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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여름캠프 07 (도산서원과 우리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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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21 20:00 조회1,5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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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일부터 7.30일까지 우리 문중의 고향 安東·의성지역 姓地순례 계획으로 있는 제1회 여름캠프 답사자료를 답사일정별로 연재하면서 정리하고자 합니다.



연재하면서 여러 회원님들의 의견을 보충하면서 자료를 내실화할 수 있고, 답사자료를 미리 공부해 놓으면 답사일정도 더욱 알차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부득이 이번 답사에 참가하지 못하시는 회원님과 종친님들께서도 간접적인 답사의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가 마무리되는 데로 편집해서 복사·제본하여 답사자료로 제공할까 합니다. 많은 의견과 자료를 제공해 주시면 더욱 알찬 답사자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제1회여름캠프 07 (도산서원과 우리문중)





☞ 사진자료

도18 : 도산서원 전경 (문화재청 홈)

도19 : 도산서원 현판 (디지털한국학 홈)

도20 : 이황 영정 (디지털한국학 홈)





도산서원 경내배치도를 보면

♠도산서당, ♠농운정사, ♠역락서재와 그 외 도산서당앞 정우당, 몽천, 절우사, 그리고 서원 입구의 운영대, 천연대, 열정 만이 퇴계 선생시에 있었던 건물이고



도산서당 위쪽에 있는 동광명실, 서광명실, 동재, 서재, 전교당, 장판각, 상덕사, 전사청, 상고직사, 하고직사, 유물전시관과 도산서원 앞 호수에 떠 있는 시사단 등은 전부 퇴계 사후에 지어진 것입니다.





♠陶山書堂(도산서당)

퇴계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시던 방은 玩樂齋(완락재)라 하고, 마루는 巖栖軒(암서헌)이라 하였다.



♠ 雲精舍(농운정사)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漢字의 工자 모양으로 짓도록 하였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時習齋(시습재)라 하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觀瀾軒(관란헌)이라 하였다.



♠亦樂書齋(역락서재)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芝軒:鄭士誠) 부친이 지헌을 선생에게 취학시킬 때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의 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문화재청 홈>

종 목 사적 170호

●명 칭 도산서원 (陶山書院)

분 류 서원(사적)

면 적 324,945㎡

지정일 1969.05.28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시 대 조선 선조

소유자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문화재명 도산서원(陶山書院)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위패(位牌)를 모신 서원(書院)으로 안동(安東)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있다. 지금은 서원 앞이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당초에는 서원 남쪽에 하천을 끼고 진입하는 경관이 수려하였다. 원래 이곳은 ★이황이 생전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유생(儒生)을 교육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거처하던 곳이었다.

이황은 성(誠)·경(敬)을 주로 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축으로 하여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퇴계학파(退溪學派)를 형성하였고, 일본에도 크게 영향을 주어 동국(東國)의 해동주자(海東朱子)로 불렸다. 이황은 1609년 문묘(文廟)에 향사(享祀) 되었으며 도산서원 외에도 전국(全國) 40여개소의 서원에서 모시기도 한 조선 유학의 거두(巨頭)이다.

이황이 죽은지 4년 후 선조 7년(1574) 지방 사림(士林)들이 뜻을 모아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도산서당의 뒤편에 ♠상덕사(尙德祠)란 사당(祠堂)을 지어 위패를 모신 것이 도산서원이다. 이때에 ♠동·서재(東·西齋)와 ♠전교당(典敎堂), ♠상고직사(上庫直舍), ♠한존재(閑存齋), ♠동광명실(東光明室), ♠전사청(典祀廳), ♠장판각(藏板閣), ♠진도문(進道門)을 지어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575년(선조 8) ★한호(韓濩)가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영남 유학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에 남은 47개 서원(書院) 중의 하나다.

