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32.(부여군 : 동족부락 저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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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21 04:24 조회1,531회 댓글0건본문
5부여군지/부여군지편찬위원회/1987.
▣ 동족부락(同族部落). pp50~51.
--(전략)
--한편 50호(戶) 이상의 저명한 동족부락(同族部落)은 논산군, 서천군, 공주군, 부
여군 등에 많이 산재(散在)하는데, 부여군에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진주강씨, 풍양조
씨, 남양전씨, 전주이씨, 충주지씨 등 6개 부락이 이에 해당했다. 이 가운데 부여면
(夫餘面) 저석리(楮石里). 내유촌(內柳村)의 안동김씨 부락과 초촌면 추양리. 추동의
전주이씨 부락은 각각 120호(720명)와 110호(536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자료 : 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979, 충청남도지(상권)
--(후략)
▣ 석탄정지(石灘亭址). pp983.
--부여읍 저석리(楮石里)에 있었던 고려말 공민왕 때의 충신 이존오(李存吾)선생의
정자이다. 이존오선생의 호는 그곳의 지명에서 딴 것으로 석탄(石灘)이고, 정자명은
그의 호에서 취한 듯하다. 공민왕 때 사마시(司馬試)에 같이 등제한 안노생(安魯生)
의 석탄정기에 보면 이 정자는 석탄의 가친(家親)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석탄이
퇴관(退官)한 뒤에도 이곳에서 기거(起居)하였으나 지금은 다만 정지(亭址)만 남아
있다.
--석탄은 경주인으로 자는 순경(順慶)이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학문에 힘써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적에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등과 친교가 있어 교우했으며,
1366년 정언이 되었다. (후략)
▣ 저석리(楮石里). pp1215~1216.
--몽도면 저채리(楮菜里). 석탄리(石灘里). 유촌리와 공주군 반탄면의 서원리를 병
합하여 저채와 석탄의 이름을 따서 저석리(楮石里)라 하였다. 저석리를 3개 행정리로
구분할 때 저동 내유촌 서원이라 칭하다가 저석1.2.3리로 개칭하였다. 옛날에는 금강
물이 버드랭이와 돌올앞으로 굽이쳐 흘렀다하며 돌올은 돌여울의 준말로 고려말 충신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가 귀양을 와서 살던 곳으로, 그의 호 석탄은 돌여울의 지
명을 따서 스스로 지었다 하며, 당시 그가 살던 석탄정터(石灘亭址)가 전한다. 저석
1.2리는 조선초기 말에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입촌(入村)하여 살았다하며 현재도 안
동김씨의 집촌(集村)마을이다. 저석3리는 조선 때 공주군에 속했다가 1914년 부여로
편입된 곳으로 조선중엽에 평택임씨와 담양(남양)전씨가 입촌하여 거주하면서 뒷 산
에 산신당(山神堂)을 짓고 당산(堂山)이라 칭하고, 매년 음력 정월 망일(望日)에 당
산제(堂山祭)를 지내는데 제사를 지낸 미역을 부녀자가 먹으면 이들을 낳는다는 전설
이 있으며, 지금도 간소하나마 당산제를 행하고 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 영환 - 이존오의 호인 석탄이 어데인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았;습니다. 부여군 석탄리라....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동족부락(同族部落). pp50~51.
--(전략)
--한편 50호(戶) 이상의 저명한 동족부락(同族部落)은 논산군, 서천군, 공주군, 부
여군 등에 많이 산재(散在)하는데, 부여군에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진주강씨, 풍양조
씨, 남양전씨, 전주이씨, 충주지씨 등 6개 부락이 이에 해당했다. 이 가운데 부여면
(夫餘面) 저석리(楮石里). 내유촌(內柳村)의 안동김씨 부락과 초촌면 추양리. 추동의
전주이씨 부락은 각각 120호(720명)와 110호(536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자료 : 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979, 충청남도지(상권)
--(후략)
▣ 석탄정지(石灘亭址). pp983.
--부여읍 저석리(楮石里)에 있었던 고려말 공민왕 때의 충신 이존오(李存吾)선생의
정자이다. 이존오선생의 호는 그곳의 지명에서 딴 것으로 석탄(石灘)이고, 정자명은
그의 호에서 취한 듯하다. 공민왕 때 사마시(司馬試)에 같이 등제한 안노생(安魯生)
의 석탄정기에 보면 이 정자는 석탄의 가친(家親)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석탄이
퇴관(退官)한 뒤에도 이곳에서 기거(起居)하였으나 지금은 다만 정지(亭址)만 남아
있다.
--석탄은 경주인으로 자는 순경(順慶)이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학문에 힘써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적에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등과 친교가 있어 교우했으며,
1366년 정언이 되었다. (후략)
▣ 저석리(楮石里). pp1215~1216.
--몽도면 저채리(楮菜里). 석탄리(石灘里). 유촌리와 공주군 반탄면의 서원리를 병
합하여 저채와 석탄의 이름을 따서 저석리(楮石里)라 하였다. 저석리를 3개 행정리로
구분할 때 저동 내유촌 서원이라 칭하다가 저석1.2.3리로 개칭하였다. 옛날에는 금강
물이 버드랭이와 돌올앞으로 굽이쳐 흘렀다하며 돌올은 돌여울의 준말로 고려말 충신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가 귀양을 와서 살던 곳으로, 그의 호 석탄은 돌여울의 지
명을 따서 스스로 지었다 하며, 당시 그가 살던 석탄정터(石灘亭址)가 전한다. 저석
1.2리는 조선초기 말에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입촌(入村)하여 살았다하며 현재도 안
동김씨의 집촌(集村)마을이다. 저석3리는 조선 때 공주군에 속했다가 1914년 부여로
편입된 곳으로 조선중엽에 평택임씨와 담양(남양)전씨가 입촌하여 거주하면서 뒷 산
에 산신당(山神堂)을 짓고 당산(堂山)이라 칭하고, 매년 음력 정월 망일(望日)에 당
산제(堂山祭)를 지내는데 제사를 지낸 미역을 부녀자가 먹으면 이들을 낳는다는 전설
이 있으며, 지금도 간소하나마 당산제를 행하고 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 영환 - 이존오의 호인 석탄이 어데인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았;습니다. 부여군 석탄리라....
▣ 김주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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