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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여름캠프 08 (안동 영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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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21 20:06 조회1,6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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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일부터 7.30일까지 우리 문중의 고향 安東·의성지역 姓地순례 계획으로 있는 제1회 여름캠프 답사자료를 답사일정별로 연재하면서 정리하고자 합니다.



연재하면서 여러 회원님들의 의견을 보충하면서 자료를 내실화할 수 있고, 답사자료를 미리 공부해 놓으면 답사일정도 더욱 알차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부득이 이번 답사에 참가하지 못하시는 회원님과 종친님들께서도 간접적인 답사의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가 마무리되는 데로 편집해서 복사·제본하여 답사자료로 제공할까 합니다. 많은 의견과 자료를 제공해 주시면 더욱 알찬 답사자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제1회여름캠프 08 (안동 영호루)





☞ 사진자료

도 : 영호루 전경

도 : 영호루 편액





안동시 낙동강 건너편 정하동의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映湖樓(영호루)는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강 건너편 당북동에 있었는데, 충렬공 金方慶께서 젊은 시절에 이곳에 올라 시와 풍월을 읊던 곳이고,



충렬공께서 일본을 정벌하실 때 안동(복주)를 지나시다 영호루에 올라 시를 지은 바 있고, 충렬공의 둘째아들 김흔(金 ) 장군과 충렬공의 현손(김방경-김선-김승용-김묘-김구용) 金九容이 영호루에 올라 충렬공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은 바도 있는 우리나라의(영남의) 3대 누각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문화유적총람 3편>

●【유적명칭】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

【관리번호】760-230-231-024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유허비)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당북동

【시 대】고려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는 높이 179cm, 폭 61cm, 직경 31cm이며, ★김일대가 글을 짓고, ★남장수가 글을 썼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가부의 남쪽 관문인 이 곳이 영호루의 옛터다. 배야임수로서 앞으로 봉황암과 봉지산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낙동강 700리 맑게 흐르니 사시지경이 장관이라 춘화 경명에 파형이 문체를 이루고 호월천리에 상하 누경이 영수만경하므로 이름하여 영호루라 하고 영남 삼대루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그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는 여말에 건립되었으나 영호루는 고려 충렬왕 초년(1274) 명현 ★김방경이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안동에 들려 이 누에서 시를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중엽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몽진하면서 이 누에 자주 소일하였고 환도후에 영호루 삼자의 어필을 하사하니 공민왕 17년(1368)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을 중건하고 액자에 금을 입혀 편액하였다.



120년 후 선종 19년(1488) 벼락으로 인하여 부사 ★김이 중수하였고

명조 2년(1547) 7월 홍수로 유실되어 5년후 부사 ★안한중이 복원하였다.

선조 38년(1605)에 두번째 유실되어 74년 후인 숙종 2년(1676)에 부사 ★맹서가 복원하였고

영조 51년(1775) 홍수로 세번째 유실되어 12년 후 무신에 부사 ★신익이 복원하였으며

정조 16년(1792) 홍수에 네번째 유실, 4년후 병진에 부사 ★이집두가 복원하였고

139년후 갑술 7월 홍수로 다섯번째 유실되어 36년후 1970년에 시장 ★김낙현이 재직시 강 건너 남암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참고문헌】안동시립민속박물관, 1995, <<안동의 비석>>, 302-303.

【비 고】







<안동시 홈페이지>

● 映湖樓 (안동시 정하동 338-1번지)

영호루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대루의 하나로, 안동의 대표적인 누각이다. 고려 시대에 건축되었으며,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낙동 강 건너편에 있었다.



영호루는 울창한 숲과 낙동강의 푸르른 물, 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진 곳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영호루에 서면 안동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공민왕 친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우탁, ★퇴계, ★토은, ★야은 등의 시편등이 판각되어 있다.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피난 왔던 고려 ★공민왕이 난이 평정되자 개경으로 돌아가서 "영호루"라고 쓴 현판 글자를 내려 주었다. 이 현판을 걸기 위하여 1567년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의 규모를 더욱 확장하여 지었는데, 누가 강물에서 너무 가까이 있어 홍수로 인해 떠내려가고 다시 짓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다가, 1934년 갑술년 홍수 때는 건물이 완전히 떠내려 갔다.