1969년 사적 제 170호로 지정되어 1970년까지 정부의 보존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보수를 행하였으나 원래의 모습에서 다소 변형되었다. 안동댐에 수몰되기 전에는 서원 앞에서 서남으로 흐르는 낙천(落川)을 끼고 가다 서원으로 진입하여 북으로 굽어 올라가는 좌·우 능선 사이에 경사길이 있고, 이 길을 오르다 좌측으로 꺾어 돌아서면 바로 서원의 정문인 ♠진도문 앞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따로 떨어져 유일하게 방향을 동으로 약간 튼 ♠역락서재(亦樂書齋)의 구역이 독특한 배치였음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제자 ★정사성(鄭士誠)이 공부하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 준 건물이라 한다.

♠진도문(進度門)은 약간 높은 위치에 놓여 그 앞의 7∼8단의 계단을 올라야 서원으로 들어 설 수가 있다. 진도문을 들어서면 우선 서편에 공자형(工字形) 평면을 한 ♠농운정사(농雲精舍)가 있는데, 이곳은 제자들이 머물던 곳으로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遼), 관란헌 (觀瀾軒)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의 동면은 노출되고 앞뒤로 담장이 연결되어 협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었고, 그 뒤쪽 한단 높은 지대에 ♠하고직사(下庫直舍)가 있다. 이 하고직사도 주위에 담을 따로 둘러 공간을 분리하였고 또 여기서 중앙 통로 건너 동쪽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퇴계가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주위의 담도 원래는 나지막한 토담으로 쌓고 동·서·남쪽 출입문 역시 사립문을 달아 자연과 조화된 공간을 이루었다. 서당의 앞마당은 남북으로 층단을 이루어 북쪽 높은 곳에는 서당을 세우고, 남쪽 낮은 지대에는 연지 등 정원을 이루었다. 서당의 서쪽에는 온돌방(♠완락재(琓樂齋))을 들이고 동쪽에는 벽없이 트인 마루(♠암서헌(巖栖軒))와 평상을 깐 퇴를 두고 있으며, 앞마당의 동쪽 끝에는 방지(方池)인 ♠정우당(淨友堂)이 있다. 서당의 남쪽과 동쪽의 담이 이 방지 양변에서 끊겨 연못 위에서 트여 있기 때문에 외부의 경관이 노출되는 한편 외부로부터 출입을 억제 할 수 있게 기묘한 계획을 세워 자연과 인위적인 공간을 조화시키고 대지에 단차를 두어 외부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끌어들이도록 한 것이다.

도산서당과 하고직사를 양측에 두고 다시 단을 이룬 계단을 올라서면 강당격인 전교당(典敎堂) 구역으로 출입하는 사주문과 그 앞의 서고인 누각건물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곳에서 전교당 구역과의 단차 약 2m단을 이용하여 ♠동·서 광명당(光明堂)이란 서고(書庫)를 층루(層樓)로 축대에 기대어 세움으로써 환기와 전교당 구역에서 출입이 편하게 하였다.

♠전교당(보물 제210호)은 높이 약 2m의 기단 겸 축대 위에 세워져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집인데, 기둥을 각주로 두고 홑처마와 기둥 위에 초가지 이외에 공포를 하지 않고 단청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평면으로 보아 서쪽 한칸은 한존재(閑存齋)라 하는 온돌방이 있고 동측 3칸은 대청이다. 이 전교당의 앞 낮은 곳의 양측에는 동·서재인 ♠박약재(博約齋)와 ♠홍의재(弘毅齋)가 마주보고 놓였다. 이 주위에는 담장으로 돌려져 있고, 동쪽은 판고로 통하게 하였다. 또 전교당 동북쪽에는 다시 단을 두어 상덕사로 들어가는 삼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한단 높은 위치에 정면으로 보이며 그 아랫단 서쪽에 제기고 두 채가 나란히 있다. 상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황과 제자 조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삼문과 함께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교당 또한 따로 지정이 되어 보존되고 있다.

도산서당의 모습은 ★이황이 쓴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와 제자인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쓴 『도산서당 영건기사(陶山書堂 榮建記事)』를 통해 각 건물을 짓는 과정과 성리학자인 이황의 건축적인 사고를 알 수 있다. 이 서원에는 많은 전적이 보존되어 퇴계의 사당과 당시의 정치 사회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1970년 농운정사 서편에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어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와 퇴계가 생전에 사용하던 자리, 베개, 각종 문방구류, 청류장(靑류杖) 등이 소장되어 있다. 또 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遺墨)과 『주서절요(朱書節要)』 등의 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디지털한국학 홈>

1. 가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나, 후실이었지만 자모(慈母)요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우13)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경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뒤로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2. 출사와 관직

27세(15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임명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수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여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한다.

