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안동 오천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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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2-07-22 23:50 조회1,650회 댓글0건본문
오천문화유적지(烏川文化遺蹟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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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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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 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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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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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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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요약 |
안동에서 퇴계로를 따라 도산서원방면으로 16㎞쯤 간 지점에 군자리(君子里) 라고 쓴 빗돌을 볼수 있다, 그 안쪽에 오천 문화재단지가 자리잡고 있다. 본디 여기에서 2㎞ 떨어진 군자리에 있던 광산김씨의 동쪽마을이 안동댐으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74년 번듯한 건물 열한채를 와룡면 오천리 이곳에 옮겨온 것이다. 광산 김씨는 신라 49대 현강왕의 셋째 아들인 김홍광을 시조로 모시는 집안이다.김홍광이 무진주(현재 광주광역시)로 옮겨가 자리를 잡았다가 고려 후기에 개경으로 가 명문으로 발전하였는데,진보이씨,봉화금씨,안동권씨 등 영남 사족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 일파가 안동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대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을 배출했으며, 학자집안으로 이름 높다. 김장생은 동국 18현의 하나로, 문묘에 배향되어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도 얻었다 이 곳 예안파에서는 세칭 7군자를 배출한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이는 지명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군자리를 지키던 집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제자리 앉은집의 의연함은 잃어버렸지만 집 한채 한채가 똑똑하고 의젓하여 옛 조선집의 멋과 격식을 잘 보여 준다. 그래서 이곳 군자리에 옮겨온 집들 가운데 두채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세채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운데에 유물전시관인 숭원각을 지어 1350년대 고려 말기의 호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500년 동안의 호적·교지·노비문서·분재기 등 고문서 1,000여점과 각종 문집 2,000여권 등 광산 김씨 문중의 중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영남지역 최고의 사립 중등학교였던 협동학교(協同學校)의 교재가 유일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이 가운데 고문서 7종 429점은 보물 제1018호로, 고서 13종61점 보물 제1019호로 지정 받았다. 집들은 조붓한 언덕 여기저기에 펼처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후조당(後彫堂)이다. 예안파 대종택에 딸린 별청(別廳)인 후조당은 조선 중기인 선조때 김부필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특별히 지은 제청으로, 중요민속자료 제227호이다.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후조당의 대종택은 사랑채만이 이곳으로 옮겨졌고, 안채는 안동시내로 옮겨졌기 때문에 종택의 면모를 온전히 살필 수 없다. 그러나 사랑채는 나무결이 아름다운 매우 위풍당당한 건물이다. 그 옆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문을 둔 곳은 예안 입향조인 김효로(金孝盧, 1455∼1534)와 그 증손인 의병대장 김해(金垓)를 불철위로 모신 별묘(別廟)로 사당 앞마루 흙〔토당, 土堂〕으로 만든 임진왜란 전 건물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이다 오천 문화재단지의 동쪽으로는 대청마루가 널찍하여 눈에 띄는 건물이 탁청정(濯淸亭)이다. 입향조의 아들이 김수(金綬)가 조선 중종 36년(1541)에 지은 정자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매우 화려하게 지어진 이 집은 단일 정자로는 규모가 매우 크며 구조도 우아하다.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이 쓴 편액도 결려 있어 당시 교우관계를 잘 보여준다. 안채와 함계 중요민속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해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가 조선 현종 13년 (1672)에 세운 침락정(枕絡亭)은 일종의 강당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이다.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을 올린 간소한 건물로 공부하는 건물의 단아한 맛을 느끼게 해 준다. 이처럼 오천 문화재단지의 집들은 규모가 크며 큰 대로, 아담하면 아담한대로 맛을 지니고 있다. 집들은 찬찬히 둘러보면 창과 문의 위치와 비례, 창 위의 쪽창, 은근히 화려한 창살 등 눈 여겨 볼 구석이 |
▣ 김윤만 -
▣ 김항용 -
▣ 김재원 -
▣ 태영/문 -
▣ 김주회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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