현 영호루는 1970년 철근 콘크리트로 건축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한옥 누각이다. 누의 북쪽 면에는 ★공민완 친필 한자 현판 "映湖樓"를 걸고, 남쪽에는 ★박정희 대통령 친필 한글 현판 "영호루"를 걸었다.







<인터넷 검색자료>

●영 호 루 (안동시 정하동)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루의 하나인 영호루는 한수이남의 대표적 누각이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 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과 함께 하고 있다.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루의 하나인 영호루는 한수이남의 대표적 누각이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 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과 함께 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및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사장에서 활쏘기 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중기 명종 2년(1547년)에 대홍수로 누각은 유실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 ★안한준이 중창하였으며, 영조 51년(1775년) 홍수로 다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처럼 홍수로 인하여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정조 15년(1792년)의 홍수때 또 유실되어 4년뒤에 부사 ★이집두가 중건하여 100여년동안 안동의 관문으로서 그 위용을 갖추었으나 갑술년 대홍수는 면할 수가 없었다.

안동교(영호대교 아래에 있는 현 인도교) 건설공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누 위에서 휴식하는 사이 갑자기 물이 닥쳐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내려 갔다고 한다.

다음날 구담부근에서 사람들은 무사히 구했으나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 후 선산군 구미리 부근의 강물속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처럼 파란을 겪은 영호루가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이 남았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이에 1969년12월 당시 안동시.군민들이 영호루 중건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70년 11월 강건너편 안동시 정하동 산기슭 현재의 위치에 중건을 하게 되었다.



노송과 잡목이 우거진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한 영호루는 멀리 북서쪽으로 신비의 영봉 학가산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강건너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창건이후 1천여년을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았으니 지금도 누각안에는 우탁, 정몽주, 권근, 길재, 이현보, 이황 등 명현들이 이 누에 올라 지은 시현이 판각위에 걸려있으며 누각의 정면에는 박정희대통령의 한글 제액이, 북쪽에는 공민왕의 어필 제액이 걸려있다.









● 선조님들 영호루 시 모음



★충렬공 김방경



<국역 동문선, >

福州 복주

山水無非舊眼靑 산수무비구안청 ---산과 물은 모두 옛 눈에 보던 푸르름인데

樓臺亦是少年情 누대역시소년정 ---누대도 또한 바로 소년때 정일러라

可憐故國遺風在 가련고국유풍재 ---기특하여라, 고국에는 옛 풍속 남아서

收拾絃歌慰我行 수습현가위아행 ---악기와 노래를 모두 거두어 모아 내 걸음을 위로하네



※"신사년에 동으로 일본을 치다가 군사를 돌이킬 때 복주에 이르다" 라는 題註가 있다.





<우리의 명시, 동아출판사 펴냄, 1990>

福州 복주 (복주에서)

山水無非舊眼靑 산수무비구안청 ---산수는 모두 예대로 푸르르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역시소년정 ---누대 또한 소년시절의 정경일세

可憐故國遺風在 가련고국유풍재 ---어여뻐라, 고향에는 옛 풍습 남아 있어

收拾絃歌慰我行 수습현가위아행 ---풍악을 울리면서 나의 길을 위로하네



※1281년,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고향인 복주(안동의 옛이름)를 지나며 지은 시





<한국명시, 김달진, 1989>

題福州暎湖樓 제복주영호루 (복주 영호루에 쓰다)

山水無非舊眼靑 산수무비구안청 ---산수는 모두 구면이라 귀엽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역시소년정 ---누대도 또한 소년 때의 정이다.

可憐故國遺風在 가련고국유풍재 ---가련해라, 고국의 끼친 풍속이 있어

收拾絃歌慰我行 수습현가위아행 ---현가를 수습하여 내 마음 위로한다.