그뒤 친정(親政)의 기회를 얻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하였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책06: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었다.

죽은지 4년 만에 고향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학문

---전 략---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왔고, 도쿠가와(德川家康)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중 략---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운월당(金雲月堂)·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자중·구경서(具景瑞)·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강이(李剛而) 등등을 위시한 260여인에 이르렀고, 나아가서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국유학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 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왔다.

---중 략---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 및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400주기기념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학술지 《퇴계학보》는 1990년 3월 현재로 64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서독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서독·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하여서 주제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왔다.

특히, 1989년 10월 국제퇴계학회와 중국인민대학이 공동주최한 제11차국제학술대회가 북경에서, 그리고 1990년 8월 제12차국제학술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바 있다.



참고문헌

退溪全書, 陶山全書(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日本刻版李退溪全集(退溪學硏究院, 1975)

退溪의 生涯와 學問(李相殷, 瑞文堂, 1973)

退溪의 生涯와 思想(柳正東, 博英社, 1974)

退溪哲學의 硏究(尹絲淳, 高麗大學校出版部, 1980)

退栗性理學의 比較硏究(蔡茂松, 景仁文化社, 1982)

李退溪哲學―그 深層硏究 및 理論―(全斗河, 國民大學校出版部, 1987)

退溪와 栗谷의 哲學(劉明鍾, 東亞大學校出版部, 1987)

李退溪―글글行動글思想(阿部吉雄, 評論社, 1977)

李退溪글敬글哲學(高橋進, 東京東洋書院, 1985)

退溪書節要(張立文, 中國人民大學出版社, 1989)

李退溪와 그의 學說(李丙글, 韓國學硏究叢書, 成進文化社, 1971)

退溪敎育思想의 現代的意義(丁淳睦, 새교육 23―2, 대한교육연합회, 1971)

李글―性理學의 眞髓―(朴鍾鴻, 韓國의 人間像 4, 新丘文化社, 1971)

退溪의 詩歌文學硏究―短歌의 歌辭에 대하여―(李家源, 退溪學硏究, 1972)

退溪先生과 奇高峯(李乙浩, 退溪學硏究, 1972)

退溪의 敬思想(李楠永, 韓國人의 人間觀, 한국교육개발원, 1977)

退溪哲學의 根本問題(柳承國, 退溪學報 19, 退溪學硏究院, 1978)

儒敎의 憂患意識과 退溪의 敬(安炳周, 退溪學報 25, 退溪學硏究院, 1980)

退溪先生의 人性論(裵宗鎬, 退溪學報 32, 退溪學硏究院, 1981)

陶山十二曲글(崔珍源, 陶山學報 7·8, 陶南學會, 1985)

退溪의 家庭觀(琴章泰, 退溪學硏究 1, 檀國大學校東洋學硏究所, 1987). 〈全斗河〉











<안동김씨 홈>

●월란정사(月瀾精舍)와 나의 추억 (김정중)



월란정사(月瀾精舍)는 임란공신 만취당<<선조께서 22歲 되시던 1560년(명종 庚申)에 퇴계선생께 청업(請業)하고 십여년간 수학하시던 곳이며 도산 2곡(陶山二曲)으로 경계(景界)가 절승(絶勝)임 (위는 만취당 실기에 사진과 함께 실린 내용입니다)



사촌문중의

안동도산 소재 유일한 정자



이젠 안동댐 수몰지역으로

배를 타고 갈수있는곳



일찌기 퇴도 선생께서

수제자 사원(만취당 김사원)선생께

정자자리 하나를

유일하게

내어주신곳



이곳에서 문답하시고

지으신 詩가 여러 수 만취당 실기에 전한다



진성이씨 퇴계후손분 들과

안동김 사촌 종중과

윤번제로 유사 맡아

400여년 동안 학술회의 개최 하신곳



내 어릴적 월란정 모임에 문중 대표로 가신다며

자랑스레 맘 설레시던

조부님 부주님!

