7대 손
이며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이다.
--서기 1539년(중종 3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힌 후 경상도 관찰사를 거
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서기 1563년(명종 18) 선계변무(璿系辨誣) 문제로 명나라에
들어가 사명(使命)을 완수하였으나 병들어 연경의 객사에서 별세하였는데, 서기 1590
년(선조 23) 나라를 빛낸 공훈으로 화산군(花山君)에 피봉(皮封)되었다. 퇴계 이황
(退溪 李滉),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금호 임형수(錦湖 林亨秀) 등과 가까이 사귀
었다.
--공(公)의 자(字)는 응림(應霖), 호(號)는 우암(寓菴), 저서로는 우암유집(寓菴遺集)
이 있다. 공의 사당 우암사(寓菴祠)가 율면 본죽리에 있으며, 공은 또한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초서에 능했다 한다.
▣ 김선(金銑). pp956
--본관은 안동, 율면 본죽리에 살았다. 어려서 급제하여 안렴사를 지낸 후 이조에 벼
슬하지 아니하고 청주에 은둔한 김사렴(金士廉)의 11대 손(孫), 광국공신(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이다.
--공은 부모께 효도함이 지효(至孝)라고 세상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과 증지평의
벼슬을 받았다.
☞ 이천군지를 옮기면서 김주 선조의 사당 우암사가 18년전에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
--하였는데 과연 지금 우암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암사지라도 알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자점보의 역할이 천편일률적으로 역신임을 매도하기 위한 전설 일변
--도 보다는 그래도 농용수 공급원으로서 이 지역사회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평가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 이제 시군지순례는 이천군지(율면), 부여군지(부여읍), 고흥군지(도양읍)를 끝으로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천안.천원지(병천면)를 찿
--지 못하여 순례를 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향후 천안.천원지(병천
--면)를 비롯하여 김해시사. 밀양지. 제천지. 익산지. 남원지. 나주지. 영암지를 한번
--살펴보고 싶고, 나머지는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시군지순례를 통해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김발용 - 감사 감사 또 감사할 다름입니다.
▣ 김항용 - 그동안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님의 크신 연구 업적은 길이 우리 문중사에 남으리라 믿습니다.
▣ 영환 - 힘든 작업이시었리라 짐작 됩니다. 그 많은 자료를 일일히 타자하시고, 정리하시느로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훌륭한 업적은 후세에 귀감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와아! 대단한 자료입니다. 오랫만에 안렴사공파 자료를 보아 더욱 좋습니다.
▣ 김주회 - 윤만 형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시군지 수집- 타이핑- 연재에 들이신 정성과 노력과 열의에 고개숙여 감사 드립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1차사료를 수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 복사하여 자료화하였습니다. 앞으로 두루두루 연구하고 활용하겠습니다. 시군지 순례를 일차 마무리하신다 하니 약간은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앞으로의 또다른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동안 너무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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