<안동김씨 홈페이지-김영환>

東征日本過福州 (동정일본과복주) (忠烈公 方慶)

일본정복하러 가는 길에 안동을 지나며 충렬공 방경



山水無非舊眼淸 (산수무비구안청) 산과 물은 옛날 보던 맑음 그대로이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역시소년정) 누대 또한 어릴 때 정일러라.

可憐故國遺風在 (가련고국유풍재) 애틋하여라, 고국엔 옛 풍속 남아있어,

收拾絃歌慰我行 (수습현가위안행) 노래소리 모아서 내갈길 위로하네.





<안동김씨 홈페이지-세덕사 김항용>

東征過次福州登映湖樓吟詩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도중 안동의 영호루에 올라 읊은 시)



山水無非舊眼靑 산과 물은 옛모습 그대로 푸른 빛이 아닌 것이 없고

樓臺亦是少年情 소년시절 놀던 누각은 변함이 없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기특하여라 고국에는 옛 풍속이 남아 있으니

收拾絃歌慰我行 아름다운 악기와 노래를 거두어 모아 이 마음 달래네



---年代 : 1274(忠烈 元年) 10월. 고려도독사(高麗都督使)로 아들 흔과 사위 조변(趙?)과 함께 원군(元軍)과 연합하여 일본 원정시(日本 遠征時) 고향인 안동(安東-福州)을 지나며 영호루(映湖樓)에 올라 지은 시.

---出典 : <東文選>, <韓國歷代名詩全集>

---註解 : 東征--1274년 일본 정벌시. 福州--慶北 安東의 舊地名.





<서봉 김사달 박사>

忠烈公 方慶 詩詠 福州(今安東) 映湖樓



山水無非舊眼靑 산천은 변함없이 옛모습 그대로 있고

樓臺亦是少年情 루대도(복주루를 말함) 또한 소년시절의 정이 그대로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고국은 아직도 옛풍습 그대로 남아있고

收拾絃歌慰我行 아름다운 거문고소리와 노래는 나의 갈길을 위로해 주도다



이시는 충렬공께서 1240년에 복주(지금의 안동) 영호루에 가셔서 소년시절에 놀으시던 루에 올라 감개무량한 정을 만끽하면서 지으신 시다 (거금 731년전)

충렬공 22대손 (안렴사공 18대손) 사달(의박 서예가)은 이 글을 쓰다







★ 충렬공 둘째아들 김흔

登福州映湖樓 (都僉議公 흔 )

안동 영호루에 올라서



十載前遊入夢淸 옛날 놀던 일 꿈속에 환하게 들어 오며,

重來物色慰人情 다시 오매 풍경이 인정 위로하네.

壁間奉繼嚴君筆 벽에 걸린 아버님글 이어 쓰니,

堪타愚兒萬戶行 어리석은 아들 만호 걸음이 부끄럽네.







★ 척약재 김구용

安東客舍北樓次高祖上洛公詩韻 (文溫公 九容)

안동영호루에 고조 상락공 시의 운을 따서



先祖題詩字字淸 선조께서 지으신 시 글자마다 맑고 맑아,

重來此日更含情 오늘 다시 와서 보니 정감이 새로워라.

江山似有留連色 안동강산은 옛모습 그대로 어울러 있으니,

仍占春風末肯行 봄바람 기대서서 가기 싫을 뿐일세.



한자가 지원되지 않아 한글로 적은 글자 설명

흔=기뻐할 흔=心방변에 도끼斤을 합한 글자

타=속일타,방탕할탄,으쓱거릴 이=말씀言변에 어조사也를 합한 글자









<대종회 연혁>

---1995

映湖樓에 게시했던 忠烈公 시문 현판이 유실되어 35萬원을 들여 새로 제작하였다.

















▣ 김항용 -

▣ 김영환 -

▣ 김윤만 -

▣ 김태서 -

▣ 김재익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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