거길 따라 간적 있는 철부지 나

월란정 가시는 사촌 손님이라며

업어 건네 주시던

중시리하던 아저씨도 이제는 이세상 분이 아니실거야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않는고... 의

그유수(流水)를

그런 저런 일들로

얼마나 많은 양반님네 들 업어 건너 주셨을꼬

나룻배 저어 가기 보다 업어줌이 간편 했을터



경상도 말로 어버라(업어라)

한마디에 잠뱅이 둥둥 걷고...

***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의

월란정사 풍광이

댐의 물과 더불어 더욱 절경이리라



퇴계후손 문중과 공동 관리하지만

안동김씨 사촌문중의 재산

송이버섯도 많이 나지요



그토록

아담하고 단아한 정자

정겨운 토담

반겨주던 대문칸

영남학파 계승하며 지켜온 토계 온혜 부포 섬촌 사촌 양반님네들



모임과 정자와 두 문중

세월속에 빛 바랬는지



어른님들 그 이상의 얘기는 모릅니다 가르쳐 주세요









<안동김씨 홈>

●퇴계이황 탄신 500주년



이황의 학풍을 따라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한 분으로 유성룡, 이상정이 있는데,

유성룡(柳成龍)은 ★(도평의공파) 김광수의 외손자이고

이상정(李象靖)은 ★김방경유허비를 書하신 분으로, ★(도평의공파) 김종덕의 스승 입니다.



(안렴사공파) ★김주(金澍)는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고



(도평의공파) ★김사원(金士元)은

1560년(명종 15) 이황(李滉)에게 나가 음양오행설을 배웠다고 합니다.



(제학공파) ★金忠甲(김충갑)은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에 뛰어났다.



(제학공파) ★김제갑(金悌甲)은

이황(李滉)의 문인입니다.



(서운관정공파) ★金 (김수)는 허난설헌의 시부 金瞻(김첨)의 동생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주(金澍)

1512(중종 7)∼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兪炳勇〉





●[안동김씨 홈] - [괴산 안동김씨 소개] 중 발췌

---전 략---

이곳에서(괴산군 문광면 문법리) 공은(★김석) 5男 2女를 낳고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그 결과 아들 모두는 과거에 합격하였고 크게 성공하여 입신양명하는 영광이 있었으며 문운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자녀들은 부친께서 학문수업을 받다가 공이 몰하자 공의 매부인 ★묵재 이문건(李文楗. 주:星州人. 호는 默齋. 趙光祖 문하생. 기묘사화로 9년간 停擧를 당하여 괴산 호암리(현 문광면 유평리)로 낙향, 은둔불사 하다가 별시문과하여 丞旨에 오름. 淸白吏에 녹선. 乙巳士禍로 성주에 23년간 유배. 유배지에서 사망. 괴산의 花巖書院에 배향됨. 詩書에 능함. 저서<默休唱酬>)에게서 공부하였다.

특히 四子 ★悌甲은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이황으로부터 수업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 때 ★忠甲은 퇴계와 아주 친분이 두터웠고 자신이 직접 아우인 제갑을 말에 태워 도산서원에 가서 공부시키기도 했다 한다.

一子 휘 ★忠甲은 안악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二子 휘 ★孝甲은 아산군수를 지냈고,

三子 휘 ★友甲은 진사로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홀로되신 할머니 의성김씨와 어머니 행주기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四子 휘 ★悌甲은 충청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원주목사로 재직중 임진란을 만나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부인과 아들 시백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숙의 시호를 받았다.

五子 휘 ★仁甲은 비안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 五子의 훌륭한 업적으로 인해 이들을 일컬어 특별히 오갑파(五甲派)라 하며 제학공파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천안시지, 1987>

★金忠甲(김충갑)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龜巖(귀암)이다. 1543(중종38) 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1545년에 일어났던 을사사화때 정암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어 고생하였다. 뒷날 풀려서 괴산에 살았는데 김충갑은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에 뛰어났다.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나이어려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억불정책으로 나오던 국책을 바꾸어 고려조에 실시하였던 승과를 다시 실시하고 승 보우를 입궐시켜 정치에 참여케 하였다.

그래서 유생들과 관리들은 모두 보우를 배척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는데 이때 김충갑이 많은 관리들과 더불어 보우를 배척하는 데 앞장서서 성리학자들 간에 이름이 높아졌다.

홍문관에서 수찬 벼슬을 하던 충갑의 매서 李(불화변)渾이 을사사화때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였다. 충갑은 이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장송가를 한 수 지어 시체 옆에 놓았다



代之耳 伐之耳

落落長松 伐之耳

小焉傾置之 棟材成之耳

大廈將傾式于 何以柱之



1546(병종1)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을사사화때의 간신들을 탄핵하다가 청주땅에 귀양가게 되어 오랜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선조초에 유배로부터 풀리는 은전을 입어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간원의 헌납(정5품직)에 이르렀으며

뒷날 보조공신 좌찬성 상락군에 봉하여졌다. 또 충청도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서원을 세워 김충갑의 곧은 영혼을 제향하였다고 한다.

김충갑이 처가로 인연이 있어 목천땅에 머물러 산 것이 안동김씨의 집단 거주지인 병천면의 가전리 잣밭 부락이다.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 20)∼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진사 석(錫)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정자(正字), 병조좌랑·정언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부사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는데, 왜장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領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요새만을 믿고 따로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966년에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하여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가 세워졌다.

1711년(숙종 37)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孝宗實錄, 肅宗實錄, 朝鮮金石總覽. 〈徐炳國〉





<디지털한국학>

★金 (김수)

1547(명종 2)∼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홍도(弘度),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교리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개수(改修)하였다.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유학(幼學) 신급(申$급01)이 올린 상소 속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직제학·승지를 거쳐 1587년에 평안도관찰사에서 면직되었으나, 나라에서 왜(倭)를 매우 걱정하여 변방의 일을 아는 재신(宰臣)을 뽑아 삼도(三道)로 나누어 파견하여 군무(軍務)를 순찰하고 대비하도록 할 때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91년 정철(鄭澈)의 건저문제(建儲問題)에 대해 옥당에서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할 때 부제학으로서 사성 우성전(禹性傳)의 집으로 의논하러 가서 시간이 지연되어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우성전을 탄핵하면서 남·북 두파로 갈리게 되자 남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진주에 있다가 동래가 함락되자 밀양과 가야를 거쳐 거창으로 도망을 가면서 다만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통고하니 도내가 텅 비어 왜적을 방어할 수 없었다.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을 때 겨우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으나, 근왕병이 용인(龍仁)에서 왜군에게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가던 중 영남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하여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는 하였지만, 지방사람들로부터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란의 초기에 계책을 세워 왜적과 대처하지 못하고 적병을 피하여 전라도로 도망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1592년 8월에 한성판윤이 되었고, 지중추부사·우참찬 등을 거쳐, 1596년(선조 29) 호조판서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명군(明軍)의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군량징수에 힘썼다.

그뒤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1613년(광해군 5) 손자인 비(#비58)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였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夢村集,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大東野乘. 〈朱雄英〉





★김사원(金士元)

1539(중종 34)∼1602(선조 3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 경상도 의성·점곡(點谷)·사촌(沙村)에 살았다. 증조부는 일사(逸士) 광수(光粹)이다.

1560년(명종 15) ★이황(李滉)에게 나가 음양오행설을 배웠다.

천성이 인자하여 개인의 재산을 털어 많은 기민(飢民)을 진휼하여 지방민의 추앙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인 정제장(整濟將)으로 추대되었다. 후산사(后山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義城邑誌, 典故大方. 〈張東翼〉





★김종덕(金宗德)

1724(경종 4)∼1797(정조 2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53년(영조 2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였다.

또한, 과거란 선비의 학문에 대한 뜻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배척하고,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관계진출을 사양하였다.

관력은 1779년(정조 3)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를 지냈을 뿐이다.

저서로는 《천사집》·《성학입문 聖學入門》·《예문일통 禮門一統》·《석학정론 釋學正論》·《정본고증 政本考證》·《혁려문답 革慮問答》·《예서 禮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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